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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74 [2025/05/27 15:16] ssio2b-074 [2025/06/07 07:10]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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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이조판서행사간죽람황공묘표(贈吏曹判書行司諫竹覽黃公墓表) +===증이조판서행사간죽람황공묘표(贈吏曹判書行司諫竹覽黃公墓表)=== 
-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贈吏曹判書行司諫竹覽黃公墓表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永川治北魯柯之谷有向午而封者故司諫 贈判書平海黃公巾寫之藏而+\_**贈吏曹判書行司諫竹覽黃公墓表**\\ 
 +永川治北魯柯之谷有向午而封者故司諫\_贈判書平海黃公巾寫之藏而
 貞夫人全州崔氏合封之原也舊有短碣爲風雨所剝落苔痕烏跡幾不能保 貞夫人全州崔氏合封之原也舊有短碣爲風雨所剝落苔痕烏跡幾不能保
 有眞面后孫履龜相燮履喆爲是之惧將謀改堅淸表其墓余推鄕隣之誼豈 有眞面后孫履龜相燮履喆爲是之惧將謀改堅淸表其墓余推鄕隣之誼豈
-可以不文辭謹按公諱欽改字敏中竹覽其號也生 宜廟癸卯丙子中生 +可以不文辭謹按公諱欽改𨬔字敏中竹覽其號也生\_宜廟癸卯丙子中生 
-員 除順陵參奉 仁廟庚辰擢別試文科自玉堂歷司諫見時事多艱不樂 +\_除順陵參奉\_仁廟庚辰擢別試文科自玉堂歷司諫見時事多艱不樂 
-仕進退居竹谷脩然爲終老計乙卯某月終于寢壽七十三肅宗庚申追贈+仕進退居竹谷脩然爲終老計乙卯某月終于寢壽七十三肅宗庚申追\_
 長銓盖殊恩也公之居官履歷稽諸國乘有學識超倫誠孝出天八字赫赫然 長銓盖殊恩也公之居官履歷稽諸國乘有學識超倫誠孝出天八字赫赫然
-照人耳目雖其兵燹之餘文獻無徵而此可以見公生平也盖平海之黃著+照人耳目雖其兵燹之餘文獻無徵而此可以<fc #ff0000>旣</fc>見公生平也盖平海之黃著
 於東方者皆以學士公洛爲鼻祖而高麗金吾將軍太子檢校溫仁之后也中 於東方者皆以學士公洛爲鼻祖而高麗金吾將軍太子檢校溫仁之后也中
 祖有諱瑞金紫光祿大夫評理門下侍中封平海君陞縣爲郡歷九世諱瑀星 祖有諱瑞金紫光祿大夫評理門下侍中封平海君陞縣爲郡歷九世諱瑀星
-州牧使諱應淸逸薦眞寶縣監學行純篤世稱大海先生明溪書院諱居一+州牧使諱應淸逸薦眞寶縣監學行純篤世稱大海先生明溪書院諱居一
 贈工議有文行從兄海月先生稱以三珠弟寔公之祖曾高也考諱中信生員 贈工議有文行從兄海月先生稱以三珠弟寔公之祖曾高也考諱中信生員
 早遊旅軒張先生門得聞爲己之學丙子之亂赴暘溪鄭公好仁陣參四難倡 早遊旅軒張先生門得聞爲己之學丙子之亂赴暘溪鄭公好仁陣參四難倡
  
-義實蹟載郡誌及諸子錄安東權氏曾參判東峯諱克立之女盖先公從 +義實蹟載郡誌及諸子錄安東權氏\_曾參判東峯諱克立之女盖先公從 
-於陵而居遂爲永人生五男曰即公也鏸曰鋌曰曰鎭其次也公無嗣 +於陵而居遂爲永人生五男曰𨬔即公也鏸曰鋌曰曰鎭其次也公無嗣 
-以仲弟之子永河爲后文科文義縣令永河男壽吉進士蔭淸州牧使弟錄 +以仲弟之子永河爲后文科文義縣令永河男壽吉進士蔭淸州牧使弟錄 
-如右書之于陰 +如右書之于陰\\ 
-烏川鄭致埏謹撰 +\_\_烏川鄭致埏謹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사간(司諫) 벼슬에 행직(行 +</typo> 
-職)된 죽(竹覽) 황공(黃公)의 묘표(墓表) +</hidden> 
-영천군(永川郡)의 북쪽 노가곡(魯柯谷)에 오향(午向)의 봉분(封墳)이 있는 +\\ 
-것은 고인(故人)이 된 사간(司諫) 벼슬을 하고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된  +<typo ff:'바탕'; fs:1em; lh:1.5em> 
-해황공(平海黃公)의 묘(墓)이며 정부인(貞夫人)인 전주최씨(全州崔氏)와 합봉 +\_**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사간(司諫) 벼슬에 행직(行職)된  
-(合封)한 둔덕이다. +(竹覽) 황공(黃公)의 묘표(墓表)**\\ 
-옛날에 작은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비바람에 깎이고 이끼의 흔적과 새의  +\_영천군(永川郡)의 북쪽 노가곡(魯柯谷)에 오향(午向)의 봉분(封墳)이 있는 
-으로 거의 비석의 면목(面目)을 보하지 못하게 되는 후손(後孫)인 이구 +것은 고인(故人)이 된 사간(司諫) 벼슬을 하고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된  
-(履龜)와 상섭(相燮)과 이철(履喆)씨가 그것을 두려워 하여 장차 개갈(改碣)할+해황공(平海黃公)의 묘(墓)이며 정부인(貞夫人)인 전주최씨(全州崔氏)와  
 +합봉(合封)한 둔덕이다.\\ 
 + 
 +\_옛날에 작은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비바람에 깎이고 이끼의 흔적과 새의  
 +으로 거의 비석의 면목(面目)을 보하지 못하게 되는 후손(後孫)인  
 +이구(履龜)와 상섭(相燮)과 이철(履喆)씨가 그것을 두려워 하여 장차 개갈(改碣)할
 계획으로 그 묘도(墓道)에 맑게 표시할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하는지라 내가 계획으로 그 묘도(墓道)에 맑게 표시할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하는지라 내가
  
-(鄕中)의 이웃마을에 사는 정의(情誼)로서 어떻게 글이 안된다고 사양하 +(鄕中)의 이웃 마을에 사는 정의(情誼)로서 어떻게 글이 안된다고  
-겠는가 삼가 상고(詳考)해 보니 공(公)의 휘(諱)는 흠(欽)이었는데 ()으로 +사양하겠는가삼가 상고(詳考)해 보니 공(公)의 휘(諱)는 흠(欽)이었는데 (𨬔)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민중(敏中)이요 죽(竹覽)이 그의 호(號)이다 +고쳤으며 자(字)는 민중(敏中)이요 죽(竹覽)이 그의 호(號)이다.\\ 
-선조(宣祖)三十六년 계(癸卯)(一六〇三)에 출생하여 인조(仁祖) 十四년  + 
-자(丙子)(一六三六)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순능참봉(順陵參奉)에  +\_선조(宣祖) 36(三十六)년 계(癸卯)(1603(一六〇三))에 출생하여 인조(仁祖) 14(十四)년  
-수되었으며 인조(仁祖) 十八년 경진(庚辰)(一六四○)에 별시(別試)의 문과(文 +자(丙子)(1636(一六三六))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순능참봉(順陵參奉)에  
-科)에 발탁(拔濯)되어 성균관(成均館)을 비록하여 사간(司諫)을 역임(歷任)하 +수되었으며 인조(仁祖) 18(十八)년 경진(庚辰)(1640(一六四○))에 별시(別試)의  
-였으나 그 시대의 사세(事勢)가 많이 어렵게 됨을 보고 벼슬에 나아감을 글지지 +문과(文科)에 발탁(拔濯)되어 성균관(成均館)을 비록하여 사간(司諫)을 역임(歷任)하였으나  
-않고 죽곡(竹谷)에 물러나 살면서 문득 늙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살 계획었는데 +그 시대의 사세(事勢)가 많이 어렵게 됨을 보고 벼슬에 나아감을 즐기지 
-숙종(肅宗) 一년 을묘(乙卯)(一六七五)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七十 +않고 죽곡(竹谷)에 물러나 살면서 문득 늙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살 계획었는데 
-三세의 수(壽)를 누렸는데 숙종(肅宗) 경신년에 이조판(吏曹判書)에 추증(追 +숙종(肅宗) 1()년 을묘(乙卯)(1675(一六七五))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贈)되었으니 대체로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73(七十三)세의 수(壽)를 누렸는데 숙종(肅宗) 경신년에 이조판(吏曹判書)에  
-공(公)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의 이력(履歷)은 국사(國史)를 상고해 보면 학식 +추증(追贈)되었으니 대체로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學識)이 특별히 뛰어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성었다는(學識超倫誠孝 + 
-出天) 여덟글자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으니 비록 그 병란(兵亂)을 +\_공(公)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의 이력(履歷)은 국사(國史)를 상고해 보면 학식(學識)이  
-겪은 나머지 문헌(文獻)이 없어져서 증거로 내우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특별히 뛰어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성었다는 '學識超倫誠孝出天(학식초륜효성출천)'  
-공(公)의 평생이력의 대략은 볼 수 있다.+여덟 글자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으니 비록 그 병란(兵亂)을 
 +겪은 나머지 문헌(文獻)이 없어져서 증거로 내우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공(公)의 평생 이력의 대략은 볼 수 있다.\\ 
 + 
 +\_대체로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씨(姓氏)이니 모두  
 +학사공(學士公)인 휘(諱) 낙(洛)이 시조가 되며 고려 때에 벼슬이 금오장군(金吾 
 +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 온인(溫仁)의 후예이다.\\ 
 + 
 +\_중세(中世)의 조상(祖上)으로는 휘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이며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져서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 
 +\_9대(九代)를 내려서 휘 우(瑀)는 성주목사(星州牧使)였으며 휘 응청(應淸)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학행(學行)이 순수(純粹)하고  
 +독실하여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칭하며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 
 +\_휘(諱)는 거일(居一)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학문(學問)과 행 
 +의(行義)가 있어서 종형(從兄)인 해월선생(海月先生)이  
 +삼주제(三珠弟)<sup>주1</sup>((삼주수(三珠樹): 당(唐)나라 때 왕거(王勮), 왕면(王勔), 왕발(王勃) 3형제가 모두 재사(才士)로 이름이 높아 당시에 이들을 삼주수(三珠樹)라 일컬었다.))라고 칭찬했으니  
 +이 세 어른이 공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와 조부(祖父)가 되신다. 
 +아버지의 휘(諱)는 중신(中信)이니 생원(生員)으로서 일찍이 장여헌(張旅軒)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들을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號)가 양계(暘溪)인 정공(鄭公)  
 +호인(好仁)의 진지(陣地)에 들어가 사난창의(四難倡義)에 참가하여 실적(實蹟)이 
 + 
 +영천군지(永川郡誌)와 참가했던 여러 사람들의 기록에 실려있다.\\ 
 + 
 +\_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참찬(參贊)에 증직(贈職)되고 호는  
 +동봉(東峯)이며 휘는 극립(克立)의 따님이니 대체로 선공(先公)께서 처향(妻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드디어 영천(永川)사람이 되었다.\\
  
-대체로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씨(姓氏)이니 모두 학사 +\_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연(𨬔)은 곧 공(公)이요 다음은 혜()요 음은 정(
-공(學士)인 휘(諱)는 락(洛)이 시조가 되며 고려때에 벼슬이 금오장군(金吾 +이며 다은 일()이요 은 ()이다.\\
-將軍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 온인(溫仁)의 후예이+
-증세(中世)의 조상(祖上)으로는 휘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 +
-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이며 평해군(平海郡)에 봉해져서 평해현(平海 +
-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
-구대(九代)를 내려서 휘 우(瑀)는 성주목사(星州牧使)였으며 휘 응청(應淸) +
-일(遺逸)로 천거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학행(學行)이 순수(純 +
-粹)하고 독실하여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칭하며 명계서원(明溪 +
-書院)에 제향되고 있+
-휘(諱)는 거일(居一)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학문(學問)과 행 +
-의(行義)가 있어서 종형(從兄)인 해월선생(海月先生)이 삼주제(三珠弟)라고 칭 +
-찬했으니 이 세 어른이 공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와 조부(祖父)가 되신다. +
-아버지의 휘(諱)는 중신(中信)이니 생원(生員)으로서 일찍이 장려헌선생(張旅 +
-軒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들을 수 있었으며 병 +
-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號)가 양계(暘溪)인 정공(鄭公) 호인 +
-(好仁)의 진지(陣地)에 들어가 사난창의(四難倡義)에 참가하여 실적(實蹟)이+
  
-영천군지(永川郡誌)와 참가했던 여러사람들의 기록에 실려있다. +\_공(公)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다음 동생(鏸)의 아들 영하(永河)를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참찬(參贊)에 증직(贈職)되고 호는 동봉(東 +입후(入後)했는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으며 영하(永河)의 
-峯)이며 휘는 극립(克立)의 따님이니 대체로 선공(先公)께서 처향(妻鄕)을 따라 +아들 수길(壽吉)은 진사(進士)가 되고 음사(蔭仕)로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살았기 때문에 드디어 영천(永川)사람이 되었다. +냈다차례로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여 묘비(墓碑)의 뒷 면(面)에 쓰다.\\ 
-아들 아섯을 낳았으니 윤(鋼)은 곧 공(公)이요 다음은 혜(魏)요 다음은 정(鍵) +\_오천(烏川) 정치연(鄭致珽) 삼가 짓다.\\ 
-이며 다음은 일(鎰)이요 다음은 진(鎭)이다. +\\ 
-공(公)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다음 동생(鏸)의 아들 영하(永河)를 입후(入後) +<WRAP subnote> 
-했는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으며 영하(永河)의 +주1. 삼주제(三珠弟)당()나라의 왕발(王勃)과 왕거(勮)과 왕면(勔) 3형제(三兄弟)의 재주가 모두 특출(特出)했다는 서 온 말\\
-아들 수길(壽吉)은 진사(進士)가 되고 음사(蔭仕)로 청주목사(淸州牧使)를  +
-냈다 차례로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여 묘비(墓碑)의 뒷 면(面)에 쓰다. +
-오천(烏川) 정치연(鄭致珽) 삼가 짓다. +
-註一。三珠弟:唐나라의 王勃과 王과 王動 三兄弟의 재주가 모두 特出했다는 서 온 말 +
-二。蔭 仕:父、祖의 功德으로 얻은 벼슬+
  
 +주2. 음사(蔭仕): 부(父), 조(祖)의 공덕(功德)으로 얻은 벼슬
 +</WRAP>
 +</typo>
 +</WRAP>
b-074.174832657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7 15:16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