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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1 [2025/05/23 12:22] ssio2a-111 [2025/05/30 11:29]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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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諱溫仁金吾將軍 於公爲十三代祖也 四傳 諱璡檢校軍器監 三傳 諱瑾藝文館直提學  諱溫仁金吾將軍 於公爲十三代祖也 四傳 諱璡檢校軍器監 三傳 諱瑾藝文館直提學 
 寔生諱有定工曹判書 寔生諱鋋順興訓導 自榮州 始居豊基 即先生之五代祖也 高祖  寔生諱有定工曹判書 寔生諱鋋順興訓導 自榮州 始居豊基 即先生之五代祖也 高祖 
-諱末孫 司醞署主簿 曾祖 諱孝仝順陵奉 祖諱 鱓義陵奉 考 諱俊良號錦溪 +諱末孫 司醞署主簿 曾祖 諱孝仝順陵奉 祖諱 鱓義陵奉 考 諱俊良號錦溪 
 受業于退溪先生之門 以學行著官止星州牧使而早卒 退溪先生 甚爲哀惜之手書棺上曰  受業于退溪先生之門 以學行著官止星州牧使而早卒 退溪先生 甚爲哀惜之手書棺上曰 
-嗚呼亡友錦溪黃先生 繼而書碣面 刊遺稿撰行狀後贈以嘉善 階吏曹判 妣 贈貞夫人 +嗚呼亡友錦溪黃先生 繼而書碣面 刊遺稿撰行狀後贈以嘉善 階吏曹判 妣 贈貞夫人 
 永川李氏 察訪文樑之女 聾巖先生賢輔之孫女也 先生 以明宗十九年(一五六四)甲子  永川李氏 察訪文樑之女 聾巖先生賢輔之孫女也 先生 以明宗十九年(一五六四)甲子 
 生於豊基邑郁錦里 而先考公棄世之時 膝下无育 故 遽取季公秀良之長子諱之瑍  生於豊基邑郁錦里 而先考公棄世之時 膝下无育 故 遽取季公秀良之長子諱之瑍 
 爲後嗣矣 厥後九月 以遺腹子 先生 生焉 初名天守 外祖考察訪公所作取賴天有守之意也云  爲後嗣矣 厥後九月 以遺腹子 先生 生焉 初名天守 外祖考察訪公所作取賴天有守之意也云 
 己巳(一五六九) 以六歲之童 往訪于陶山汾川里之外宅 外祖考 携往而之矜九堂  己巳(一五六九) 以六歲之童 往訪于陶山汾川里之外宅 外祖考 携往而之矜九堂 
-謁見于退溪先生 先生 一見而奇愛之 遂執贄而受讀經史 兼治功令業 然時不辰 +謁見于退溪先生 先生 一見而奇愛之 遂執贄而受讀經史 兼治功令業 然時不辰 
 因壬亂之起 棄而不治 以門蔭階通德 後移居于醴泉邑鳳洞 爲鳳洞系入鄕之祖焉  因壬亂之起 棄而不治 以門蔭階通德 後移居于醴泉邑鳳洞 爲鳳洞系入鄕之祖焉 
 旣而同宗海月公汝一 先生曁中立兩公 先後相繼而來臨玆郡 以故 先生盡心協贊  旣而同宗海月公汝一 先生曁中立兩公 先後相繼而來臨玆郡 以故 先生盡心協贊 
-有功於其治政焉 先生常以讀書窮理 爲爲學之本 以不欺獨 作制行之則 +有功於其治政焉 先生常以讀書窮理 爲爲學之本 以不欺獨 作制行之則 
 務遵庭訓 於是乎爲一鄕之師表焉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 二十七日 卒  務遵庭訓 於是乎爲一鄕之師表焉 仁祖五年(一六二七)丁卯 十二月 二十七日 卒 
 享年 六十四 葬于醴泉邑淸福二里山六○之一番地旀屹味巽坐之原配恭人安東權氏 享年 六十四 葬于醴泉邑淸福二里山六○之一番地旀屹味巽坐之原配恭人安東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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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舊無顯刻故諸孫 以是爲懼者久矣 墓舊無顯刻故諸孫 以是爲懼者久矣
 頃者一宗合謀鳩財以飾墓諸宗命不肖以記陰之文 義不敢辭 謹按譜牒  頃者一宗合謀鳩財以飾墓諸宗命不肖以記陰之文 義不敢辭 謹按譜牒 
-以所傳文字略述如右云耳\\+以所傳文字略述如右云耳\\
 \_\_一八七九年 五月 日\\ \_\_一八七九年 五月 日\\
 \_\_後孫厚杓謹撰\\ \_\_後孫厚杓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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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시니 공조판서(工曹判書)요 이분이 휘(諱) 연(鋋)을 낳으시니 순흥(順興) 훈도(訓導)요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시니 공조판서(工曹判書)요 이분이 휘(諱) 연(鋋)을 낳으시니 순흥(順興) 훈도(訓導)요 영주(榮州)에서 처음으로
 풍기(豊基)에 거주(居住)하시니 곧 선생(先生)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휘(諱) 말손(末孫)이시니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증조(曾祖)는 풍기(豊基)에 거주(居住)하시니 곧 선생(先生)의 5대조(五代祖)이시다. 고조(高祖)는 휘(諱) 말손(末孫)이시니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증조(曾祖)는
-휘(諱) 효동(孝仝)이시니 순릉(順陵) 참봉(奉)이요 조(祖)는 휘(諱) 치(觶)이시니 의릉(義陵) 참봉(奉)이요 고(考)는 휘(諱) 준량(俊良)이요 호(號)는 금계(錦溪)이시니+휘(諱) 효동(孝仝)이시니 순릉(順陵) 참봉(奉)이요 조(祖)는 휘(諱) 치(觶)이시니 의릉(義陵) 참봉(奉)이요 고(考)는 휘(諱) 준량(俊良)이요 호(號)는 금계(錦溪)이시니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시어 학행(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관직(官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시어 학행(學行)으로 나타나시었고 관직(官職)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그치셨으며
 조졸(早卒)하시니 퇴계 선생(先生)께서 심(甚)히 애석(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관(棺) 상(上)에 쓰시기를 '오호망우금계황선생(嗚呼亡友錦溪黃先生)' 조졸(早卒)하시니 퇴계 선생(先生)께서 심(甚)히 애석(哀惜)히 여기시어 손수 관(棺) 상(上)에 쓰시기를 '오호망우금계황선생(嗚呼亡友錦溪黃先生)'
-이라 하시고 이어서 묘갈(墓碣)의 전면(前面)을 쓰시고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시고 행장(行狀)을 찬(撰)하시었으며 후일(後日)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判)에 추증(追贈)되시었다.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시니 찰방(祭訪) 문량(文樑)의 여(女)요+이라 하시고 이어서 묘갈(墓碣)의 전면(前面)을 쓰시고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시고 행장(行狀)을 찬(撰)하시었으며 후일(後日)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判)에 추증(追贈)되시었다.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천이씨(永川李氏)이시니 찰방(祭訪) 문량(文樑)의 여(女)요
 농암(聾巖) 선생(先生) 휘(諱) 현보(賢輔)의 손녀(孫女)이시다. 선생(先生)은 명종(明宗) 19년(十九年)(1564(一五六四)) 갑자(甲子)로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서 농암(聾巖) 선생(先生) 휘(諱) 현보(賢輔)의 손녀(孫女)이시다. 선생(先生)은 명종(明宗) 19년(十九年)(1564(一五六四)) 갑자(甲子)로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서
 살으시었다. 그런데 선고(先考) 공(公)께서 기세(棄世)하실 때에는 슬하(膝下)에 무육(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계씨(季氏) 수량(秀良)의 살으시었다. 그런데 선고(先考) 공(公)께서 기세(棄世)하실 때에는 슬하(膝下)에 무육(无育)이셨으므로 서둘러 계씨(季氏) 수량(秀良)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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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갔었는데 외조부(外祖父)께서 데리고 긍구당(矜九堂)에 가서 퇴계(退溪) 선생(先生)을 알현(謁見)케 하신대 선생(先生)이 한번 찾아갔었는데 외조부(外祖父)께서 데리고 긍구당(矜九堂)에 가서 퇴계(退溪) 선생(先生)을 알현(謁見)케 하신대 선생(先生)이 한번
 보시고 기이(奇異)하게 여겨 사랑하시었므로 드디어 예물(禮物)을 올리어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배우고 겸(兼)하여 보시고 기이(奇異)하게 여겨 사랑하시었므로 드디어 예물(禮物)을 올리어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배우고 겸(兼)하여
-과거공부(科擧工夫)를 다스리시었다. 그러나 시대(時代)를 잘못 만난지라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포기(棄)하고 +과거공부(科擧工夫)를 다스리시었다. 그러나 시대(時代)를 잘못 만난지라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포기(<fc #ff0000>𢱍</fc>)하고 
-다스리지 않았고 문음(門蔭)으로 통덕랑(通德郞)의 위계(位階)에 오르시었으며 그 후에 예천읍(醴泉邑) <fc #ff0000>동(洞)</fc>으로 이거(移居)하시어+다스리지 않았고 문음(門蔭)으로 통덕랑(通德郞)의 위계(位階)에 오르시었으며 그 후에 예천읍(醴泉邑) 동(洞)으로 이거(移居)하시어
 봉동계(鳳洞系)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시었다. 얼마 후에 동종(同宗)인 해월공(海月公) 여일(汝一) 선생(先生)과 중립공(中立公) 두 분이 선후(先後)하여 봉동계(鳳洞系)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시었다. 얼마 후에 동종(同宗)인 해월공(海月公) 여일(汝一) 선생(先生)과 중립공(中立公) 두 분이 선후(先後)하여
 잇달아 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내림(來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先生)께서 진심협찬(盡心協贊)하여 그의 치정(治政)에 잇달아 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내림(來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先生)께서 진심협찬(盡心協贊)하여 그의 치정(治政)에
 공(功)이 있으시었다.\\ 공(功)이 있으시었다.\\
-\_선생(先生)께서는 항상(恒常)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로 학문(學問)하는 근본(根本)으로 삼으시고 불기(不欺)와 신독(獨)으로 행실(行實)을+\_선생(先生)께서는 항상(恒常) 독서(讀書)와 궁리(窮理)로 학문(學問)하는 근본(根本)으로 삼으시고 불기(不欺)와 신독(獨)으로 행실(行實)을
 제어(制御)하는 준칙(準則)으로 삼으시어 정훈(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일행(一鄕)의 사표(師表)가 되시었다.\\ 제어(制御)하는 준칙(準則)으로 삼으시어 정훈(庭訓)을 따르기에 힘쓰셨으니 이에 일행(一鄕)의 사표(師表)가 되시었다.\\
-\_인조(仁祖) 5년(五年) 1627(一六二七) 정묘(丁卯) 12월(十二月) 27일(二十七日)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4(六十四)이셨고 예천읍(醴泉邑) 청복2리(淸福二里) 산60(山六〇)의 1(一)번지(番地) 며흘미(旀屹味) 손좌원(巽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었다.배()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시니 휘(諱) 두문(斗文)의 여(女)이시다.+\_인조(仁祖) 5년(五年) 1627(一六二七) 정묘(丁卯) 12월(十二月) 27일(二十七日)에 별세(別世)하시니 향년(享年) 64(六十四)이셨고 예천읍(醴泉邑) 청복2리(淸福二里) 산60(山六〇)의 1(一)번지(番地) 며흘미(旀屹味) 손좌원(巽坐原)에 장례(葬禮)를 모시었다. 배()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시니 휘(諱) 두문(斗文)의 여(女)이시다.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요 인조(仁祖) 10년(十年) 1632(一六三二) 3월(三月) 7일(七日)에 별세(別世)하여 선생(先生)의 묘(墓) 동원(同原)에 부장(祔葬)하였다.\\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요 인조(仁祖) 10년(十年) 1632(一六三二) 3월(三月) 7일(七日)에 별세(別世)하여 선생(先生)의 묘(墓) 동원(同原)에 부장(祔葬)하였다.\\
 \_모두 3남(三男)을 두시니 장남(長男)은 숭(崇)이니 선무랑(宣務郞)으로 대구판관(大丘判官)에 수직(壽職) 동지중추(同知中樞)요 다음은 급(岌)이요 \_모두 3남(三男)을 두시니 장남(長男)은 숭(崇)이니 선무랑(宣務郞)으로 대구판관(大丘判官)에 수직(壽職) 동지중추(同知中樞)요 다음은 급(岌)이요
 다음은 업(嶪)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이다. 동지(同知)는 안동권씨(安東權氏)를 취처(娶妻)하였으니 정부인(貞夫人)이었고 태형(泰亨)을 낳았으며, 다음은 업(嶪)이니 통훈대부(通訓大夫)이다. 동지(同知)는 안동권씨(安東權氏)를 취처(娶妻)하였으니 정부인(貞夫人)이었고 태형(泰亨)을 낳았으며,
 급(岌)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취처(娶妻)하여 택형(澤亨)을 낳았고 통훈(通訓)은 파평윤씨(坡平尹氏)를 취처(娶妻)하여 관형(觀亨)을 낳았다.\\ 급(岌)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취처(娶妻)하여 택형(澤亨)을 낳았고 통훈(通訓)은 파평윤씨(坡平尹氏)를 취처(娶妻)하여 관형(觀亨)을 낳았다.\\
-\_증(曾)현(玄) 이하(以下)는 기재(記載)하지 않는다. 그런데 2천여(二千餘) 자손(子孫)들이 예천(醴泉) 및 각처(各處)에 분포(分布)되어 거주(居住)하고+\_증(曾) 현(玄) 이하(以下)는 기재(記載)하지 않는다. 그런데 2천여(二千餘) 자손(子孫)들이 예천(醴泉) 및 각처(各處)에 분포(分布)되어 거주(居住)하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 선생(先生)께서 누리지 못한 보답(報答)이 후세(後世)에 나타남이 이니겠는가! 묘소(墓所)에 있으니 이것은 어찌 선생(先生)께서 누리지 못한 보답(報答)이 후세(後世)에 나타남이 이니겠는가! 묘소(墓所)에
 옛날에는 현각(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자손(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온 옛날에는 현각(顯刻)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러 자손(子孫)들이 이를 걱정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온
 종친(宗親)들이 계모(計謨)를 합(合)하고 재물(財物)을 모아 묘소(墓所)를 수식(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 제종(諸宗)들이 불초(不肖)에게 종친(宗親)들이 계모(計謨)를 합(合)하고 재물(財物)을 모아 묘소(墓所)를 수식(修飾)하여 드리기로 하였다. 제종(諸宗)들이 불초(不肖)에게
-비음(碑陰)에 기록(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의리상(義理上) 감(敢)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고 전(傳)해오는 문자(文字)를 참작(酌)하여 간략(簡略)하게 서술(述)하기를 우(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비음(碑陰)에 기록(記錄)할 글월을 지어라 하시기로 의리상(義理上) 감(敢)히 사양할 수 없으므로 삼가 보첩(譜牒)을 상고(詳考)하고 전(傳)해오는 문자(文字)를 참작(酌)하여 간략(簡略)하게 서술(述)하기를 우(右)와 같이 하는 바이다.\\
 \_\_1879(一八七九)년 5(五)월 일\\ \_\_1879(一八七九)년 5(五)월 일\\
 \_\_후손 후표(厚杓) 짖고\\ \_\_후손 후표(厚杓) 짖고\\
a-111.174797055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3 12:2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