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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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14 [2025/05/12 10:24] – 121.166.63.129 | c3-014 [2025/05/18 18:03] (현재) – 121.166.63.1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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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생민(生民)의 소중(所重)함은 성씨(姓氏)를 표시하고 종족(宗族)이 사는 곳을 연결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 | \_생민(生民)의 소중(所重)함은 성씨(姓氏)를 표시하고 종족(宗族)이 사는 곳을 연결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 | ||
없을 것이다. 성(姓)이라는 것은 조종(祖宗)으로부터 | 없을 것이다. 성(姓)이라는 것은 조종(祖宗)으로부터 | ||
- | 이어 받은 것이고 씨(氏)라는 것은 자손(子孫)들이 분파(分派)한데에 말미암은 바로서 그 벌족(閥族)이 사는 | + | 이어 받은 것이고 씨(氏)라는 것은 자손(子孫)들이 분파(分派)한데에 말미암은 바로서, 그 벌족(閥族)이 사는 |
지방(地方)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 지방(地方)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 ||
\_사족가문(士族家門)에서 수보(修譜)하는 일을 귀(貴)히 여기는 까닭은 그 가문(家門)의 계통(系統)과 내력(來歷)을 밝히고 | \_사족가문(士族家門)에서 수보(修譜)하는 일을 귀(貴)히 여기는 까닭은 그 가문(家門)의 계통(系統)과 내력(來歷)을 밝히고 | ||
친애(親愛)의 정(情)을 유구(悠久)히 이어가게 함에 있는 | 친애(親愛)의 정(情)을 유구(悠久)히 이어가게 함에 있는 | ||
- | 것이다. 성주지제(成周之制)를 보면 사상(司商)을 두어 수성(受姓)을 관장(管掌)케 하고 소사(小吏)을 두어 계세(繫世)를 다루게 하였는데 | + | 것이다. 성주지제(成周之制)를 보면 사상(司商)을 두어 수성(受姓)을 관장(管掌)케 하고 소리(小吏)을 두어 계세(繫世)를 다루게 하였는데, |
씨성(氏性)과 세족(世族)이 방국지치(邦國之治)에 | 씨성(氏性)과 세족(世族)이 방국지치(邦國之治)에 | ||
무슨 관계가 있었기로 나라에서 이처럼 직제(職制)를 만들고 관원(官員)까지 두어 이를 담당케 하였을까? | 무슨 관계가 있었기로 나라에서 이처럼 직제(職制)를 만들고 관원(官員)까지 두어 이를 담당케 하였을까? | ||
이것은 오직 일인(一人)의 덕화(德化)를 | 이것은 오직 일인(一人)의 덕화(德化)를 | ||
- | 일가(一家)에 추진(推進)하여 가(家)에서 족(族)으로 족(族)에서 국(國)으로 국(國)에서 천하(天下)를 화성(化成)하는 즉 덕화정치(德化政治)를 | + | 일가(一家)에 추진(推進)하여, 가(家)에서 족(族)으로 족(族)에서 국(國)으로 국(國)에서 천하(天下)를 화성(化成)하는 즉 덕화정치(德化政治)를 |
이룩하려던 것이다. 씨족(氏族)이 성왕(聖王)의 | 이룩하려던 것이다. 씨족(氏族)이 성왕(聖王)의 | ||
정사(政事)에 이처럼 비중(比重)이 클진데 어찌 일인(一人) 일가(一家) 씨족(氏族)의 사사(私事)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정사(政事)에 이처럼 비중(比重)이 클진데 어찌 일인(一人) 일가(一家) 씨족(氏族)의 사사(私事)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
\_옛날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같은 한(漢)나라 때의 사가(史家)들이 세기(世紀)를 서술(敍述)하되 중려(重黎)로부터서 | \_옛날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같은 한(漢)나라 때의 사가(史家)들이 세기(世紀)를 서술(敍述)하되 중려(重黎)로부터서 | ||
- | 전욱(顓頊)에 이르기까지 황제(黃帝)의 손(孫)이라 했고 중국(中國)의 황성(黃姓)이 모두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후손(後孫)이라 했으니 | + | 전욱(顓頊)에 이르기까지 황제(黃帝)의 손(孫)이라 했고, 중국(中國)의 황성(黃姓)이 모두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후손(後孫)이라 했으니, |
우리 황씨(黃氏)의 선대(先代) 또한 중국인(中國人)일진데 황제(黃帝)의 후예(後裔)가 아니겠는가. 한(漢)나라 건무(建武) 연대(年代)에 | 우리 황씨(黃氏)의 선대(先代) 또한 중국인(中國人)일진데 황제(黃帝)의 후예(後裔)가 아니겠는가. 한(漢)나라 건무(建武) 연대(年代)에 | ||
- | 휘(諱)를 낙(洛)이라고 하는 어른이 동방(東方)의 평해(平海) 월송(越松)에 사시다가 후(後)에 3형제(三兄弟)를 두셨는데 | + | 휘(諱)를 낙(洛)이라고 하는 어른이 동방(東方)의 평해(平海) 월송(越松)에 사시다가, 후(後)에 3형제(三兄弟)를 두셨는데 |
각각 봉작(封爵)을 얻어 관향(貫鄕)을 | 각각 봉작(封爵)을 얻어 관향(貫鄕)을 | ||
- | 분정(分定)함에 따라 기성(箕城) 장수(長水) 창원(昌原)으로 갈리게 되어 동근(同根)의 의(誼)가 드디어 없어졌으니 | + | 분정(分定)함에 따라 기성(箕城) 장수(長水) 창원(昌原)으로 갈리게 되어 동근(同根)의 의(誼)가 드디어 없어졌으니, |
소씨(蘇氏) 즉 소식(蘇軾)의 보인(譜引)에 왈(曰) 처음 1인(一人)의 몸이 | 소씨(蘇氏) 즉 소식(蘇軾)의 보인(譜引)에 왈(曰) 처음 1인(一人)의 몸이 | ||
가지를 쳐서 마침내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 무관심하게 되어버렸다 하였으니, | 가지를 쳐서 마침내 길가는 사람처럼 서로 무관심하게 되어버렸다 하였으니, | ||
줄 31: | 줄 31: | ||
\_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의 계보(系譜)와 전적(典籍)이 병화(兵火)를 겪는 가운데 타고 흩어져 보존(保存)된 기록(記錄)이 | \_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의 계보(系譜)와 전적(典籍)이 병화(兵火)를 겪는 가운데 타고 흩어져 보존(保存)된 기록(記錄)이 | ||
근소(僅小)하더니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兩先生)께서 제가(諸家) 유적(遺籍)을 널리 수집(蒐集)하고 상고(詳考)하셔서 빠진 | 근소(僅小)하더니 금계(錦溪) 해월(海月) 양선생(兩先生)께서 제가(諸家) 유적(遺籍)을 널리 수집(蒐集)하고 상고(詳考)하셔서 빠진 | ||
- | 가계(家系)와 문적(文籍)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초보(草譜)를 만드셨으니 그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고 종족(宗族)을 | + | 가계(家系)와 문적(文籍)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초보(草譜)를 만드셨으니 그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고 종족(宗族)을 |
- | 수합(收合)한 의의(意義)가 자못 전인(前人)의 발상(發想)치 못한 것을 이루었다 하겠으나 그 중(中)에는 상심(詳審)치 못한 데가 | + | 수합(收合)한 의의(意義)가 자못 전인(前人)의 발상(發想)치 못한 것을 이루었다 하겠으나, 그 중(中)에는 상심(詳審)치 못한 데가 |
없지 않아 후인(後人)들이 모르던 것들을 튀겨내어 문자간(文字間)에 나타난 것을 추가(追加)로 모아 | 없지 않아 후인(後人)들이 모르던 것들을 튀겨내어 문자간(文字間)에 나타난 것을 추가(追加)로 모아 | ||
- | 믿을만한 것은 추리고 의심(疑心)나는 것은 버려서 더욱 신중(慎重)하게 심찰(心察)하여 경인년(庚寅年)에 이르러 | + | 믿을만한 것은 추리고 의심(疑心)나는 것은 버려서 더욱 신중(愼重)하게 심찰(心察)하여 경인년(庚寅年)에 이르러 |
인판(印版)에 붙여 비로소 기성(箕城) 세보(世譜)가 성취(成就)케 되었던 것이다.\\ | 인판(印版)에 붙여 비로소 기성(箕城) 세보(世譜)가 성취(成就)케 되었던 것이다.\\ | ||
\_이렇게 처음 보사(譜事)가 이루어짐에 기호(畿湖) 종인(宗人)들은 모두 대광공파(大匡公派) 후손(後孫)들과 한가지로 | \_이렇게 처음 보사(譜事)가 이루어짐에 기호(畿湖) 종인(宗人)들은 모두 대광공파(大匡公派) 후손(後孫)들과 한가지로 | ||
- | 동보(同譜)하기로 하고 또 수춘(壽春) 흥성(興城)의 동종(同宗)들도 모두 양무공(襄武公) 제2자(第二子)의 후예(後裔)로서 가보(家譜)를 | + | 동보(同譜)하기로 하고 또 수춘(壽春)((수춘(壽春): |
- | 함께하기로 하여 이론(異論)이 없었더니 근일(近日)에 익찬(翊贊) 종씨(宗氏) 윤석(胤錫)이 한낫 묘(墓)의 지석(誌石)을 | + | 흥성(興城)의 동종(同宗)들도 모두 양무공(襄武公) 제2자(第二子)의 후예(後裔)로서 가보(家譜)를 |
- | 자가(自家) 흥성(興城) 묘소(墓所)에서 발굴하고 14세조(十四世祖)의 휘(諱)와 관호(官號)의 의문을 일으키고 드디어 따로이 | + | 함께 하기로 하여 이론(異論)이 없었더니, 근일(近日)에 익찬(翊贊) 종씨(宗氏) 윤석(胤錫)이 한낫 묘(墓)의 지석(誌石)을 |
- | 그를 기재(記載)하여 구불입적(俱不入譜) 즉 이번 보첩(譜牒)에 들어가는 것을 원(願)치 않으며 또 묘갈(墓碣)이 비록 믿을만하나 | + | 자가(自家) 흥성(興城) 묘소(墓所)에서 발굴하고, 14세조(十四世祖)의 휘(諱)와 관호(官號)의 의문을 일으키고, 드디어 따로이 |
+ | 그를 기재(記載)하여 구불입적(俱不入譜) 즉 이번 보첩(譜牒)에 들어가는 것을 원(願)치 않으며, 또 묘갈(墓碣)이 비록 믿을만하나 | ||
당위(當位)의 지석(誌石)이 이미 보존(保存)되어 있어 파멸될 염려도 없는 것인데 선대(先代)로부터 전(傳)해오는 | 당위(當位)의 지석(誌石)이 이미 보존(保存)되어 있어 파멸될 염려도 없는 것인데 선대(先代)로부터 전(傳)해오는 | ||
보첩(譜牒)을 버리고 후세(後世)에 의심을 낳는 물의(物議)를 좇는다는 것은 너무 경솔(輕率)하다는 조롱이 없을는지? | 보첩(譜牒)을 버리고 후세(後世)에 의심을 낳는 물의(物議)를 좇는다는 것은 너무 경솔(輕率)하다는 조롱이 없을는지? | ||
줄 54: | 줄 55: | ||
어찌 크게 상심되고 탄식(歎息)할 일이 아니겠는가? | 어찌 크게 상심되고 탄식(歎息)할 일이 아니겠는가? | ||
- | \_가만히 생각해보니 구보(舊譜)가 간행(刊行)된지 벌써 1주갑(一周甲)이 넘었으니 그때 일을 아는 사람은 | + | \_가만히 생각해보니 구보(舊譜)가 간행(刊行)된지 벌써 1주갑(一周甲)이 넘었으니, 그때 일을 아는 사람은 |
- | 살아있는 이가 몇 분 없고 그 후(後) 새로 출생(出生)한 사람들은 나날이 번성(繁盛)해 가니 이 보계(譜系)를 | + | 살아있는 이가 몇 분 없고 그 후(後) 새로 출생(出生)한 사람들은 나날이 번성(繁盛)해 가니, 이 보계(譜系)를 |
넓히고 전(傳)하기를 오래하도록 후인(後人)에게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도(燾)는 외람함을 | 넓히고 전(傳)하기를 오래하도록 후인(後人)에게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도(燾)는 외람함을 | ||
- | 헤아리지 않고 일찍이 병술년(丙戌年)에 글을 보내서 통고(通告)하고 첨종(僉宗)들과 의논하며 계획하니 | + | 헤아리지 않고 일찍이 병술년(丙戌年)에 글을 보내서 통고(通告)하고 첨종(僉宗)들과 의논하며 계획하니, |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뜻을 같이하는 종인(宗人) 평해(平海)의 규(奎)·관(琯), | 을축년(乙丑年) 겨울에 뜻을 같이하는 종인(宗人) 평해(平海)의 규(奎)·관(琯), | ||
춘천(春川)의 묵(默)·경(炅), | 춘천(春川)의 묵(默)·경(炅), | ||
줄 66: | 줄 67: | ||
\_오호(嗚呼)라! 경인지보(庚寅之譜)는 실로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분 선생(先生)의 노심(勞心)과 정구(精究)에서 | \_오호(嗚呼)라! 경인지보(庚寅之譜)는 실로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분 선생(先生)의 노심(勞心)과 정구(精究)에서 | ||
비롯되어 양읍(兩邑) 제종(諸宗)의 협력(協力)과 합작으로 이룩된 것인 즉 | 비롯되어 양읍(兩邑) 제종(諸宗)의 협력(協力)과 합작으로 이룩된 것인 즉 | ||
- |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욕되게 아니하기 위해서 차보(此譜)에 들어오는 것이 마땅할 것이어늘 | + |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욕되게 아니하기 위해서 차보(此譜)에 들어오는 것이 마땅할 것이어늘, |
- | 풍기(豊基) 종소(宗所)에서는 시초(始初)에는 한가지로 논의(論議)하다가 나중에 | + | 풍기(豊基) 종소(宗所)에서는 시초(始初)에는 한가지로 논의(論議)하다가 나중에 |
- | 물러가버리니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과연(果然) 편할 것인지? | + | 물러가 버리니,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과연(果然) 편할 것인지? |
- |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다시금 만약(萬若) 의론(議論)이 갈라졌다 하여 이미 전보(前譜) 중(中)에 | + |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다시금 만약(萬若) 의논(議論)이 갈라졌다 하여 이미 전보(前譜) 중(中)에 |
- | 실려있는 것을 빼내 버린다면 정의(情誼)로 헤아려 볼 때 차마 못할 일이므로 | + | 실려있는 것을 빼내 버린다면 정의(情誼)로 헤아려 볼 때 차마 못할 일이므로, |
구보(舊譜)에 따라 인쇄(印刷)에 붙이기로 하는 것이니 나머지는 뒷사람들의 책임(責任)에 | 구보(舊譜)에 따라 인쇄(印刷)에 붙이기로 하는 것이니 나머지는 뒷사람들의 책임(責任)에 | ||
맡기겠다. 그리고 생각컨데 후의(厚意)를 존수(存守)하는 일단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 맡기겠다. 그리고 생각컨데 후의(厚意)를 존수(存守)하는 일단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 ||
- | 스스로 믿는 바이기는 하나 양종(兩宗)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 | 스스로 믿는 바이기는 하나, 양종(兩宗)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_고인(古人)이 말하기를, | \_고인(古人)이 말하기를, | ||
줄 88: | 줄 89: | ||
\_보책(譜冊)의 원고(原稿)를 인판(印版)에 붙이려고 윗사람들에게 보고(報告)를 할 때 종인(宗人)이 | \_보책(譜冊)의 원고(原稿)를 인판(印版)에 붙이려고 윗사람들에게 보고(報告)를 할 때 종인(宗人)이 | ||
나에게 서문(序文) 짓는 것을 위촉함으로 이를 사피(辭避)치 못하여 | 나에게 서문(序文) 짓는 것을 위촉함으로 이를 사피(辭避)치 못하여 | ||
- | 신보(新譜) 속간(績刊)의 전말(顛末)을 약술(略述)하여 구서(舊序) 아래에 붙이는 바이다.\\ | + | 신보(新譜) 속간(績刊)의 전말(顚末)을 약술(略述)하여 구서(舊序) 아래에 붙이는 바이다.\\ |
\_\_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4(四) 신묘(辛卯) 임월(臨月) 하한(下瀚) 예손(裔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官) 수찬관(修撰官) 도(燾) 근지(謹識) | \_\_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4(四) 신묘(辛卯) 임월(臨月) 하한(下瀚) 예손(裔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官) 수찬관(修撰官) 도(燾) 근지(謹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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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14.1747013098.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2 10:24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