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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02 [2025/05/20 13:05] – ssio2 | a-102 [2025/05/21 10:45] (현재) – ssio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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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사성휘현상소문(成均館大司成諱鉉上疏文)=== | ===성균관대사성휘현상소문(成均館大司成諱鉉上疏文)=== |
<WRAP 36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 <WRAP 36em justify> |
| <WRAP centeralign> |
| 세종실록49권, 세종 12년 8월 22일 경인 2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
| 황현 등이 경학 공부의 부흥책을 상소하다 |
| </WRAP> |
| <hidden \_한문 원문 보기> |
<typo ff:'한양해서'> | <typo ff:'한양해서'> |
○行成均大司成黃鉉上疏曰:\\ | ○行成均大司成黃鉉上疏曰:\\ |
\\ | \\ |
命下詳定所。 | 命下詳定所。 |
<typo> | </typo> |
</hidden> | </hid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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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행 성균관 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 황현(黃鉉) 등이 상소하기를,\\ | \_행 성균관 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 황현(黃鉉) 등이 상소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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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우(虞) 때에 인재(人才)가 풍성(豐盛)하였던 것은 그 배운 바가 진실성이 있었기 때문이요, 한(漢)·당(唐) 때에 인재가 고대(古代)와 같지 못했던 것은 그 배운 바가 진실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며, 마음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갖추면서, 수신(修身)하는 데 충분하다면 본체(本體)가 확립되어, 가정과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天下)를 평안히 하는 데 공효가 행하여질 것입니다. 배운 것이 그 진실성이 없으면 문예(文藝)에는 비록 교묘(巧妙)할지라도, 생각과 마음을 성실히 하고 바로 갖는 데 무슨 보익(補益)을 주며, 문의(文義)의 해설에 비록 밝다 하더라도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을 주겠습니까.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 천성(天性)이 총명하신 데다가 학문에 밝으시고 또 넓으시며, 과거(科擧)를 설시하시고 성리학(性理學)을 숭상하시니, 위로는 왕궁(王宮)으로부터 아래의 시골까지 한 지방도 배우지 않는 곳이 없고, 한 사람도 가르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이는 학문의 본체가 이미 서고 학문의 공효가 이미 행하는 것으로서, 비록 도당씨(陶唐氏)·유우씨(有虞氏)의 진실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문과 초장(文科初場)에 강론(講論)을 폐지하고 의의(疑義)를 시험한 뒤로는 국학(國學)153) 에 들어오는 자들이 한갓 헛된 이름만을 사모하고 진실한 학문을 힘쓰지 않고 있으며 억지로 강의를 받기는 하오나, 물러나와 그 집에서 하는 것을 살펴본다면 경서(經書)의 책들은 책상 위에 팽개쳐 두고 강독(講讀)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오직 사부(詞賦)의 글만을 일삼아, 고금 인사들이 지은 것으로 과문(科文)에 적절한 것이면 다 베껴 차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외고 생각하며 열람의 손길을 멈추지 않고, 비록 같은 연배(年輩)가 지은 것이라도 혹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있으면 역시 다 기록해 간직하는 형편입니다. 의의(疑義)와 표문(表文)·책문(策文)의 글들은 경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초집(抄集)한 데에 따르고, 고시관에게 요행을 바라는 풍습은 자제(子弟)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공경(公卿)과 가정의 부형(父兄)들까지도, 이렇게 하기를 자제들한테 바라고 있으니, 누가 즐겨 속을 썩여 가며 경서를 연구하여 성인(聖人) 같이 되기를 바라고, 하늘 같이 높고 크기를 바라는 학문에 유의하여 안으로 본체를 세우고 밖으로 공효를 행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배우는 자의 일신에만 무익(無益)할 뿐 아니라, 실로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교육의 근본 의의(義意)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의 이의산(李義山)과 송나라의 유자의(劉子儀) 등이 전적으로 문장만을 숭상하여 하나의 문체(文體)를 만들어 이루니, 당시 과거에 응시하던 선비 유기지(劉幾之)와 같은 무리들이 이를 서곤체(西崑體)라 이르며 높이 신봉하고 또 도습(蹈襲)하여, 송나라의 윤수(尹洙)·매성유(梅聖兪) 등이 그 문체를 변경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취하지 못하고, 가우(嘉祐) 원년에 구양수(歐陽脩)가 지공거(知貢擧)로 된 후 이 서곤체의 비루(卑陋)함과 또 이를 본뜨는 자가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일체 이를 배격하였으니, 이것이 송대(宋代)에 인재가 융성하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융성한 우리 나라에 와서는 《육전(六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식년(式年)의 과거는 반드시 《오경(五經)》에 능통한 자라야 응시를 허용하나니, 반드시 성균관(成均館)은 학당을 《사서(四書)》와 오경재(五經齋)로 나누어 놓게 하고, 생도(生徒)가 대학재(大學齋)로 들어가서 읽기를 마치면 성균관에서 이를 예조(禮曹)에 보고한다. 그리하면 예조에서 대성(臺省) 각 1명과 같이 성균관으로 가서 그 관원(館員)과 합동으로 고찰(考察)하여, 그 해설이 상세 분명하여 근본 뜻을 속속들이 꿰뚫어 통한 자는 문부(文簿)를 만들어 이름을 써서 논어재(論語齋)로 올리고, 통하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본재(本齋)에 머물러 두어 통하기를 기다리게 한다. 《논어》·《맹자》·《중용》의 고강(考講)과 승척(升陟)도 모두 이 예에 의하되, 《중용(中庸)》의 강설(講說)까지 모두 통과한 자는 예기재(禮記齋)로 올린다. 이 《예기》를 다 읽고 나면 성균관에서는 이를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는 다시 대성(臺省)의 관원과 함께 강설의 시험을 《사서(四書)》의 예와 같이 하여 차례로 올려 춘추재(春秋齋)·시재(詩齋)·서재(書齋)·역재(易齋)까지 이르게 하고, 오부(五部)의 생도는 교수관(敎授官)이 강의에 통한 자를 시험하여 성균관으로 보내어 다시 상기와 같이 시험하게 하며, 주·부·군·현의 생도는, 각도의 관찰사가 매년 봄·가을로 경서에 정통한 수령과 한량관(閑良官) 2, 3명으로 각 도회소(都會所)를 순회하며 강의를 시험하게 하되, 역시 성균관의 예에 의하여 아무가 무슨 경(經)·무슨 서(書)에 통과하였다고 분명히 문부에 기록하여 모두 성균관으로 보내면, 성균관에서는 또 이를 예조에 보고하여 다시 강의를 시험하기를 성균관의 예와 같이 하는데, 성균관 및 오부·외방의 생도까지도 모두 학적(學籍)을 비치하고 누가 모슨 경(經)·무슨 서(書)에 통과하였다는 것만 쓰고 그 성적의 순위는 정하지 않고 두었다가,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이르러 성균관에서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다시 〈전하께〉 아뢰고, 서울은 성균관과 한성부에서, 외방은 각도의 관찰사가 상기(上記)한 《오경(五經)》·《사서(四書)》에 통과한 자들을 전에 정한 액수대로 시험 선발하되, 《사서》는 각기 1장(一章)을 강설하고, 《오경》도 각기 1장을 강설하는 것으로서 초장(初場)을 삼는다.’ 하였으니, 우리 태조께서 개발(開發)해 놓으심이 이렇게도 지극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도 반드시 본받으셔야 할 조종(祖宗)이 이루어 놓은신 아름다운 법제입니다. 이를 비방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강론(講論)으로 시험보이면 도리어 비루(卑陋)·번쇄(煩瑣)한 폐단이 있고, 의의(疑義)로 시험을 보이면 도리어 〈옛것을〉 그대로 도습(蹈襲)하는 폐단이 있다. ’고 합니다. 신 등은 이 두 가지의 법을 겸해 가지고 더할 것은 더하고, 덜 것은 덜어 버린다면 그러한 폐단은 없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학(國學)에 들어온 생도에게 당초 그 서재를 나누어 정할 때에, 이미 대성(臺省)·예조(禮曹)와 합동하여 강론의 고시를 실시하고 문부를 비치한 것이온데, 식년(式年)에 가서 어찌 다시 강론을 시행하여 초장(初場)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앞으로는 대학재(大學齋)부터 주역재(周易齋)까지 모두 통과한 자는 바로 회시 중장(會試中場)에 나가도록 하고, 문부에 기록해 둔 경서(經書)를 계산하여 초장(初場)의 분수(分數)로 하되, 혹시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역시 모두 서용(敍用)케 하고, 그 나머지 바로 〈회시 중장으로〉 가는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향관 회시(鄕館會試)에서 모두 의의(疑義)를 가지고 시험하되, 삼장(三場)의 글을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인재를 선발하던 예에 의해 초집(抄集) 도습(蹈襲)의 풍습을 배격하고 경서에 근거를 둔 자를 선발하면, 진실한 학문을 숭상 신봉하며, 비루 번쇄한 폐단을 없이 하며, 문장의 재질(才質)을 분발시켜 그대로 도습하는 병통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오늘의 학자들은 명예만을 위하고 진실한 학문을 힘쓰지 않아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정(朝廷)에서 칭송을 받고, 명색 경학(經學)하는 자는 결국 〈한 평생을〉 교수(敎授)로 늙어 버리기 때문에, 그 자제(子弟)들이 먼저 문사(文辭)에 마음을 두고 애당초 경학에 뜻을 주지 않을 뿐더러, 간혹 부지런히 독서하는 자가 있으면 친우[朋友]들에게 도리어 멸시를 받는 정도입니다. 국가에서는 비록 적극적으로 학문을 진흥시키려고 하나, 학교가 퇴폐되고 해이(解弛)함이 이렇게 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모두들 교수가 되면 천한 것으로 보고 유자(儒者)의 스승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서울 사부(四部)의 교수는 그 직임이 성균관 직을 띠고 있는데도 도리어 군직(軍職)에 속해 있으니, 이는 거의 선비의 스승을 높이 대접하려는 뜻이 아닌 것으로 봅니다. 외방의 교수는 더욱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되어 도리어 염장(鹽場)·역승(驛丞)만도 못한 실정이어서, 그가 부임(赴任)할 때는 각 고을이나 각역(各驛)에서도 개인 행려(行旅)처럼 취급하여 그의 유숙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임소(任所)에서의 접대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히 박하여, 일수(日守)·삼반(三班)으로부터 관복(官僕) 등의 무리들까지도 마치 군살이나 혹의 존재처럼 보며 경멸하는 형편이오니, 하물며 크게 진취하려는 무리들이 어찌 겸허한 마음으로 즐겨 그 강의를 받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이제부터 사부(四部)의 교수는 부마다 각기 1명씩을 전례에 의해 사무가 비교적 한가한 예문관(藝文館)·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교서관(校書館) 같은 관원으로 품질에 따라 겸임(兼任)하게 하여 유자(儒子)의 스승의 직임을 높이게 하시고, 외방의 교수는 경서에 밝고 행검을 닦아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택해 보내게 하고, 계수관(界首官)에 있어서는 전조(前朝) 때의 사록(司錄)의 예에 의하여 외사(外史)의 직임을 겸하게 하고, 강론하고 권면하는 여가에 당대의 정치·법령, 그리고 풍속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모두 기록, 매년 연초에 이를 밀봉해서 춘추관(春秋館)으로 보내어 권장 또는 경계(警戒)를 내리도록 하고, 또 춘추의 마지막 달을 당하면 관할 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면서 강의의 시험을 실시, 그 근면과 태만 여부를 살피게 하고, 부임할 때의 숙박비와 부임 후의 공대에 따르는 비용 등을 후하게 마련하여 사유(師儒)의 대우를 높이고 후학(後學)들을 격려하게 하소서. 또 시(詩)·부(賦) 등의 사장(詞章)은 유자(儒者)의 말기(末技)에 불과하며, 정치와 교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나라 주문공(朱文公)이 당시 학교에 관한 사무를 잘 다스리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대학(大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세속(世俗) 선비들의 사장(詞章)을 공부하는 것이란 그 공력이 《소학(小學)》보다 갑절이나 되지만 실제로 쓸 데가 없다. ’고 하였고, 본조(本朝)의 신 윤소종(尹紹宗)이 고려의 구재(九齋)를 둔 법이 좋지 못함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사람을 버리는 건 사장(詞章)이라 하리로다. 적막한 한(漢)·당(唐)에도 준재(俊才)가 있었던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사장이 부화(浮華)와 말기(末技)를 숭상하는 풍습을 억제하는 말들입니다. 이제 4부의 학당과 외방 도회소(都會所)에서 다시 시험 제도를 행함은 이것이 비록 학문을 일으키려는 아름다운 뜻이기는 하오나,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 도리어 쇠퇴한 고려 말기의 법을 행하고 있으니, 어찌 식자(識者)들의 실망에 찬 한탄이 없겠습니까. 이제부터 4부와 도회소에서의 시(詩)의 시험을 성균관의 예에 의해 의의(疑義)로 고쳐서 보이고, 또 봄·가을로 시를 시험보이는 것은 인재(人才)를 미리 길러 뒷날에 거두어 쓰려는 것이온데, 지금 나이 5, 60이 넘은 자가 또한 시짓는 데 참여하는 것은 실로 인재를 기르려는 본의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있고, 혹은 부자(父子)가 〈한 시험장에서〉 함께 지어 아들이 도리어 높은 등에 가기도 하니 실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50이상으로 아들과 같이 시를 지으려는 자는 참여를 허용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 "당(唐)·우(虞) 때에 인재(人才)가 풍성(豐盛)하였던 것은 그 배운 바가 진실성이 있었기 때문이요, 한(漢)·당(唐) 때에 인재가 고대(古代)와 같지 못했던 것은 그 배운 바가 진실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며, 마음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갖추면서, 수신(修身)하는 데 충분하다면 본체(本體)가 확립되어, 가정과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天下)를 평안히 하는 데 공효가 행하여질 것입니다. \\ |
| \_배운 것이 그 진실성이 없으면 문예(文藝)에는 비록 교묘(巧妙)할지라도, 생각과 마음을 성실히 하고 바로 갖는 데 무슨 보익(補益)을 주며, 문의(文義)의 해설에 비록 밝다 하더라도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을 주겠습니까.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 천성(天性)이 총명하신 데다가 학문에 밝으시고 또 넓으시며, 과거(科擧)를 설시하시고 성리학(性理學)을 숭상하시니, 위로는 왕궁(王宮)으로부터 아래의 시골까지 한 지방도 배우지 않는 곳이 없고, 한 사람도 가르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이는 학문의 본체가 이미 서고 학문의 공효가 이미 행하는 것으로서, 비록 도당씨(陶唐氏)·유우씨(有虞氏)의 진실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
| \_그러하오나 문과 초장(文科初場)에 강론(講論)을 폐지하고 의의(疑義)를 시험한 뒤로는 국학(國學)((국학(國學): 성균관)) 에 들어오는 자들이 한갓 헛된 이름만을 사모하고 진실한 학문을 힘쓰지 않고 있으며 억지로 강의를 받기는 하오나, 물러나와 그 집에서 하는 것을 살펴본다면 경서(經書)의 책들은 책상 위에 팽개쳐 두고 강독(講讀)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오직 사부(詞賦)의 글만을 일삼아, 고금 인사들이 지은 것으로 과문(科文)에 적절한 것이면 다 베껴 차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외고 생각하며 열람의 손길을 멈추지 않고, 비록 같은 연배(年輩)가 지은 것이라도 혹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있으면 역시 다 기록해 간직하는 형편입니다. \\ |
| \_의의(疑義)와 표문(表文)·책문(策文)의 글들은 경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초집(抄集)한 데에 따르고, 고시관에게 요행을 바라는 풍습은 자제(子弟)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공경(公卿)과 가정의 부형(父兄)들까지도, 이렇게 하기를 자제들한테 바라고 있으니, 누가 즐겨 속을 썩여 가며 경서를 연구하여 성인(聖人) 같이 되기를 바라고, 하늘 같이 높고 크기를 바라는 학문에 유의하여 안으로 본체를 세우고 밖으로 공효를 행하려고 하겠습니까. \\ |
| \_이는 배우는 자의 일신에만 무익(無益)할 뿐 아니라, 실로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교육의 근본 의의(義意)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의 이의산(李義山)과 송나라의 유자의(劉子儀) 등이 전적으로 문장만을 숭상하여 하나의 문체(文體)를 만들어 이루니, 당시 과거에 응시하던 선비 유기지(劉幾之)와 같은 무리들이 이를 서곤체(西崑體)라 이르며 높이 신봉하고 또 도습(蹈襲)하여, 송나라의 윤수(尹洙)·매성유(梅聖兪) 등이 그 문체를 변경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취하지 못하고, 가우(嘉祐) 원년에 구양수(歐陽脩)가 지공거(知貢擧)로 된 후 이 서곤체의 비루(卑陋)함과 또 이를 본뜨는 자가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일체 이를 배격하였으니, 이것이 송대(宋代)에 인재가 융성하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 |
| \_융성한 우리 나라에 와서는 《육전(六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식년(式年)의 과거는 반드시 《오경(五經)》에 능통한 자라야 응시를 허용하나니, 반드시 성균관(成均館)은 학당을 《사서(四書)》와 오경재(五經齋)로 나누어 놓게 하고, 생도(生徒)가 대학재(大學齋)로 들어가서 읽기를 마치면 성균관에서 이를 예조(禮曹)에 보고한다. \\ |
| \_그리하면 예조에서 대성(臺省) 각 1명과 같이 성균관으로 가서 그 관원(館員)과 합동으로 고찰(考察)하여, 그 해설이 상세 분명하여 근본 뜻을 속속들이 꿰뚫어 통한 자는 문부(文簿)를 만들어 이름을 써서 논어재(論語齋)로 올리고, 통하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본재(本齋)에 머물러 두어 통하기를 기다리게 한다. \\ |
| \_《논어》·《맹자》·《중용》의 고강(考講)과 승척(升陟)도 모두 이 예에 의하되, 《중용(中庸)》의 강설(講說)까지 모두 통과한 자는 예기재(禮記齋)로 올린다. \\ |
| \_이 《예기》를 다 읽고 나면 성균관에서는 이를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는 다시 대성(臺省)의 관원과 함께 강설의 시험을 《사서(四書)》의 예와 같이 하여 차례로 올려 춘추재(春秋齋)·시재(詩齋)·서재(書齋)·역재(易齋)까지 이르게 하고, 오부(五部)의 생도는 교수관(敎授官)이 강의에 통한 자를 시험하여 성균관으로 보내어 다시 상기와 같이 시험하게 하며, 주·부·군·현의 생도는, 각도의 관찰사가 매년 봄·가을로 경서에 정통한 수령과 한량관(閑良官) 2, 3명으로 각 도회소(都會所)를 순회하며 강의를 시험하게 하되, 역시 성균관의 예에 의하여 아무가 무슨 경(經)·무슨 서(書)에 통과하였다고 분명히 문부에 기록하여 모두 성균관으로 보내면, 성균관에서는 또 이를 예조에 보고하여 다시 강의를 시험하기를 성균관의 예와 같이 하는데, 성균관 및 오부·외방의 생도까지도 모두 학적(學籍)을 비치하고 누가 모슨 경(經)·무슨 서(書)에 통과하였다는 것만 쓰고 그 성적의 순위는 정하지 않고 두었다가,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이르러 성균관에서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다시 〈전하께〉 아뢰고, 서울은 성균관과 한성부에서, 외방은 각도의 관찰사가 상기(上記)한 《오경(五經)》·《사서(四書)》에 통과한 자들을 전에 정한 액수대로 시험 선발하되, 《사서》는 각기 1장(一章)을 강설하고, 《오경》도 각기 1장을 강설하는 것으로서 초장(初場)을 삼는다.’ 하였으니, 우리 태조께서 개발(開發)해 놓으심이 이렇게도 지극하셨습니다. \\ |
| \_이는 실로 전하께서도 반드시 본받으셔야 할 조종(祖宗)이 이루어 놓은신 아름다운 법제입니다. 이를 비방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강론(講論)으로 시험보이면 도리어 비루(卑陋)·번쇄(煩瑣)한 폐단이 있고, 의의(疑義)로 시험을 보이면 도리어 〈옛것을〉 그대로 도습(蹈襲)하는 폐단이 있다. ’고 합니다. \\ |
| \_신 등은 이 두 가지의 법을 겸해 가지고 더할 것은 더하고, 덜 것은 덜어 버린다면 그러한 폐단은 없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 \_국학(國學)에 들어온 생도에게 당초 그 서재를 나누어 정할 때에, 이미 대성(臺省)·예조(禮曹)와 합동하여 강론의 고시를 실시하고 문부를 비치한 것이온데, 식년(式年)에 가서 어찌 다시 강론을 시행하여 초장(初場)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까. \\ |
| \_앞으로는 대학재(大學齋)부터 주역재(周易齋)까지 모두 통과한 자는 바로 회시 중장(會試中場)에 나가도록 하고, 문부에 기록해 둔 경서(經書)를 계산하여 초장(初場)의 분수(分數)로 하되, 혹시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역시 모두 서용(敍用)케 하고, 그 나머지 바로 〈회시 중장으로〉 가는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향관 회시(鄕館會試)에서 모두 의의(疑義)를 가지고 시험하되, 삼장(三場)의 글을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인재를 선발하던 예에 의해 초집(抄集) 도습(蹈襲)의 풍습을 배격하고 경서에 근거를 둔 자를 선발하면, 진실한 학문을 숭상 신봉하며, 비루 번쇄한 폐단을 없이 하며, 문장의 재질(才質)을 분발시켜 그대로 도습하는 병통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 \_또 오늘의 학자들은 명예만을 위하고 진실한 학문을 힘쓰지 않아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정(朝廷)에서 칭송을 받고, 명색 경학(經學)하는 자는 결국 〈한 평생을〉 교수(敎授)로 늙어 버리기 때문에, 그 자제(子弟)들이 먼저 문사(文辭)에 마음을 두고 애당초 경학에 뜻을 주지 않을 뿐더러, 간혹 부지런히 독서하는 자가 있으면 친우[朋友]들에게 도리어 멸시를 받는 정도입니다. \\ |
| \_국가에서는 비록 적극적으로 학문을 진흥시키려고 하나, 학교가 퇴폐되고 해이(解弛)함이 이렇게 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모두들 교수가 되면 천한 것으로 보고 유자(儒者)의 스승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서울 사부(四部)의 교수는 그 직임이 성균관 직을 띠고 있는데도 도리어 군직(軍職)에 속해 있으니, 이는 거의 선비의 스승을 높이 대접하려는 뜻이 아닌 것으로 봅니다. \\ |
| \_외방의 교수는 더욱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되어 도리어 염장(鹽場)·역승(驛丞)만도 못한 실정이어서, 그가 부임(赴任)할 때는 각 고을이나 각역(各驛)에서도 개인 행려(行旅)처럼 취급하여 그의 유숙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임소(任所)에서의 접대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히 박하여, 일수(日守)·삼반(三班)으로부터 관복(官僕) 등의 무리들까지도 마치 군살이나 혹의 존재처럼 보며 경멸하는 형편이오니, 하물며 크게 진취하려는 무리들이 어찌 겸허한 마음으로 즐겨 그 강의를 받겠습니까. \\ |
| \_바라옵건대, 이제부터 사부(四部)의 교수는 부마다 각기 1명씩을 전례에 의해 사무가 비교적 한가한 예문관(藝文館)·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교서관(校書館) 같은 관원으로 품질에 따라 겸임(兼任)하게 하여 유자(儒子)의 스승의 직임을 높이게 하시고, 외방의 교수는 경서에 밝고 행검을 닦아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택해 보내게 하고, 계수관(界首官)에 있어서는 전조(前朝) 때의 사록(司錄)의 예에 의하여 외사(外史)의 직임을 겸하게 하고, 강론하고 권면하는 여가에 당대의 정치·법령, 그리고 풍속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모두 기록, 매년 연초에 이를 밀봉해서 춘추관(春秋館)으로 보내어 권장 또는 경계(警戒)를 내리도록 하고, 또 춘추의 마지막 달을 당하면 관할 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면서 강의의 시험을 실시, 그 근면과 태만 여부를 살피게 하고, 부임할 때의 숙박비와 부임 후의 공대에 따르는 비용 등을 후하게 마련하여 사유(師儒)의 대우를 높이고 후학(後學)들을 격려하게 하소서. \\ |
| \_또 시(詩)·부(賦) 등의 사장(詞章)은 유자(儒者)의 말기(末技)에 불과하며, 정치와 교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 |
| \_그렇기 때문에, 송나라 주문공(朱文公)이 당시 학교에 관한 사무를 잘 다스리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대학(大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세속(世俗) 선비들의 사장(詞章)을 공부하는 것이란 그 공력이 《소학(小學)》보다 갑절이나 되지만 실제로 쓸 데가 없다. ’고 하였고, 본조(本朝)의 신 윤소종(尹紹宗)이 고려의 구재(九齋)를 둔 법이 좋지 못함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사람을 버리는 건 사장(詞章)이라 하리로다. \\ |
| \_적막한 한(漢)·당(唐)에도 준재(俊才)가 있었던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사장이 부화(浮華)와 말기(末技)를 숭상하는 풍습을 억제하는 말들입니다. \\ |
| \_이제 4부의 학당과 외방 도회소(都會所)에서 다시 시험 제도를 행함은 이것이 비록 학문을 일으키려는 아름다운 뜻이기는 하오나,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 도리어 쇠퇴한 고려 말기의 법을 행하고 있으니, 어찌 식자(識者)들의 실망에 찬 한탄이 없겠습니까. \\ |
| \_이제부터 4부와 도회소에서의 시(詩)의 시험을 성균관의 예에 의해 의의(疑義)로 고쳐서 보이고, 또 봄·가을로 시를 시험보이는 것은 인재(人才)를 미리 길러 뒷날에 거두어 쓰려는 것이온데, 지금 나이 5, 60이 넘은 자가 또한 시짓는 데 참여하는 것은 실로 인재를 기르려는 본의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있고, 혹은 부자(父子)가 〈한 시험장에서〉 함께 지어 아들이 도리어 높은 등에 가기도 하니 실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 |
| \_앞으로는 50이상으로 아들과 같이 시를 지으려는 자는 참여를 허용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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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명하여 이를 상정소(詳定所)에 내렸다.\\ | 하니, 명하여 이를 상정소(詳定所)에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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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55면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55면\\ |
| 문단 구분은 '임인검교공파보(2002)'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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