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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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o ff:' | <typo ff:' | ||
\_**庚寅譜序**\\ | \_**庚寅譜序**\\ | ||
- | \_우리 平海黃氏는 建武 年代로 부터 비롯하여 現在에 이르기까지 一千七百四十餘年의 | + | \_우리 |
- | 悠久한 歷史를 지니고 있다.\\ | + |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다.\\ |
- | \_始祖께서 漢나라에서 배를 타시고 우리나라 東海岸의 平海 越松浦에 上陸하셨다는 말과 | + | \_시조(始祖)께서 |
- | 黃將軍이라는 어른께서 그곳에 | + | 황장군(黃將軍)이라는 어른께서 그곳에 |
- | 松原을 造成하시고 계셨다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傳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더 말 할 것이 | + | 송원(松原)을 조성(造成)하시고 계셨다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
- | 없거니와 우리의 祖上들은 저멀리 新羅時代로부터 高麗時代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높은 벼슬과 | + | 없거니와, 우리의 |
- | 貴한 所任를 맡으신 어른과 學問과 名望이 높으신 어른들이 代代로 聯綿히 이어 끊이지 않았지만 | + | 귀(貴)한 소임(所任)를 맡으신 어른과 |
- | 遺感스럽게도 그간의 文籍이 없어지고 또 譜牒마저 燒失되어 至今 이를 소상하게 | + | 유감(遺感)스럽게도 그간의 |
- | 考證치는 못하나다만 各者가 흩어져 산 그곳을 貫鄕으로 삼았던 것이다.\\ | + | 고증(考證)치는 못하나, 다만 |
- | \_箕城에 本貫을 둔 者로 派系를 이은 根源을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金吾公으로 | + | \_기성(箕城)에 본관(本貫)을 둔 자(者)로 계파(派系)를 이은 |
- | 中祖를 삼으셨는데 李朝 中葉에 와서 나 | + | 중조(中祖)를 삼으셨는데, 이조(李朝) 중엽(中葉)에 와서 나의 선조(先祖)이신 금계(錦溪) 선생(先生)께서 처음으로 널리 보첩(譜牒)을 |
+ | 수집(蒐集)하여 초보(草譜)를 만들었고, | ||
+ | 근자에 와서는 또 나의 종증조(從曾祖) 처정(處正) 어른의 수록(收錄)과 삼종숙(三從叔) 상종(尙鍾) 어른이 수사(手寫)한 기록은 | ||
+ | 물론(勿論)이고 사실(史實)을 증명(證明)할만한 증거(證據)를 널리 수집(蒐集)하여 완전(完全)한 보책(譜冊)을 이룩했으나 그를 | ||
+ | 간행(刊行)치 못하고 있던 중(中), 장단(長湍)에 사는 일가 사람 섭(燮)이라는 분과 황씨(黃氏)의 외손(外孫)이 되는 | ||
+ | 김여강(金汝綱)이 합의(合議)하여 양무공파보(襄武公派譜) 1권(一卷)을 인쇄(印刷)하여 가지고 천리(千里)를 멀다 않고 이 사람을 | ||
+ | 찾아와 그 보책(譜冊)을 제시(提示)했었다. 그 성의(誠意)와 노고(勞苦)는 참으로 대단했으나 그 기록(記錄)한 내용(內容)을 보니 | ||
+ | 파계(派系)와 순서(順序)가 그릇된 것이 적지 않기에 이것을 | ||
+ | 바로 잡기 위한 고증자료(考證資料)를 수집(蒐集)하느라고 2(二)년이나 걸렸고, | ||
+ | 보소(譜所)를 풍기(豊基)의 금양(錦陽)으로 옮긴 | ||
+ | 다음해 가을에 섭(燮)이 상복(喪服)을 입은 | ||
+ | 채로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넘어 풍기(豊基)로 찾아와서 일가 되는 일(鎰)에게 그 보사(譜事)를 맡겨 주간(主幹)케 하고 | ||
+ | 각(各) 유사(有司)를 정(定)하여 각(各) 지방(地方) 각(各) 파계(派系)의 수단(收單)을 모아 들이게 하였다. 그 후(後) 6년(六年)이 지난 경인년(庚寅年) | ||
+ | 맹춘(孟春)에 보책(譜冊)을 인쇄(印刷)에 붙이니 비로소 보사(譜事)가 이루어진 것이다. 참으로 종중(宗中)의 경사(慶事)이며 다행(多幸)이 | ||
+ | 아닐 수 없다.\\ | ||
+ | \_석일(昔日)(=지난 날)에 해월(海月) 선생(先生)이 초보(草譜)를 만드실 때 평리공(評理公)이 금오공(金吾公)의 후손(後孫)이 되는 줄을 미처 알지 못하고 | ||
+ | 그 서문(序文)에 ' | ||
+ | 탄식(歎息)한 것이나, 지난번 장단(長湍)에서 보책(譜冊)이 신성(新成)되었으되 | ||
+ | 이 또한 대광공(大匡公)의 윤서(倫序)를 불찰(不察)하여 당시 박식(博識)하고 뜻있는 선비들이 그 위차(位次)와 세계(世系)에 의심(疑心)을 | ||
+ | 품고 말해 왔었는데, | ||
+ | 후(後)가 되고 대광공(大匡公)이 평리공(評理公)의 제(弟)가 되는 것이다. 이로서 3파(三派) 서차(序次)와 소목항렬(昭穆行列)의 질서(秩序)가 | ||
+ | 분명(分明)해졌으니 후세(後世) 자손(子孫)들의 유감이 없게 되었다. 이야말로 종중(宗中)의 다행(多幸)이 아닐 수 없다.\\ | ||
+ | |||
+ | \_기타(其他) 부록(附錄)에 있는 제파(諸派)는 장적(帳籍)에 근거(根據)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旣往)의 구보(舊譜)에 빠진 것을 구태여 | ||
+ | 금번(今番)에 편입(編入)할 수 없기로 이는 | ||
+ | 후일(後日)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 ||
+ | |||
+ | \_보사(譜事)가 다 이루어짐에 제종(諸宗)들이 윤구(潤九)가 금계공(錦溪公)의 종손(宗孫)이며 또 보사(譜事)에 참여(參輿)하여 시종(始終)을 | ||
+ | 들은 바 있으리라 하여 몇줄의 서문(序文)을 쓰라하니, | ||
+ | 사퇴(辭退)할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오호(嗚呼)라 우리 황씨(黃氏)의 유서(由緖)가 오랜 역사(歷史)를 가진 | ||
+ | 종족(宗族)으로서 보책(譜冊) 중에 실려있는 선조(先祖)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훈업(勳業)과 공덕(功德)이 뛰어나 | ||
+ | 세인(世人)의 칭송(稱頌)이 자자하니 종족(宗族) | ||
+ | 후손(後孫)들은 이를 본 떠 따라야 할 것이다. 범아(凡我) 제종(諸宗)과 후사(後嗣)들은 보첩(譜牒)을 봄에 있어서 | ||
+ | 마땅히 서로 면려(勉勵)하여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 ||
+ | 보첩(譜牒)을 완성(完成)한 동종(同宗)들의 힘쓴 공덕(功德)에 보답하는 길일 것이니 각자 노력하기 바란다. | ||
+ | 그리고 보사(譜事) 진행(進行)과 경비(經費)의 다과(多寡) 등에 대하여는 나의 아우가 기록한 바를 권말(卷末)에 첨부하였으니 | ||
+ | 다시 부언(附言)치 않겠다.\\ | ||
+ | \_\_영조(上之) 46년(四十六年) 경인(庚寅)(=1770) 맹춘(孟春) 후예손(後裔孫) 윤구(潤九) 경서(敬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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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12.1746870766.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0 18:5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