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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21 [2025/05/22 18:34] – ssio2 | a-121 [2025/05/26 10:27]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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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郁陽壇所移建記 | + | ===욱양단소이건기(郁陽壇所移建記)=== |
- | 今郁陽壇所는 옛 郁陽書院으로 처음에는 豊基邑郁錦里에 있었는데 이는 顯宗三年 西紀 | + | <WRAP 35em justify> |
- | 一六六三年 壬寅에 創建하여 退溪李滉先生을 奉安祭享하여 왔는데 肅宗十六年 西紀一六九○年 | + | <typo ff:' |
- | 庚午에 退溪門中에서도 그 高邁한 學德으로 師君의 配享을 해옴을 嘉尚하게 여겨 우리 錦 | + | \_**욱양단소 이건기(郁陽壇所移建記)**\\ |
- | 溪先祖도 함께 配享하여 人材를 養成해오던 殿堂이 되었다. | + | \_금(今) 욱양단소(郁陽壇所)는 옛 욱양서원(郁陽書院)으로 처음에는 |
- | 그 後 大院君 執政무렵인 高宗五年 西紀一八六八年 戊辰에 國令으로 撤廢되어 郁陽壇所로 | + | 풍기읍(豊基邑) 욱금리(郁錦里)에 있었는데 이는 |
- | 名稱을 바꾸어 다시 從前대로 祭享을 받들어 왔는데 또 火災로 廟宇가 燒失되고 講堂과 | + | 1663년(一六六三年) 임인(壬寅)에 창건(創建)하여 |
- | 齋室만 남아 十數年間享祀를 치르지 못한바 모든 百姓의 師表가 되는 이 두분 先生의 享 | + | 경오(庚午)에 퇴계(退溪) 문중(門中)에서도 그 고매(高邁)한 학덕(學德)으로 |
- | 禮는 廢享할 수 없다는 士林들의 建議로 講堂 윗편에 祭壇을 設立하고 享祀를 다시 치러 | + | |
- | 왔으나 西紀一九五○年 庚寅에 六二五動亂으로 戰略上 郁錦마을이 疏開되어 그 이듬해 千 | + | |
- | 辛萬若끝에 復舊는 되었으나 西紀一九八三年癸亥에 또다시 貯水池築造로 郁錦마을이 受難을 | + | |
- | 當해 우리 黃氏門中의 三百餘年의 世居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不得已 壇所를 移建하게 되었다. | + | |
- | 이 事案으로 여러차례의 門會와 儒林會議를 거쳐 西紀一九九○年 庚午五月十五日宗中 | + | |
- | 및 儒林連席會議를 하여 錦陽精舍境内로 移建하기로 決議하여 推進은 하였으나 먼저 앞서는 | + | |
- | 問題가 財力關係로서 白洞의 黃潤圭氏께서 于先 政府의 補助金을 要求하자는 案을 提議하자 | + | |
- | 黃弼相、徐庭學氏가 贊同하여 이에 活躍中 그때 마침 宗人 黃海潤이 榮豐副郡守로 在任中 | + | |
- | 에 있어 같이 合勢하여 巨金 二千萬원을 받았으며 이어 門會를 열어 柄旭、元燮、永鳳、天燮 | + | |
- | 等이 積極努力하여 뜻 있는 많은 분들의 厚意의 誠金이 一億二千萬원이 마련 되므로 | + | \_그 후(後) 대원군(大院君) 집정(執政) 무렵인 고종(高宗) 5년(五年) |
- | 러 精舍옆에 壇所起工 役事를 | + | 명칭(名稱)을 바꾸어 다시 종전(從前)대로 제향(祭享)을 받들어 왔는데 또 화재(火災)로 묘우(廟宇)가 소실(燒失)되고 강당(講堂)과 |
- | 祭壇碑를 세우고 | + | 재실(齋室)만 남아 십수년간(十數年間) 향사(享祀)를 치르지 못한 바 모든 |
- | 이 뜻깊은 事業에 物心兩面으로 協助해 주시고 | + | 왔으나 서기(西紀) 1950년(一九五○年) 경인(庚寅)에 625동란(六二五動亂)으로 전략상(戰略上) 욱금(郁錦)마을이 소개(疏開)되어 그 이듬해 천신만고(千辛萬若) 끝에 복구(復舊)는 되었으나 서기(西紀) 1983년(一九八三年) |
- | 衷心으로 感謝와 敬意를 | + | 당(當)해 우리 황씨문중(黃氏門中)의 3백여년(三百餘年)의 세거(世居) 터전이 물 속에 잠기게 되어 |
- | 그리하여 그해 九月에 設壇 告由를 擧行함에 있어 道内 三百餘儒林이 叅席하여 盛況裡에 | + | |
- | 마치었다.이 壇所의 位置를 살펴보면 學識과 德望이 높으신 錦溪先祖의 修道地로서 이 由 | + | |
- | 緒길은 錦陽精舍의 옆으로서 뒤로는 籠岩山자락이 아담하게 휘돌아 감아 陽明하기를 이를데 | + | |
- | 없으며 앞은 | + | |
- | 즐비하여 四時에 玉이 굴러가는 듯한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絶景 錦仙亭을 굽어보는 | + | |
- | 참으로 아름다운 名勝中의 名勝地이다. | + | |
- | 이러한 이 錦陽精舍는 錦溪先祖께서 隱退後 平素 所藏하고 | + | |
- | 講道하는 곳으로 마련된 곳이다. | + | |
- | 그럼에도 不拘하고 草創期 한때 精舍의 守護가 어려움에 處한 것을 退溪先生께서 알고 | + | |
- | 이고을 守숙에게 | + | |
- | 이 말씀을 잘 履行했다. | + | |
- | 이것을 보더라도 錦溪先生께서는 在任當時 오로지 百姓을 爲한 政治를 했을 뿐 私利私 | + | |
- | 慾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잘 알게되도다. | + | |
- | 그리고 宣祖二八年西紀一五九五年 壬辰에 柳雲龍郡守가 赴任하여 錦陽精舍를 돌아보고 | + | \_이 사안(事案)으로 여러 차례의 문회(門會)와 유림회의(儒林會議)를 거쳐 서기(西紀) 1990년(一九九○年) 경오(庚午) |
- | 이 精舍가 부실함이 있게되면 이는 官民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라 | + | 및 유림(儒林) 연석회의(連席會議)를 |
- | 새겨 붙인바도 있으며 또 仁祖朝西紀一六三六年丙子난리로 燒失되었고 肅宗二七年 西紀一 | + | 문제(問題)가 재력(財力) 관계(關係)로서 백동(白洞)의 황윤규(黃潤圭)씨(氏)께서 우선(于先) 정부(政府)의 보조금(補助金)을 요구(要求)하자는 안(案)을 제의(提議)하자 |
- | 七○一年辛巳에 洪景濂郡守에게 錦溪先祖의 六代嗣孫인 坪이 精舍復元을 懇切하게 願함을 | + | 황필상(黃弼相), |
- | 嘉尚하게 생각하여 | + | 제단비(祭壇碑)를 세우고 정문(正門)과 원장(垣墻)을 쌓아 만(滿) 2년(二年)만인 서기(西紀) |
- | 이렇듯 錦陽精舍야 말로 代代로 迂餘曲折의 連續이었다. | + | |
- | 이렇듯 脈을 이어온 精舍가 | + | |
- | 빛을 더하고 烟霞도 五色의 빛을 더하는 듯 하며 燕雀도 賀禮하도다 | + | |
- | 우리 黃氏는 勿論 全國儒林들까지도 崇拜하리라 믿어 | + | |
- | 이러한 錦陽精舍의 來歷을 今般 發刊되는 譜牒의 序頭 한 篇에 登載하여 | + | |
- | 한 「얼」을 이어받아 앞으로 | + | |
- | 願하는 바 크므로 頭序없이 右와 같이 記述하는 바이다. | + | |
- | 檀君紀元四千三百三十三年(西紀二千年)庚辰年 月 | + | |
- | 後裔孫永宗謹敍 | + | |
+ | \_이 뜻깊은 사업(事業)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조(協助)해 주시고 한결같은 성원(聲援)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 ||
+ | 충심(衷心)으로 감사(感謝)와 경의(敬意)를 표(表)해 마지 않는 바이다.\\ | ||
+ | |||
+ | \_그리하여 그해 9월(九月)에 설단(設壇) 고일(告由)를 거행(擧行)함에 있어 도내(道內) 3백여(三百餘) 유림(儒林)이 참석(叅席)하여 성황리(盛況裡)에 | ||
+ | 마치었다. 이 단소(壇所)의 위치(位置)를 살펴보면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이 높으신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수도지(修道地)로서 이 유서(由緖) 깊은 금양정사(錦陽精舍)의 옆으로서 뒤로는 농암산(籠岩山)자락이 아담하게 휘돌아 감아 양명(陽明)하기를 이를데 | ||
+ | 없으며 앞은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빛나는 업적(業蹟)을 말해주듯 수백년(數百年) 묵은 송림(松林)이 울창(鬱蒼)하고 기암괴석(奇岩怪石)이 | ||
+ | 즐비하여 사시(四時)에 옥(玉)이 굴러가는 듯한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는 절경(絶景) 금선정(錦仙亭)을 굽어보는 | ||
+ | 참으로 아름다운 명승(名勝) 중(中)의 명승지(名勝地)이다.\\ | ||
+ | |||
+ | \_이러한 이 금양정사(錦陽精舍)는 금계(錦溪) 선조(先祖)께서 은퇴(隱退) 후(後) 평소(平素) 소장(所藏)하고 계시던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고 후생(後生)을 | ||
+ |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마련된 곳이다.\\ | ||
+ | |||
+ | \_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초창기(草創期) 한때 정사(精舍)의 수호(守護)가 어려움에 처(處)한 것을 퇴계(退溪) 선생(先生)께서 알고 | ||
+ | 이 고을 수령(守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일절(一切) 잡역(雜役)을 면제(免除)하도록 당부하여 그 당시(當時) 조완벽(趙完璧) 군수(郡守)가 | ||
+ | 이 말씀을 잘 이행(履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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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이것을 보더라도 금계(錦溪) 선생(先生)께서는 재임(在任) 당시(當時) 오로지 백성(百姓)을 위(爲)한 정치(政治)를 했을 뿐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치우치지 않았음을 잘 알게 되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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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그리고 선조(宣祖) 28년(二八年) 서기(西紀) 1595년(一五九五年) 임진(壬辰)에 | ||
+ | 유운룡(柳雲龍)((유운룡(柳雲龍): | ||
+ | 이 정사(精舍)가 부실함이 있게되면 이는 관민(官民) 모두가 부끄러운 일이라 하며 향사당(鄕射堂)((향사당(鄕射堂): | ||
+ | 새겨 붙인 바도 있으며 또 인조(仁祖)조(朝) 서기(西紀) 1636년(一六三六年) 병자(丙子) 난리로 소실(燒失)되었고 숙종(肅宗) 27년(二七年) 서기(西紀) 1701년(一七○一年) 신사(辛巳)에 홍경렴(洪景濂) 군수(郡守)에게 금계(錦溪) 선조(先祖)의 6대(六代) 사손(嗣孫)인 성(垶)이 정사(精舍) 복원(復元)을 간절(懇切)하게 원(願)함을 | ||
+ | 가상(嘉尙)하게 생각하여 힘을 도와 중건(重建)을 하니 재액(災厄)을 당(當)한지 60년(六十年)만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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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이렇듯 금양정사(錦陽精舍)야 말로 대대(代代)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연속(連續)이었다.\\ | ||
+ | \_이렇듯 맥(脈)을 이어온 정사(精舍)가 이제 만대불변(萬代不變)할 자리에 또 석각(石刻)을 하여 세워 놓으니 산천(山川)도 | ||
+ | 빛을 더하고 연하(烟霞)도 오색(五色)의 빛을 더하는 듯 하며 연작(燕雀)도 하례(賀禮)하도다. 이렇듯이 정사(精舍)야 말로 | ||
+ | 우리 황씨(黃氏)는 물론(勿論) 전국(全國) 유림(儒林)들까지도 숭배(崇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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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이러한 금양정사(錦陽精舍)의 내력(來歷)을 금반(今般) 발간(發刊)되는 보첩(譜牒)의 서두(序頭) 한 편(篇)에 등재(登載)하여 이 어른의 훌륭한 「얼」을 이어받아 앞으로 우리 문중(門中)의 후예(後裔)들이 끊임없이 훌륭한 자손(子孫)이 태생(胎生)하기를 기원(祈願)하는 바 크므로 두서(頭序)없이 우(右)와 같이 기술(記述)하는 바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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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_단군기원(檀君紀元) 4333년(四千三百三十三年)(서기(西紀) 2천년(二千年)) 경진년(庚辰年) 월(月) | ||
+ | 후예손(後裔孫) 영종(永宗) 근서(謹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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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21.174790649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2 18:3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