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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77 [2025/05/26 12:16] ssio2b-077 [2025/06/01 17:35]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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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곡황치술묘갈명(丹谷黃致述墓碣銘) +===단곡황치술묘갈명(丹谷黃致述墓碣銘)=== 
-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丹谷黃致述墓碣銘+<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丹谷黃致述墓碣銘**\\
 曰黃君和錫龍錫甫錫余於鳳山之陽請其六代祖參奉公碣銘辭以老病不 曰黃君和錫龍錫甫錫余於鳳山之陽請其六代祖參奉公碣銘辭以老病不
-能再三來懇不獲己乃按其遺事 公諱致述字錫允平海黃氏之著爲東方 +能再三來懇不獲己乃按其遺事\_公諱致述字錫允平海黃氏之著爲東方 
-族古矣有諱洛羅季官上將軍有諱溫仁麗朝官檢校有諱應淸 國朝宣廟甲 +族古矣有諱洛羅季官上將軍有諱溫仁麗朝官檢校有諱應淸\_國朝宣 
-午以學行被召除寶縣監享明溪祠世稱大海先生是生居一以文行贈 +廟甲午以學行被\_召除寶縣監享明溪祠世稱大海先生是生居一以文 
-參議是生中信號魯庵始居永川遊旅軒張先生門生員居館學獨斥時議之 +\_贈參議是生中信號魯庵始居永川遊旅軒張先生門生員居館學獨斥 
-乖人皆偉之是生諱號竹覽 仁祖朝生員又擢文科官至司諫 贈吏判是 +時議之乖人皆偉之是生諱𨬔號竹覽\_仁祖朝生員又擢文科官至司諫\_ 
-生諱永河行文義縣令號寶岡於公爲高祖也曾祖諱壽吉淸州牧使號淸齊 +贈吏判是生諱永河行文義縣令號寶岡於公爲高祖也曾祖諱壽吉淸州牧 
-祖諱仁默考諱運南永陽李氏生公于竹谷里第天性淳厚恭儉就學書塾 +使號淸齊祖諱仁默考諱運南永陽李氏生公于竹谷里第天性淳厚恭儉 
-塾不與群兒相争專心所業孜孜不懈孝於事親睦於處族勤於治每念家 +就學書塾塾不與群兒相争專心所業孜孜不懈孝於事親睦於處族勤於治 
-世中替以紹述爲務且周恤之義有里籍甚 正廟甲寅除通德郞明陵參奉 +每念家世中替以紹述爲務且周恤之義有里籍甚\_正廟甲寅除通德 
-築丹谷小庵優遊終世臨終戒諸子曰汝曹各守家規永永勿替也墓公德 +郞明陵參奉築丹谷小庵優遊終世臨終戒諸子曰汝曹各守家規永永勿 
-谷子坐配恭人完山李氏郡守瑞華之女有壺範墓同原同坐男騮海馹 +替也墓公德谷子坐配恭人完山李氏郡守瑞華之女有壺範墓同原同坐祔 
-海駿海鳳海騮海男大淵馹海男道淵駿海男性淵智淵鳳海男基淵斗淵啓+男騮海馹海駿海鳳海騮海男大淵馹海男道淵駿海男性淵智淵鳳海男基 
 +淵斗淵啓淵餘不錄公以古家苗裔僻居深谷篤修勤儉孝睦之行承先業遺 
 +嘉謨公之爲公<fc #ff0000>旣</fc>可想矣是以爲之銘\_銘曰纘修先美天卑剛兮裕啓後謨 
 +家道昌兮德谷淸暢雙釖藏兮潛蹟昭著百世光兮\\ 
 +\_\_疆園大淵獻春分節利川徐錫宗撰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단곡(丹谷) 황치술(黃致述)의 묘갈명(墓碣銘)**\\ 
 +\_어느날 황화석(黃和錫)군과 황용석(黃龍錫)군이 봉산(鳳山)의 남쪽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그의 6대조(六代祖)이신 참봉공(參奉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지라, 내가 늙고 병들어 지을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두 번 세 번 찾아와서 
 +간청하기에 부득이하여 곧 그의 유사(遺事)를 상고해 본즉 공(公)의 휘(諱)는 
 +치술(致述)이요 자(字)는 석윤(錫允)이니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동방(東邦)의 
 +드러난 성씨(姓氏)가 된 것은 오래이다.\\
  
-淵餘不錄公以古家苗裔僻居深谷篤修勤儉孝睦之行承先業遺嘉謨公 +\_휘(諱)는 (洛)은 신라말기(新羅末期)에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이었으며 휘(諱) 
-之爲公既可想矣是以爲之銘銘曰纘修先美天卑剛兮裕啟後謨家道昌 +온인(溫仁)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이 검교(檢校)였고 휘(諱) 응청(應淸)은  
-兮德谷淸暢雙釦藏兮潛蹟昭著百世光兮 +조선조(朝鮮朝)의 선조(宣祖) 27(二十七)년 갑오(1594(一五九四))에 학행(學行)으로 
-疆園大淵獻春分節利川徐錫宗撰 +부름을 받아 진보현감(寶縣監)에 제수되고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단곡(丹谷) 황치술(黄致述)의 묘갈명(墓碣銘) +
-어느날 황화석(黃和錫)군과 황룡석(黃龍錫)군이 봉산(鳳山)의 남쪽에 있는 나를 +
-찾아와서 그의 六代祖이신 참봉공(參奉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달라고 청 +
-하는지라 내가 늙고 병들어 지을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두 번 세 번 찾아와서 +
-간청하기에 부득이하여 곧 그의 유사(遺事)를 상고해 보진 공(公)의 휘(諱)는 +
-치술(致述)이요 자(字)는 석운(錫允)이니 평해황씨(平海黄氏)가 동방(東邦)의 +
-드러난 성씨(姓氏)가 된 것은 오래이다 +
-휘(諱)는 (洛)은 신라말기(新羅末期)에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이었으며 휘 +
-(諱)온인(溫仁)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이 검교(檢校)였고 휘(諱) 응청(應 +
-淸)은 조선조(朝鮮朝)의 선조(宣祖) 二十七년 갑오(一五九四)에 학행(學行)으로 +
-부름을 받아 진보현감( 寶縣監)에 제수되고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며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일컬는다. 아들은 거일(居一)이니 있으며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일컬는다. 아들은 거일(居一)이니
-학문(學問)과 행의(行義)가 높아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그 아들 중 +학문(學問)과 행의(行義)가 높아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고 그 아들 중신(中信)은  
-신(中信)은 호(號)가 노암(魯庵)인데 처음 영천(永川)에서 살게 되었으며 여 +호(號)가 노암(魯庵)인데 처음 영천(永川)에서 살게 되었으며  
-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생원(生員)으로서 성균관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생원(生員)으로서  
-(成均館)에서 살며 학문을 닦을 때에 단독(單獨)으로 그 당시의 그릇된 시론 +성균관(成均館)에서 살며 학문을 닦을 때에 단독(單獨)으로 그 당시의 그릇된  
-(時論)을 배척하는 글을 올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단한 선비라고 했다. 아들의 +시론(時論)을 배척하는 글을 올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단한 선비라고 했다.  
-휘(諱)는 ()이요 호(號)는 죽(竹覽)이니 인조(仁祖) 때에 생원시(生員 +아들의 휘(諱)는 (𨬔)이요 호(號)는 죽(竹覽)이니 인조(仁祖) 때에  
-試)에 합격하고 또 문과급제(文科及第)로 뽑혀 벼슬이 사간(司諫)이었으며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또 문과급제(文科及第)로 뽑혀 벼슬이 사간(司諫)이었으며  
-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그 아들의 휘(諱)는 영하(永河)이니  +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그 아들의 휘(諱)는 영하(永河)이니  
-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호(號)는 보강(寶岡)인데 공(公)에게는 고조(高祖) +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호(號)는 보강(寶岡)인데 공(公)에게는 고조(高祖)가 되신다.\\
-가 되신다. +
-증조(曾祖)의 휘(諱)는 수길(壽吉)이니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고 호(號)는 +
-청재(淸齋)이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인묵(仁默)이요 아버지의 휘는 운남(運 +
-南)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로서 죽곡리(竹谷里)의 집에서 공(公)을 +
-공(公)은 천성이 순후하고 공손하며 검소했으며 서당(書堂)에 취학하여서는 여러 +
-아이들과 더불어 서로 다투지 않고 학업(學業)에 전념하여 게으르지 않고 부+
  
-지런히 공부했다 +\_(曾祖)의 ()는 수길(壽吉)이니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고 호()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겼고 동족(同族)에는 화목했으며 치산(治産)에 부지런히 +청재(淸齋)이며 조부(祖父)의 휘()는 인묵(仁默)이요, 아버의 휘는 운남(運南),  
-힘쓰면서 가문(家門)이 (中世)에 쇠퇴한 것을 생각하고 선대(先代)의 유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서 죽곡리(竹谷里)의 서 공() 
-(遺業)을 계승하도록 힘썼다 +낳았다.\\
-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향중(鄉中)에 칭찬이 자자 +
-했으며 정종(正宗十八년 갑인(一七九四)에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로 명릉참 +
-(明陵參奉)이 제수되었으며 만년(晚年)애는 단곡(丹谷)에 작은 초막(草幕)을 +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
-임종(臨終)이 되어 자제(子弟)들을 경계하는 말에 너희들은 각각 가문의 규율 +
-(規律)을 지켜 나가는 일을 길길이 바꾸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
-묘(墓)는 공덕곡(公德谷)의 자좌(子坐)의 둔덕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공인(恭 +
-人)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인데 군수(郡守)를 지낸 (瑞華)의 따님이며 규 +
-증(閨中)의 법도가 있었으며 묘는 같은 둔덕의 같은 좌향에 부장()했다 +
-아들은 유해(騮海)와 준해(駿海)와 봉해(鳳海)이며 유해(騮海)의 아들은 대연 +
-(大淵)이고 일해(馹海)의 아들은 도연(道淵)이며 준해(駿海)의 아들은 性淵과 +
-지연이고 봉해(鳳海)의 아들은 기연(基淵)과 두연(斗淵)과 계연(啟淵)이며 +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옛날부터 명망(名望)이 있는 가문(家門)의 후예로서 궁벽(窮僻)한 깊은+\_공(公)은 천성이 순후하고 공손하며 검소했으며 서당(書堂)에 취학하여서는 여러 
 +아이들과 더불어 서로 다투지 않고 학업(學業)에 전념하여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 
 +\_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겼고 동족(同族)에는 화목했으며 치산(治産)에 부지런히 
 +힘쓰면서 가문(家門)이 중세(中世)에 쇠퇴한 것을 생각하고 선대(先代)의 유업(遺業)을  
 +계승하도록 힘썼다.\\ 
 + 
 +\_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향중(鄕中)에 칭찬이 자자했으며  
 +정종(正宗) 18(十八)년 갑인(1794(一七九四))에 통덕랑(通德郞)의 품계로  
 +명릉참봉(明陵參奉)이 제수되었으며, 만년(晩年)에는 단곡(丹谷)에 작은 초막(草幕)을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 
 +\_임종(臨終)이 되어 자제(子弟)들을 경계하는 말에 너희들은 각각 가문의 규율(規律)을  
 +지켜 나가는 일을 길이길이 바꾸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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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묘(墓)는 공덕곡(公德谷)의 자좌(子坐)의 둔덕에 있으며 배위(配位)는 공인(恭人)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인데 군수(郡守)를 지낸 서화(瑞華)의 따님이며 규중(閨中)의  
 +법도가 있었으며 묘는 같은 둔덕의 같은 좌향에 부장(祔葬)했다.\\ 
 + 
 +\_아들은 유해(騮海)와 <fc #ff0000>일해(馹海)와</fc> 준해(駿海)와 봉해(鳳海)이며, 유해(騮海)의 아들은 대연(大淵)이고  
 +일해(馹海)의 아들은 도연(道淵)이며 준해(駿海)의 아들은 성연(性淵)과 
 +지연(智淵)이고 봉해(鳳海)의 아들은 기연(基淵)과 두연(斗淵)과 계연(啓淵)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 
 +\_공이 옛날부터 명망(名望)이 있는 가문(家門)의 후예로서 궁벽(窮僻)한 깊은
 산골에 살면서 근검(勤儉)하고 효도하고 화목한 행의(行義)를 독실(篤實)하게 산골에 살면서 근검(勤儉)하고 효도하고 화목한 행의(行義)를 독실(篤實)하게
-닦아 선대(先代)의 세업(世業)을 계승하고 후생(後生)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남 +닦아 선대(先代)의 세업(世業)을 계승하고 후생(後生)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남겼으니  
-겼으니 공이 공다운 행의(行義)를 상상할 수 있다 +공이 공다운 행의(行義)를 상상할 수 있다.\\ 
-이리하여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후손의 계책을 열어주니 가도(家道)가 + 
-번창하고 공덕공(公德谷)의 맑고 화창하니 쌍검(雙)을 감추었다 +\_이리하여 명(銘)을 하노니 명(銘)에 가로대 \\ 
-숨은 행적(行蹟)을 밝게 나타내었으니 백세(百世)토록 빛나리로다 +纘修先美 \\ 
-정해(丁亥)년 춘분절(春分節)날 이천(利川) 서석(徐錫宗)이 짓다.+天卑剛兮 \\ 
 +裕啓後謨 후손의 계책을 열어주니 \\ 
 +家道昌兮 가도(家道)가 번창하고 \\ 
 +德谷淸暢 공덕공(公德谷)의 맑고 화창하니 \\ 
 +雙釖藏兮 쌍검(雙)을 감추었다.\\ 
 +潛蹟昭著 숨은 행적(行蹟)을 밝게 나타내었으니\\ 
 +百世光兮 백세(百世)토록 빛나리로다.\\ 
 + 
 +\_\_정해(丁亥)년 춘분절(春分節)날 이천(利川) 서석(徐錫宗)이 짓다. 
 +</typo>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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