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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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해황씨초보서((平海黃氏世譜序)=== | + | ===평해황씨초보서(平海黃氏世譜序)=== |
+ | <WRAP 33em justify> | ||
+ | <typo ff:' | ||
+ | \_**平海黃氏世譜序**\\ | ||
+ | \_황씨(黃氏)의 동국(東國)에 나타난 역사(歷史)는 오랜 옛날이며 그 번영(繁榮)해온 유래(由來)는 신라조(新羅朝)에서 | ||
+ | 안(安)정(鄭)박(朴)이(李)김(金)최(崔)의 6성(六姓)을 처음 세운 후(後)로부터 | ||
+ | 그 뿌리와 줄기와 잎이 퍼져서 우리 황씨(黃氏)는 어느덧 대성(大姓)이 되어 파계(派系)가 나누어지고 | ||
+ | 관향(貫鄕)이 달라서 철원(鐵原) 창원(昌原) 장수(長水) 평해(平海) 등(等)에 | ||
+ | 가장 많은 편이며 그 중(中)에도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멀고 오랜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다.\\ | ||
- | \_平海黃氏世譜序\\ | + | \_그러면 |
- | \_黃氏의東國에나타난歷史는오랜옛날이며그繁榮해온由來는新羅朝에서安鄭朴李金崔의六姓을처음세운後로부터 | + | 어른이 |
- | 그뿌리와줄기와잎이퍼저서우리黃氏는어느덧大姓이되어派系가나누어지고貫鄕이달라서鐵原昌原長水平海等에 | + | 살아계셔서 지금도 |
- | 가장많은편이며그中에도平海黃氏가멀고오랜歷史를지니고있다 | + | 상륙(上陸)하셨다 하여 그 지방명(地方名)을 지금(只今)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르고 있다. 이 모든 말이 다 |
- | 그러면黃氏의始祖는누구였던가? | + | 평해군지(平海郡誌)에 등재(登載)되어 있으나, 세대(世代)가 황박(荒朴)하고 |
- | 다는 것인데黃將軍은月松북쪽기슭에살아계셔서지금도黃將軍의사신터가있으며丘將軍은丘尾北浦에배를대어느 | + | 문적(文籍)이 소실(燒失)되어 |
- | 陸하셨다하여그地方名을只今도丘尾津이라부르고있다이모든말이다平海郡誌에登載되어있으나世代가荒朴하고 | + | 근원(根源)을 삼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대개 장수(長水) 창원(昌原)은 평해(平海)에서 나누어졌다 하니 |
- | 文籍이燒失되어確實히證憑할根據는없다그러나뜻하건데黃姓이처음으로여기에서根源을삼은것은 틀림없는것같 | + | 이 3파(三派)는 처음 한 조상(祖上)에서 갈린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 | 다그리고대계長水昌原은平海에서나누어졌다하니이三派는처음한祖上에서갈린것을짐작할수있다 | + | |
- | 우리平海黃氏는 고려初로부터代代로文官과武官에宰相의자리를바라볼만한名望높은분들이많았고또이름난宰相 | + | |
- | 과높은벼슬자리를차지한분들이많아서李朝에들어와서도歷史에班班함을가히자랑할만하다이것은진실로祖先의 | + | |
- | 深仁厚澤의積功이아니였던들어찌數百年동안을그같은燦然한門閥로家業을이어내려올수있었겠는가? | + | |
- | 무릇世上은심은바가있으면반드시거두게되고물은대면반드시흐르는法임에歷代의燦然했던우리譜史도반드시譜 | + | |
- | 牒을通하여서로믿고傳함이있었던것을確信하노라그런데高麗末에日本海賊떼가侵入하여竹嶺以南은舉皆가盜賊 | + | |
- | 에게쑥밭이되어많은사람들이北으로避亂하게됨에가졌던祖上傳來의물건을모두兵火로燒失하고또散之四方으로 | + | |
- | 흩어져살게됨으로 그情狀은진실로슬프고可惜할노릇이였다이것이우리黃氏가北方에많이살게된연유요 | + | |
- | 일로생각한다 | + | |
- | 序文 | + | |
- | 그다음은李朝初에兵曹判書黃象이文川郡에서돌아가葬事함에그後孫의一部가흩어져살게된것이두번째였다 | + | |
- | 그리고各邑各處에散居하여繁衍하게사는이들은 모두가간구한生活로한터럭에견줄것이나오히려끊이지않고살아 | + | |
- | 가는것이多幸한일이였다回顧하건데譜諜을읽고또듣는바없이살아온 고로平海黃氏子孫들이三派로나누어그祖上 | + | |
- | 을各各으로하였으니처음에한祖上이누구였음을알지못하고서로婚姻을하여부끄러움이없이지냈으니이어찌大幸 | + | |
- | 中大不幸! | + | \_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고려 초(初)로부터 대대(代代)로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에 재상(宰相)의 자리를 |
- | 黃瑞께서는翊戴元勳으로써陞郡즉箕城縣을平海郡으로올리시고黃鉉은經明行修로써世上에이름이높고近代에와 | + | 명망(名望) 높은 분들이 |
- | 서또黃瑞와黃俊良두분의博洽多聞으로서도모두宗史에詳審치못한바있어한祖上으로 그同宗인것이드러남이없으 | + |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도 역사(歷史)에 반반(班班)함을 가히 자랑할 만하다. 이것은 진실로 조선(祖先)의 |
- | 니드디어우리子孫의無窮한슬픔이라하겠다嗚呼라우리고을은僻鄉이며우리들은잔약한子孫이라이들의흐름을살 | + | 심인후택(深仁厚澤)의 적공(積功)이 아니였던들 |
- | 펴볼때가난하고賤한常民으로기우러짐이많으니진실로後孫들의將來가크게痛嘆케되는도다果然이일이將次어떻 | + | 이어 |
- | 게되어갈까? | + | |
- | 할것이오늘보다더할것이明若觀火하며또同族의賤해짐과그將來의嘆息됨이오늘의子孫이오늘보다응당더할것이 | + | |
- | 므로이에크게두려움이있어宗族의譜史를蒐集코져하였으나疾病이잦고耳目이넓지못하여叔父應淸어른의平日手 | + | |
- | 記한것을土台로나의交遊間에든 고본바를補入하여一家의私私로히전하는便覽으로하였으니그間에혹仔細함과혹 | + | |
- | 簡略함과혹빠진것을쓰지않음은前誌에따른것이며혹同名으로서派가같지않고혹同生으로서이름이가지런하지않 | + | |
- | 아疑心으로전하고믿음으로전하여 그대로두고깍지않음은先代를높인것이오外孫의外派와舅親의舅族을繼續記錄 | + | |
- | 한것은士族의根源을밝힌것이오常民아전庶子賤民이된자에이르기까지모두빼지않은것은同宗을重하게여김이라 | + | |
- | 嗚呼라過去數百年間의祖上이어찌이로힘입어혹後世에傳할줄알았겠으며또將次數百年間에子孫들이어찌이로이 | + | |
- | 어서더욱자세할줄누가알일이겠는가?만든바計劃대로族譜가完成되었으니이에可히유감이없을지니라 | + | |
- | 宣祖甲辰上浣通訓大夫行醴泉郡守汝一謹序 | + | |
+ | \_무릇 세상(世上)은 심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거두게 되고 물은 대면 반드시 흐르는 법(法)임에, | ||
+ | 역대(歷代)의 찬연(燦然)했던 우리 보사(譜史)도 반드시 보첩(譜牒)을 통(通)하여 서로 믿고 전(傳)함이 있었던 것을 | ||
+ | 확신(確信)하노라. 그런데 고려(高麗) 말(末)에 일본(日本) 해적(海賊) 떼가 침입(侵入)하여 죽령(竹嶺) 이남(以南)은 거개(擧皆)가 | ||
+ | 도적(盜賊)에게 쑥밭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북(北)으로 피란(避亂)하게 됨에, 가졌던 조상(祖上) 전래(傳來)의 물건을 | ||
+ | 모두 병화(兵火)로 소실(燒失)하고 또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 ||
+ | 흩어져 살게 됨으로 그 정상(情狀)은 진실로 슬프고 가석(可惜)할 노릇이었다. 이것이 우리 황씨(黃氏)가 북방(北方)에 | ||
+ | 많이 살게된 연유요 또 처음된 일로 생각한다.\\ | ||
+ | |||
+ | \_그 다음은 이조(李朝) 초(初)에 병조판서(兵曹判書) 황상(黃象)이 문천군(文川郡)에서 돌아가 장사(葬事)함에 그 후손(後孫)의 | ||
+ | 일부(一部)가 흩어져 살게 된 것이 두번째였다.\\ | ||
+ | |||
+ | \_그리고 각읍(各邑) 각처(各處)에 산거(散居)하여 번연(繁衍)하게 사는 이들은 모두가 간구한 생활(生活)로 한 터럭에 견줄 | ||
+ | 것이나 오히려 끊이지 않고 살아 | ||
+ | 가는 것이 다행(多幸)한 일이었다. 회고(回顧)하건데 보첩(譜諜)을 읽고 또 듣는 바 없이 살아온 고로 | ||
+ | 평해황씨(平海黃氏) 자손(子孫)들이 3파(三派)로 나누어 그 조상(祖上)을 각각(各各)으로 하였으니 처음에 한 조상(祖上)이 | ||
+ | 누구였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 혼인(婚姻)을 하여 부끄러움이 없이 지냈으니 이 어찌 대행(大幸) | ||
+ | 중(中) 대불행(大不幸)이 아니었으랴!\\ | ||
+ | |||
+ | \_황서(黃瑞)께서는 익대원훈(翊戴元勳)으로써 승군(陞郡) 즉 기성현(箕城縣)을 평해군(平海郡)으로 올리시고 황현(黃鉉)은 | ||
+ | 경명행수(經明行修)((經明行修(경명행수): | ||
+ |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고, 근대(近代)에 와서 또 황서(黃瑞)와 황준량(黃俊良) 두분의 박흡다문(博洽多聞)으로서도 모두 | ||
+ | 종사(宗史)에 상심(詳審)치 못한 바 있어 한 조상(祖上)으로 그 동종(同宗)인 것이 드러남이 없으니, | ||
+ | 드디어 우리 자손(子孫)의 무궁(無窮)한 슬픔이라 하겠다. \\ | ||
+ | |||
+ | \_오호(嗚呼)라 우리 고을은 벽향(僻鄕)이며 우리들은 | ||
+ | 잔약한 자손(子孫)이라. 이들의 흐름을 살펴 볼 때 가난하고 천(賤)한 상민(常民)으로 기울어짐이 많으니 | ||
+ | 진실로 후손(後孫)들의 장래(將來)가 크게 통탄(痛嘆)케 되는도다. 과연(果然) 이 일이 장차(將次) 어떻게 되어갈까? | ||
+ | 이에 거듭한 임진(壬辰) 계사(癸巳)의 재난(災難)이 려말(麗末)의 해구(海寇)의 재난(災難)보다 더욱 심(甚)하니 이제까지의 | ||
+ | 증빙(證憑)을 후일(後日)에 제시(提示)치 못할 것이 오늘보다 더 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며 또 동족(同族)의 천(賤)해짐과 | ||
+ | 그 장래(將來)의 탄식(嘆息)됨이 오늘의 자손(子孫)이 오늘보다 응당 더 할 것이므로, | ||
+ | 있어 종족(宗族)의 보사(譜史)를 수집(蒐集)코져 하였으나 질병(疾病)이 잦고 이목(耳目)이 넓지 못하여, 숙부(叔父) 응청(應淸) 어른의 | ||
+ | 평일(平日) 수기(手記)한 것을 토대(土台)로 나의 교유(交遊) 간(間)에 듣고 본 바를 보입(補入)하여 일가(一家)의 사사(私私)로히 전하는 | ||
+ | 편람(便覽)으로 하였으니 그 간(間)에 혹 자세(仔細)함과 혹 | ||
+ | 간략(簡略)함과 혹 빠진 것을 쓰지 않음은 전지(前誌)에 따른 것이며, 혹 동명(同名)으로서 파(派)가 같지 않고 | ||
+ | 혹 동생(同生)으로서 이름이 가지런하지 않아 의심(疑心)으로 전하고 믿음으로 전하여 | ||
+ | 그대로 두고 깍지 않음은 선대(先代)를 높인 것이오, 외손(外孫)의 외파(外派)와 구친(舅親)의 구족(舅族)을 계속(繼續) 기록(記錄)한 것은 | ||
+ | 사족(士族)의 근원(根源)을 밝힌 것이오 상민(常民) 아전 서자(庶子) 천민(賤民)이 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지 않은 것은 | ||
+ | 동종(同宗)을 중(重)하게 여김이라.\\ | ||
+ | |||
+ | \_오호(嗚呼)라 과거(過去) 수백년간(數百年間)의 조상(祖上)이 어찌 이로 힘입어 혹 후세(後世)에 전(傳)할 줄 알았겠으며 | ||
+ | 또 장차(將次) 수백년간(數百年間)에 자손(子孫)들이 어찌 이로 이어서 더욱 자세할 줄 누가 알 일이겠는가? | ||
+ | 만든 바 계획(計劃)대로 족보(族譜)가 완성(完成)되었으니 이에 가(可)히 유감이 없을지니라.\\ | ||
+ | \_\_선조(宣祖 ) 갑진(甲辰)(=1604) 상완(上浣)((上浣(상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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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11.174686938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0 18:2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