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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1 [2025/05/21 13:02] ssio2a-111 [2025/05/30 11:29]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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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海黃公諱之璋墓碑文 +===평해황공휘지장묘비문(平海黃公諱之璋墓碑文)=== 
-先生 諱之璋 初諱天守 號鳳卵也唯我黃氏以平海爲貫 始祖 儒臣 諱洛 累傳 +<WRAP 35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溫仁金吾將軍於公爲十三代祖也四傳 諱璡檢校軍器監 三傳 諱瑾藝文館直提學 +<typo ff:'한양해서'> 
-寔生諱有定工曹判書 寔生諱順興訓導 自榮州 始居基 即先生之五代祖也 高祖 +\_平海黃公諱之璋墓碑文\\ 
-諱末孫司醞署主簿 曾祖 諱孝順陵奉祖諱 鱓義陵奉考諱俊良號錦溪  +先生 諱之璋 初諱天守 號鳳卵也 唯我黃氏 以平海爲貫 始祖 儒臣 諱洛 累傳  
-業于退溪先生之門 以學行著官止星州牧使而早卒 退溪先生 甚爲哀惜之手書棺上曰 +溫仁金吾將軍 於公爲十三代祖也 四傳 諱璡檢校軍器監 三傳 諱瑾藝文館直提學  
-嗚呼亡友錦溪黃先生 繼而書碣面 刊遺稿撰行狀後贈以嘉善 階吏曹判 妣 贈貞夫 +寔生諱有定工曹判書 寔生諱順興訓導 自榮州 始居基 即先生之五代祖也 高祖  
-人 永川李氏 察訪文樑之女 聾巖先生賢輔之孫女也先生 以明宗十九年(一五六四) +諱末孫 司醞署主簿 曾祖 諱孝順陵奉 祖諱 鱓義陵奉 考 諱俊良號錦溪  
-甲子 生於基邑郁錦里而先考公棄世之時 膝下无育故遽取季公秀良之長子諱之 +業于退溪先生之門 以學行著官止星州牧使而早卒 退溪先生 甚爲哀惜之手書棺上曰  
-瑍 爲後嗣矣 厥後九月 以遺腹子 先生 生焉初名天守 外祖考察訪公所作取賴天有 +嗚呼亡友錦溪黃先生 繼而書碣面 刊遺稿撰行狀後贈以嘉善 階吏曹判 妣 贈貞夫人  
-守之意也云 己巳(一五六九)以六歲之童 往訪于陶山汾川里之外宅 外祖考 携往而 +永川李氏 察訪文樑之女 聾巖先生賢輔之孫女也 先生 以明宗十九年(一五六四)甲子  
-九堂 謁見于退溪先生 先生 一見而奇愛之遂執贄而受讀經史兼治功令業 然 +生於基邑郁錦里 而先考公棄世之時 膝下无育 故 遽取季公秀良之長子諱之瑍  
-時不辰 因壬亂之起 棄而不治 以門蔭階通德後移居于醴泉邑鳳洞 爲鳳洞系入鄉 +爲後嗣矣 厥後九月 以遺腹子 先生 生焉 初名天守 外祖考察訪公所作取賴天有守之意也云  
-之祖焉 而同宗海月公汝一 先生中立兩公先後相繼而來臨玆郡以故先生盡心 +己巳(一五六九) 以六歲之童 往訪于陶山汾川里之外宅 外祖考 携往而之九堂  
-協贊 有功於其治政焉 先生常以讀書窮理 爲爲學之本 以不欺獨作制行之則  +謁見于退溪先生 先生 一見而奇愛之 遂執贄而受讀經史 兼治功令業 然時不辰  
-遵庭訓 於是乎爲一之師表焉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二十七日 卒 +因壬亂之起 棄而不治 以門蔭階通德 後移居于醴泉邑鳳洞 爲鳳洞系入之祖焉  
-年六十四 葬于醴泉邑淸福二里山六○之一番地屹味巽坐之原配恭人安東權氏諱 +而同宗海月公汝一 先生中立兩公 先後相繼而來臨玆郡 以故 先生盡心協贊  
- +有功於其治政焉 先生常以讀書窮理 爲爲學之本 以不欺獨 作制行之則  
-斗文之女也生年未詳卒於仁祖十年(一六三二)三月七日 先生墓同原 三男  +遵庭訓 於是乎爲一之師表焉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 二十七日 卒  
-崇 宣務郞大丘判官壽職同知次岌次通訓大夫同知娶安東權氏 貞夫人生泰亨岌 +年 六十四 葬于醴泉邑淸福二里山六○之一番地屹味巽坐之原配恭人安東權氏 
-娶仁同張氏生澤亨通訓娶坡平氏 生觀亨曾玄以下不記而其二千餘子孫 布在于禮 +諱斗文之女也 生年未詳 卒於仁祖十年(一六三二)三月七日 先生墓同原 三男  
-泉及各處焉 此豈非先生不食之報 有顯於後歟 墓舊無顯刻故諸孫 以是爲懼者久矣 +崇 宣務郞大丘判官壽職同知 次岌 次通訓大夫 同知娶安東權氏  
-頃者一宗合謀鳩財以飾墓諸宗命不肖以記陰之文 義不敢辭 謹按譜牒 以所傳文字 +貞夫人生泰亨岌娶仁同張氏 生澤亨通訓娶坡平氏 生觀亨曾玄以下不記 
-略述如右云耳 +而其二千餘子孫 布在于禮泉及各處焉 此豈非先生不食之報 有顯於後歟  
-一八七九년 월 일 +墓舊無顯刻故諸孫 以是爲懼者久矣 
-後孫厚杓謹撰 +頃者一宗合謀鳩財以飾墓諸宗命不肖以記陰之文 義不敢辭 謹按譜牒  
-後孫仲成謹書 +以所傳文字略述如右云耳\\ 
-평해황공(平海黃公)휘지장(諱之璋)묘비문(墓碑文) +\_\_一八七九年 月 日\\ 
-先生의 諱는 之璋이시니 初名은 天守요 號는 鳳卵이시다.우리 黃氏는 平海로 貫을 +\_\_後孫厚杓謹撰\\ 
-삼으니 始祖는 儒臣諱洛이요 여러 代를 傳하여 諱溫仁은 金吾將軍이시니 公에게 十三代祖가 +\_\_後孫仲成謹書 
-되시고 三代를 傳하여 諱璡은 檢校軍器監이요 三代를 傳하여 諱瑾은 藝文館直提學이요 이분이 +</typo> 
-諱有定을 낳으시니 工曹判書요 이분이 諱을 낳으시니 順興訓導요 榮州에서 처음으로 +</hidden> 
-豊基에 居住하시니 곧 先生의 五代祖이시다.高祖는 諱末孫이시니 司醞署主簿요 曾祖는 +\\ 
- +<typo fs:0.8em> 
-諱孝仝이시니 順陵奉이요 祖는 諱이시니 義陵奉이요 考는 諱俊良이요 號는 錦溪이시니 +\_평해황공 휘 지장 묘비문\\ 
-退溪先生의 門下에서 受業하시어 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官職은 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_선생(先生)의 휘()는 지장(之璋)이시니 초명(初名)은 천수(天守)요 호()는 봉란(鳳卵)이시다. 우리 황씨(黃氏)는 평해(平海)로 관향(鄕)을 
-早卒하시니 퇴계先生께서 甚히 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棺上에 쓰시기를 嗚呼亡友錦溪黃先生 +삼으니 시조(始祖)는 유신(儒臣) 휘() 낙()이요 여러 대()를 전()하여 휘() 온인(溫仁)은 금오장군(金吾將軍)이시니 공()에게 13대조(十三代祖)가 
-이라하시고 이어서 墓碣의 前面을 쓰시고 遺稿를 刊行하시고 行狀을 撰하시었으며 後日에 嘉 +되시고 3대(三代)를 전()하여 휘() 진()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요 3대(三代)를 전()하여 휘() 근()은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이요 이분이 
-善大夫 吏曹判에 追贈되시었다.어머니는 贈貞夫人 永川李氏이시니 祭訪文樑의 女요 +휘() 유정(有定)을 낳으시니 공조판서(工曹判書)요 이분이 휘() 연(鋋)을 낳으시니 순흥(順興) 훈도(訓導)요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聾巖先生 諱賢輔의 孫女이시다.先生은 明宗十九年(一五六四)甲子로 豊基邑 郁錦里에서 +풍기(豊基)에 거주(居住)하시니 곧 선생(先生)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휘() 말손(末孫)이시니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증조(曾祖)는 
-살으시었다. 그런데 先考公께서 棄世하실 때에는 膝下에 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季氏 秀良의 +휘() 효동(孝仝)이시니 순릉(順陵) 참봉(叅)이요 조()는 휘() 치(觶)이시니 의릉(義陵) 참봉(叅)이요 고()는 휘() 준량(俊良)이요 호()는 금계(錦溪)이시니 
-長子 之瑍을 取하여 後嗣로 삼았었다.그런데 그후 九個月만에 遺腹子로 先生이 出生하시었다.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시어 학행(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관직(官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初名을 天守라 한 것은 外祖父 察訪公께서 지으신 것이니 하늘에 힘입어 지킴이 있게 +조졸(早卒)하시니 퇴계 선생(先生)께서 심()히 애석(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관() 상()에 쓰시기를 '오호망우금계황선생(嗚呼亡友錦溪黃先生)' 
-되었다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己巳年(一五六九)에 六歲의 兒童으로 陶山汾川里의 外家宅을 +이라 하시고 이어서 묘갈(墓碣)의 전면(前面)을 쓰시고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시고 행장(行狀)을 찬()하시었으며 후일(後日)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에 추증(追贈)되시었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시니 찰방(祭訪) 문량(文樑)의 여()요 
-찾아갔었는데 外祖父께서 데리고 矜九堂에 가서 退溪先生을 謁見케 하신대 先生이 한번 +농암(聾巖) 선생(先生) 휘() 현보(賢輔)의 손녀(孫女)이시다. 선생(先生)은 명종(明宗) 19년(十九年)(1564(一五六四)) 갑자(甲子)로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서 
-보시고 奇異하게 여겨 사랑하시었므로 드디어 禮物을 올리어 經傳과 史書를 배우고 兼하여 +살으시었다. 그런데 선고(先考) 공()께서 기세(棄世)하실 때에는 슬하(膝下)에 무육(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계씨(季氏) 수량(秀良)의 
-工夫를 다스리시었다.그러나 時代를 잘못 만난지라 壬辰倭亂으로 인하여 棄하고 +장자(長子) 지환(之瑍)을 취()하여 후사(後嗣)로 삼았었다. 그런데 그후 9개월(九個月)만에 유복자(遺腹子)로 선생(先生)이 출생(出生)하시었다.\\ 
-다스리지 않았고 門蔭으로 通德郞의 位階에 오르시었으며 그후에 醴泉邑 洞으로 移居하시어 +\_초명(初名)을 천수(天守)라 한 것은 외조부(外祖父) 찰방(察訪) 공()께서 지으신 것이니 하늘에 힘입어 지킴이 있게 
-鳳洞系의 入祖가 되시었다.얼마 후에 同宗인 海月公汝一先生과 中立公 두 분이 先後하여 +되었다는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기사년(己巳年)(1569(一五六九))에 6세(六歲)의 아동(兒童)으로 도산(陶山) 분천리(汾川里)의 외가댁(外家宅)을 
-잇달아 이 고을의 守令으로 來臨하게 되었다.그러므로 先生께서 盡心協贊하여 그의 治政에 +찾아갔었는데 외조부(外祖父)께서 데리고 긍구당(矜九堂)에 가서 퇴계(退溪) 선생(先生)을 알현(謁見)케 하신대 선생(先生)이 한번 
-功이 있으시었다. +보시고 기이(奇異)하게 여겨 사랑하시었므로 드디어 예물(禮物)을 올리어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배우고 겸()하여 
-先生께서는 恒常 讀書와 窮理로 學問하는 根本으로 삼으시고 不欺와 獨으로 行實을 +과거공부(工夫)를 다스리시었다. 그러나 시대(時代)를 잘못 만난지라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포기(<fc #ff0000>𢱍</fc>)하고 
- +다스리지 않았고 문음(門蔭)으로 통덕랑(通德郞)의 위계(位階)에 오르시었으며 그 후에 예천읍(醴泉邑) 봉동(鳳)으로 이거(移居)하시어 
-制御하는 準則으로 삼으시어 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一의 師表가 되시었다. +봉동계(鳳洞系)의 입향조()가 되시었다. 얼마 후에 동종(同宗)인 해월공(海月公) 여일(汝一) 선생(先生)과 중립공(中立公두 분이 선후(先後)하여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二十七日에 別世하시니 享年 六十四이셨고 醴泉邑 淸福 +잇달아 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내림(來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先生)께서 진심협찬(盡心協贊)하여 그의 치정(治政)에 
-二里 山六〇의 一番地 屹味 巽坐原에 葬禮를 모시었다配는 恭人 安東權氏이시니 諱斗 +공()이 있으시었다.\\ 
-文의 女이시다. +\_선생(先生)께서는 항상(恒常)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로 학문(學問)하는 근본(根本)으로 삼으시고 불기(不欺)와 신독(愼)으로 행실(行實)을 
-生年은 未詳이요 仁祖十年(一六三二三月七日에 別世하여 先生의 墓 同原에 葬하였다. +제어(制御)하는 준칙(準則)으로 삼으시어 정훈(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일행(鄕)의 사표(師表)가 되시었다.\\ 
-모두 三男을 두시니 長男은 崇이니 宣務郞으로 大丘判官에 壽職同知中樞요 다음은 岌이요 +\_인조(仁祖) 5년(五年) 1627(一六二七) 정묘(丁卯) 12월(十二月) 27일(二十七日)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4(六十四)이셨고 예천읍(醴泉邑) 청복2리(淸福二里) 산60(山六〇)의 1()번지(番地) 며흘미(旀屹味) 손좌원(巽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었다. 배()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시니 휘() 두문(斗文)의 여()이시다. 
-다음은 嶪이니 通訓大夫이다同知는 安東權氏를 娶妻하였으니 貞夫人이었고 泰亨을 낳았으며,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요 인조(仁祖) 10년(十年) 1632(一六三二) 3월(三月) 7일(七日)에 별세(別世)하여 선생(先生)의 묘() 동원(同原)에 부장(祔)하였다.\\ 
-岌은 仁同張氏 娶妻하여 澤亨을 낳았고 通訓은 坡平尹氏를 娶妻하여 觀亨을 낳았다. +\_모두 3남(三男)을 두시니 장남(長男)은 숭()이니 선무랑(宣務郞)으로 대구판관(大丘判官)에 수직(壽職) 동지중추(同知中樞)요 다음은 급()이요 
-曾玄以下는 記載하지 않는다. 그런데 二千餘 子孫들이 醴泉 및 各處에 分布되어 居住하고 +다음은 업()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이다. 동지(同知)는 안동권씨(安東權氏)를 취처(娶妻)하였으니 정부인(貞夫人)이었고 태형(泰亨)을 낳았으며, 
-있으니 이것은 어찌 先生께서 누리지 못한 報答이 後世에 나타남이 이니겠는가! 墓所에 +급()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취처(娶妻)하여 택형(澤亨)을 낳았고 통훈(通訓)은 파평윤씨(坡平尹氏)를 취처(娶妻)하여 관형(觀亨)을 낳았다.\\ 
-옛날에는 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온 +\_증() 현() 이하(以下)는 기재(記載)하지 않는다. 그런데 2천여(二千餘) 자손(子孫)들이 예천(醴泉및 각처(各處)에 분포(分布)되어 거주(居住)하고 
-宗親들이 計謨를 合하고 財物을 모아 墓所를 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諸宗들이 不肖에게 +있으니 이것은 어찌 선생(先生)께서 누리지 못한 보답(報答)이 후세(後世)에 나타남이 이니겠는가! 묘소(墓所)에 
-碑陰에 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義理上 敢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譜牒을 詳 +옛날에는 현각(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자손(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온 
-考하고 傳해오는 文字를 酌하여 簡略하게 述하기를 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 +종친(宗親)들이 계모(計謨)를 합()하고 재물(財物)을 모아 묘소(墓所)를 수식(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 제종(諸宗)들이 불초(不肖)에게 
-一八七九년 五월 일 +비음(碑陰)에 기록(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의리상(義理上) 감()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고 전()해오는 문자(文字)를 참작(叅)하여 간략(簡略)하게 서술(敍)하기를 우()와 같이 하는 바이다.\\ 
-후손 후표(厚杓) 짖고 +\_\_1879(一八七九)년 5()월 일\\ 
-후손 중성(仲成) 쓰다+\_\_후손 후표(厚杓) 짖고\\ 
 +\_\_후손 중성(仲成) 쓰다 
 +</typo> 
 +</WRAP>
a-111.1747800125.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1 13:0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