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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2025/05/13 07:53] ssio2c3-039 [2025/06/04 21:03]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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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錦溪先生行狀**\\ \_**錦溪先生行狀**\\
-\_星州牧使 黃公의 諱는 俊良이요 字는 仲擧며 平海人이니 高麗 때에 侍中을 지낸 +\_성주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는 준량(俊良)이요  
-諱 裕中이라는 분은 그의 먼 祖上이다. 諱 裕中의 孫되는 諱 瑾이라하는 분은 +자()는 중거(仲擧)며 평해인(平海人)이니, 고려(高麗때에 시중(侍中)을 지낸 
-高麗 恭愍王 朝廷에서 左獻納이 되어 正言 金續命과 함께 上疏를 하여 地震에 關한 +휘() 유중(裕中)이라는 분은 그의 먼 조상(祖上)이다. 휘() 유중(裕中)의 손()되는 휘() 근()이라 하는 분은 
-變에 極論을 펴다 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沃川으로 귀양갔었고 나중에 풀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조정(朝廷)에서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벼슬이 寶文閣 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諱 有定을 낳으니 李朝 初葉에 벼슬을 하여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김속명(金續命): 고려 시대의 문신(?~1386). 감찰집의, 삼사우사로 있으면서 권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데 힘써 주위의 미움을 받던 중, 반야(般若)의 사건에 실언하여 불경죄로 문의현(文義縣)에 귀양 가서 죽었다.))과 함께 상소(上疏)를 하여 지진(地震)에 관()한 
-工曹典書가 되었으며 生員 諱 을 낳았고 이가 곧 公의 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변()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나중에 풀려 
-典書로부터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現 榮州에서 寓居하였더니 生員 이 또다시 豊基로 옮겨 드디어 豊基 사람이 되었다.\\+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 정(鋋)을 낳았고 이가 곧 공()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전서(典書)로부터 
 +현()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연(鋋)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사람이 되었다.\\
  
-\_公의 曾祖의 諱 末孫은 司醞署 主簿요, 祖의 諱는 孝童이요, 考의 諱는 치(觶)이니  +\_공()의 증조(曾祖)의 휘()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의 휘()는 효동(孝童)이요, 고()의 휘()는 치(觶)이니  
-모두 隱德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비는 昌原 +모두 은덕(隱德)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妣)는  
-黃氏니 敎授 漢弼의 女다. 正德 丁丑 七月에 公을 낳으셨다. 公이 어릴 때부터 卓異한 +창원황씨(昌原黃氏)니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여()다. 정덕(正德) 정축(丁丑) 7월(七月)에 공()을 낳으셨다. 공()이 어릴 때부터 탁이(卓異)한 
-才質로 일찌기 文字를 解得하고 말을 하면 곧 사람들을 놀라게 함으로 모두 奇童이라 +재질(才質)로 일찍이 문자(文字)를 해득(解得)하고 말을 하면 곧 사람들을 놀라게 함으로 모두 기동(奇童)이라 
-稱하더니 나이 十八歲에 嶺南의 鄕試에 나아가니 考試官이 公의 策文(政治에 +칭()하더니 나이 18세(十八歲)에 영남(嶺南)의 향시(鄕試)에 나아가니 고시관(考試官)이 공()의 책문(策文)(정치(政治)에 
-關한 答案書)을 보고 句節마다 무릎을 치며 가상히 여겨 稱讚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관()한 답안서(答案書))을 보고 구절(句節)마다 무릎을 치며 가상히 여겨 칭찬(稱讚)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公의 文學은 벌써 名聲이 자자하였다. +공()의 문학(文學)은 벌써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다. 
-그 後로 科擧 때 마다 恒常 앞줄에 있어 丁酉年에 生員에 合格하고 己亥年 庭試에서 +그 후()로 과거(科擧때 마다 항상(恒常앞줄에 있어 정유년(丁酉年)에 생원(生員)에 합격(合格)하고 기해년(己亥年) 정시(庭試)에서 
-會試에 달리어 庚子年에는 乙科에 第二人으로 及第하여 權知 成均館 學諭로 星州 訓導에 +회시(會試)에 달리어, 경자년(庚子年)에는 을과(乙科)에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及第)하여 권지(權知)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로 성주(星州) 훈도(訓導)에 
-選任되었다가 壬寅年에는 學諭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선임(選任)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에는 학유(學諭)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癸卯年에는 學錄 兼 養賢庫 奉事로 昇格되어 甲辰年에 다시 學正에 昇進되고  +그리고 계묘년(癸卯年)에는 학록(學錄) 겸() 양현고(養賢庫) 봉사(奉事)로 승격(昇格)되어 갑진년(甲辰年)에 다시 학정(學正)에 승진(昇進)되고 
-乙巳年에 承文院 殿考로서 다시 外職으로 나와 尙州 +을사년(乙巳年)에 승문원(承文院) 전고(殿考)로서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와 상주(尙州) 
-敎官이 되었다가 丁未年 가을에 內職으로 도로 들어와서 博士가 되고 그해 겨울에 典籍으로  +교관(敎官)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가을에 내직(內職)으로 도로 들어와서 박사(博士)가 되고 그해 겨울에 전적(典籍)으로  
-昇格되고 이듬해에 工曹佐으로서 外艱喪을 당하여 服을 마치고 典籍으로부터 +승격(昇格)되고이듬해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서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 전적(典籍)으로부터 
-戶曹佐으로 옮겨 春秋官 記事官을 兼하여 中宗 仁宗의 兩朝 實錄을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 춘추관(春秋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여 중종(中宗) 인종(仁宗)의 양조(兩朝) 실록(實錄)을 
-닦는데 參與하더니 겨울에 兵曹佐郞으로 轉職되어 闢佛疏를 올렸으며 辛亥年 二月에 王命으로 +닦는데 참여(參與)하더니겨울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轉職)되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으며, 신해년(辛亥年) 2월(二月)에 왕명(王命)으로 
-慶尙道 監軍御史가 되었다가 다시 承文院 檢校로 바꾸어 差帙되고 六月에 抽栍御史가 +경상도(慶尙道)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되었다가 다시 승문원(承文院) 검교(檢校)로 바꾸어 차질(差帙)되고, 6월(六月)에 추생어사(抽栍御史)가 
-되었다가 七月에 禮曹佐으로 옮겼더니 이에 나가지 않으매 九月에 司憲府 持平을 +되었다가 7월(七月)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더니 이에 나가지 않으매, 9월(九月)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내려 주었다. 그때 韓姓을 가진 사람이 司憲府에 있어 몹시 公을 求한 바 있었으나 +내려 주었다. 그때 한()성()을 가진 사람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어 몹시 공()을 구()한 바 있었으나 
-公이 應하지 않으니 그 府에서 많은 論議를 하였어도 드디어 親乞 즉 어버이 奉養 때문에 +공()이 응()하지 않으니그 부()에서 많은 논의(論議)를 하였어도 드디어 친걸(親乞즉 어버이 봉양(奉養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굳이 사양하니 外職으로 新寧 縣監을 시키는지라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굳이 사양하니, 외직(外職)으로 신녕(新寧) 현감(縣監)을 시키는지라 
-丙辰年 겨울에 病으로 印綬를 풀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듬해 가을에 朝廷에서 +병진년(丙辰年겨울에 병()으로 인수(印綬)를 풀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듬해 가을에 조정(朝廷)에서 
-丹陽郡이 몹시 피폐함을 알고 특히 公을 이를 治諭하는 任에 뽑아 丹陽郡守를 +단양군(丹陽郡)이 몹시 피폐함을 알고 특히 공()을 이를 치유(治諭)하는 임()에 뽑아 단양군수(丹陽郡守)를 
-除授하거늘 家率을 거느리고 赴任하여 三年을 勤務하고 滿期가 되어  +제수(除授)하거늘,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여 3년(三年)을 근무(勤務)하고 만기(滿期)가 되어  
-집에 돌아와 休養하더니 다시 兵曹 禮曹의 正으로 除授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집에 돌아와 휴양(休養)하더니다시 병조(兵曹) 예조(禮曹)의 정랑(郞)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庚申年 가을에 星州 特使를 내리니 년이 지난 癸亥年 봄에 身病을 얻어  +경신년(庚申年가을에 성주(星州) 목사(特使)를 내리니 4년이 지난 계해년(癸亥年봄에 신병(身病)을 얻어  
-辭職하고 돌아오는 도중 病勢 더욱 甚하여 월 십일일에 醴泉地境에 다다르자  +사직(辭職)하고 돌아오는 도중, 병세(病勢더욱 심()하여 3월 11일에 예천(醴泉) 지경(地境)에 다다르자  
-드디어 卒하니 享年이 不過 사십칠더라. 公의 사람됨이 潁秀不凡하여  +드디어 졸()하니 향년(享年)이 불과(不過) 47세더라. \\
-明敏한 風標가 있으며 眉目이 그림같이 秀麗하고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들으면  +
-열가지를 理解하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고을살이에서 다스린  +
-자취를 살펴보면 그 職務 遂行에 조금도 비겁하지 않고 將來 參考할 수 있고  +
-또 模範된 歷史의 文案을 整備하는데 힘쓰며 어떻게 하면 百姓이 굶주리지 않고  +
-헐벗지 않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하는 民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
-그가 新寧에 있을 때 凶年을 +
-만나 百姓이 굶주림을 보고 스스로 굶주림을 당함과 같이 여겨 賑恤로서 百姓이 되살게하여  +
-縣民들의 稱頌이 자자하였다. +
-또 前任者 때에 百姓이 내지 못한 稅金은 公이 實情을 調査하여 알맞도록 或 免除하고  +
-或 줄이고 或 메워서 數를 充當하고 文卷을 廢棄하는 等의 適切한 處理를 하였다.  +
-그리고 恒常 百姓 敎育에 뜻을 두어 文廟를 増築 또는 新築하는데 힘써 勸導를  +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古縣에 學舍 一棟을 새로 세워 白鶴書院이라 懸板을 걸고  +
-書籍을 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地方으로 欽慕케 하려고 努力하였다.  +
-또 地方을 巡視할 때 수레에서 내려 民情을 살피니 課稅가 심하여 百姓이 살 수 없어  +
-移散하고 남긴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있고 殘留한 百姓들은 食糧이 없어 굶주려  +
-늘어져 누워있는 것을 直接보고 慨然히 말하기를 나라는 百姓이 根本이 되는 것인데  +
-官弊로 百姓이 못 살아서야 될 말이냐하며 實情과 積弊를 昭詳하고 +
-눈물겹게 上疏하니 그 極言한 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_이 上疏에 對한 임금의 내리신 判批의 推獎한 말씀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_공(公)의 사람됨이 영수불범(潁秀不凡)하여  
-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니  +명민(明敏)한 풍표(風標)가 있으며, 미목(眉目)이 그림같이 수려(秀麗)하고,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들으면  
-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特命으로 租稅를 免除함이 십년을 限定한 條目이  +열가지를 이해(理解)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고을((고을살이: 고을의 수령(守令)로 지는 생활.))에서 다스린  
-무려 십여 條에 達하였으니 公의 유창한 文章과 精誠이 느님을 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자취를 살펴보면 그 직무(職務) 수행(遂行)에 조금도 비겁지 않고 장래(將來) 참고(參考)할 수 있고  
-어찌 前日에 없는 바의 恩典이 내려을 것이겠는로 말미암아 +또 모범(模範)된 역사(歷史)의 문안(文案)을 정비(整備)하는데 힘쓰며, 어떻게 하면 백성(百姓)이 굶주리지 않고  
-流離逃亡였던 丹陽 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才舞足蹈하는 歡喜를 가졌다 .\\+헐벗지 않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하는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그가 신녕(新寧)에 있을 때 흉년(凶年)을 
 +만나 백성(百姓)이 굶주림을 보고, 스스로 굶주림을 당과 같이 여겨 진휼(賑恤)로서 백성(百姓)이 되살게하여,  
 +현민(縣民)들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廟)를 증축(增築) 또는 신축(新築)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또 지방(地方)을 순시(巡視)할 때 수레서 내려 민정(民情)을 살피니, 과세(課稅)가 심하여 백성(百姓)이 살 수 없어  
 +이산(移散)고 남긴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있고, 잔류(殘留)한 백성(百姓)들은 식량(食糧)이 없어 굶주려  
 +늘어져 누워있는 것을 직접(直接)보, 개연(慨然)히 말기를 나라는 백성(百姓)이 근본(根本)이 되는 것인데  
 +관폐(官弊)로 백성(百姓)이 못 살아서야 될 말이냐 하며, 실정(實情)과 적폐(積弊)를 소상(昭詳)하고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_또 鄉校가 山개골 물가에 있어 往往 洪水로 沈沒될 憂慮가 있으므로  +\_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 임금을 사랑고 나라를 사랑고  
-이 命하여 郡治의 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位置와 壯嚴한 모습이 地方을 넉넉히 敎化시켜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風化는 殿堂으로 삼는데 充分케 였다. 또 郡이 낳은 儒賢과 禹祭酒卓의 經學 忠節은 +심(甚)히 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모두 세상의 師表가 될 만함으로 文廟 西쪽에 別途로 한 간집을 짓고 年年 祭祀를 올리게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하였으니 眞實로 公의 敎化 治民하는 는 大政治家도 치지 못할 바 있다 하다.\\+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가? 이로 말암아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_더욱이 星州 고을은 다스리기 렵다는 말이 는데 은 오히려 런 곳이  +\_또 향교(鄕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으므로  
-마음에 맞다 하였다. 지난날 新寧 丹陽 두 고을에 學業을 일구고 敎化治民하던  +공()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일만 보더라도 이 治키 어렵는 星州에서야 더욱 깊고 至極게 努力을 기울였을 것은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明若觀火한 일이 아니는가?\\+두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함으로 문묘(文廟) 서(西)쪽에 별도(別途)로 한 간 집을 고 연년(年年) 제사(祭祀)를 올리게  
 +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공(公)의 교화(敎化) 치민(治民)는 (道)는 대정치가(大治家)도 미치지 못할 바 있다 하겠다.\\
  
-\_前日에 盧牧使 慶麟이 迎鳳書院을 碧珍 옛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公이 이것을 +\_더욱이 성주(星州) 고은 다스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공()은 오히려 런 곳이  
-規模를 넓히고 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文廟를 重修하여 敎化의 殿堂답게 +마음에 맞는다 하였다. 지난날 신녕(新寧) 단양(丹陽) 두 고에 학업(學業)을 일구고 교화치민(化治民)던  
-規模를 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吳斯文建이 星州敎官으로 赴任할새 서로 뜻이 +일만 보더라도 이 치정(治政)키 어렵다는 성(星州)에서야 더욱 깊고 지극(至極)하게 노력(努力)을 기울였을 것은 
-같으므로 議論을 모아 弟子 몇사람을 가려 四等級으로 나누고 官으로 여금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가?\\
-責任을 맡겨 毎月 한차례씩 모여 講을 하되 檢督하고 試驗하며 理解키 困難한 台文은 풀어주고  +
-그 成績에 따라 賞罰을 주니 星州 一郡의 敎化가 크게 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
-또 星州 東쪽에 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儒生들이 書堂짖를 願함으로  +
-곧 公이 즐겨 이를 協力하며 세우고 孔谷書堂이라 扁額하여 주었다. 또 八宮縣(지금  +
-칠곡군 기천면 창평동)에 鹿峰精舍를 세워 多方面으로 訓迪하되 그 +
-資質에 따라 크게 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輩出되었다.\\+
  
-\_일찍이 公의 故鄉인 豊基郡守로 就任한 商山 周侯 世鵬과는 後進이 되 +\_(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 ~ 1568년(선조 1). 본관은 곡산(谷).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노적(盧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임중(任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郞官)을 역임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벼슬아치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되었다.))이  
-信書로 往復할제 그 뜻과 學問에 未及한 点을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 
-잘알면서도 繼續親交를 하는 中 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그러나 그가 前에 朝廷에 있을 때 +규모(規模)를 개척(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오사문건(吳斯文建)((사문(斯文): 1. ‘이 학문(學問), 이 도(道)’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도의(道義)나 문화(文化)를 이르는 말.\\ 2. ‘유학자(儒學者)’를 높여 이르는 말.))((오건(吳建):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오종은(吳從誾)의 증손으로, 할아버는 오식(吳軾)이,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이 성주(星州) 교관(敎官)으로 부임(赴任)할 새 서로 뜻이 
-오직 文辭로만 世上에 이이 았는데 公과 漸漸師友로 從遊하는 이에 性理淵源說을  +같으므로 의논(議論)을 모아 제자(弟子) 몇 사람을 가려 4등급(四等級)으로 나누고 오(吳)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고 비로소 學問이란 것은 알아 +책임(責任)을 맡겨, 매월(毎月) 한 차례씩 여 강(講)을 하되 검독(檢督)하고 시험(試驗)하며 이해(解)키 곤란(困難)한 태문(台文)은 풀주고  
-랑삼고 남에게 稱讚받는 으로 그치지 고 繼續 知行一致하데 있음을 깨닫고 +그 성적(成績)에 따라 상벌(賞罰)을 주니 성주(星州) 1군(一郡)의 교화(敎化)가 크게 진작(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此學에 뜻을 두어 心經思錄 等의 든 +또 성주(星州) 동(東)쪽에 공곡(孔谷)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유생(儒生)들이 당(書堂)짖기를 원(願)함으로  
-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感發하였다 하더니 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곧 공(公)이 즐겨 이를 협력(協力)며 세우고 공곡서당(孔谷書堂)라 편액(扁額)하여 주다. 또 팔궁현(八宮縣)(지금  
-學友로 서로 切磋琢磨는 도움이 었으니 그 敎化서 治民하는 이 더욱 힘차고 +칠곡군 기천면 창평동)에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워 다방면(多方面)으로 훈적(訓迪)하되 그 
-그 功이 더욱 깊었었다.\\+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이 배출(輩出)되었다.\\
  
-\_每樣의 餘暇에 吳敎授와 함께 冊床을 맞대고 講讀하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새우 +\_일찍이 공()의 고향(故鄕)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寢食을 잊고 熱心함으로 사람들이 過勞로 病날 것을 근심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武陵雜稿)≫가 있,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그러나 恒常 이에 對答이 讀書는 學問의 根本이 는 것고 음을 다스리는 氣運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 
-기르는 것인데 찌 讀로 因여 病이 날 理致가 가?\\+잘 알면서도 계속(繼續) 친교(親交)를 하는 중(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견식(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전(前)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오직 문사(文辭)로만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았데, 공(公)과 점점(漸漸) 사우(師友)로 종유(從遊)하는 사이에 성리연원설(性理淵源說)을  
 +듣고 비로소 학문(學問)란 것은 알아 
 +자랑삼고, 남에게 칭찬(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繼續) 지행일치(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차학(此學)에 뜻을 어 심경사록(心經思錄) 등(等)의 모든 
 +성리서(性理)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감발(感發)였다 하더니, 성주(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학우(學友)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 그 교화(敎化)로서 치민(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 
 +그 공(功)이 더욱 깊었었다.\\
  
-\_그 혹시 反對되는 것은 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居處하는 +\_매양(每樣) 공사(公事)의 (餘暇)에 오(吳) 교수(敎授)와 함께 책상(冊床)을 맞대고 강독(講讀)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우고 
-을 깨끗하고 조용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聖賢의 要訓을 四壁에 +침식(寢食)을 잊고 열심(熱心)함으로 사람이 과로(過勞)로 병()날 것을 근심여 말는 가 많았다. 
-써붙이고 스스로 보아 警誡하며 깨고 謹嚴하고 恭遜한 生活로 지내왔으나, +러나 항상(恒常) 이에 대답(對答)이 독서(讀)는 학문(問)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기운(氣運)을 
-그러나 매양 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官廳 일에 흔리어 깊은 이 되었음 +기르는 것인데찌 독서(讀書)로 인(因)여 병(病)이 날 이치(理致)가 있겠는가?\\
-깨닫고 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고 돌아와서 竹嶺 아래 錦溪 위에  +
-몸을 늙고져하여 미 그곳에 墓地를 占하고 數間의 집을 짓고 命名하기를 錦陽精舎라 지었다.  +
-리고 그곳에 를 하고 經을 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大抵篤好하는 뜻으로써 +
-靜養하는 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
-더 큰 것이있었을 것인데 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
-문득 病을 얻어 乘化하였으니 眞實로 可惜도다.\\+
  
-\_비록 러하나 公의 이름이 弘文館 養才에 選拔어 戊午年 봄에 公이 丹陽으로 +\_그 혹시 반대(反對)는 것은 명(命)일 것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거처(居處) 
-赴任한 을 보고 朝廷의 臣下들이 議論하고 狀啓로 公을 불러 文翰의 職位에 두려 +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4벽(四壁)에 
-周旋을 하였으나 同進者들과의 이 지 않아 아가는 것을 中止하였다. +써 붙고 스스로 보아 경계(警誡)하며 깨우치고 근엄(謹嚴)하고 공손(恭遜)한 생활(生活)로 내왔으, 
-그러로 朝廷 諸公들이 公의 가상한 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公인즉 그 能한 才操도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을 더하여 榮進의 名利를 汲汲히 取하려 하지않고 도리어 生覺을 달고 努力을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거듭하여 人生 一生에 求하지 못한 바를 며 凡人들이 맞보지 못한 바를 맛보아 +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墓地)를 점(占)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기를 금양정사(錦陽精舍)라 었다.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禍福이 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는 뜻으써 
-無我狀態에 潛入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다. 이러한 일은 人生이 죽은 後는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이지마는 그가 擇한 道가 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人生을 改造는데는 +더 큰 것이 있었을 것인데, 애석(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룩하지 한 채  
-바른 方法이요 또 이 道를 熱心히 嚮導함은 상할 노릇이다.\\+문득 병(病)을 얻어 승화(乘化)였으니 진실(眞實)로 석(可惜)하도다.\\
  
-\_또 公은 友愛篤實하여 좋은 物質은 먼저 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_비록 그러하나 공(公)의 이름이 홍문관(弘文館) 양재(養才)에 선발(選拔)되어 무오년(戊午年) 봄에 공(公)이 단양(丹陽)으로 
-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하였다. 鄕黨故舊에게는 窮한데 恤하고 急한데 救濟하되 +부임(赴任)한 것을 보고, 조정(朝廷)의 신하(臣下)들이 의논(議論)하고 장계(狀啓)로 공(公)을 불러 문한(文翰)의 직위(職位)에 두려하여 
-或 미치지 못할 때는 恒常 마음에 섭섭함을 禁치 못하였다.\\+주선(周旋)을 하였으나, 동진자(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중지(中止)하였다. 
 +그러므로 조정(朝廷) 제공(諸公)들이 공(公)의 가상한 식견(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공(公)인즉 그 능(能)한 재조(才操)에도  
 +뜻을 더하여 영진(榮進)의 명리(名利)를 급급(汲汲)히 취(取)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생각(生覺)을 달리하고 노력(努力)을  
 +거듭하여 인생(人生) 일생(一生)에 구(求)하지 못한 바를 구(求)하며 범인(凡人)들이 맛보지 못한 바를 맛보아,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화복(禍福)이 화복(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무아상태(無我狀態)에 잠입(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인생(人生)이 죽은 후(後)에는  
 +그만이지마는 그가 택(擇)한 도(道)가 희망(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人生)을 개조(改造)하는 데는 
 +바른 방법(方法)이요, 또 이 도(道)를 열심(熱心)히 향도(嚮導)함은 가상할 노릇이다.\\ 
 + 
 +\_또 공()은 우애독실(友愛篤實)하여 좋은 물질(物質)은 먼저 자당(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자매제질(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자기(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 하였다. 향당고우(鄕黨故舊)에게는 궁()한데 주휼(賙)하고 급()한데 구제(救濟)하되 
 +혹(미치지 못할 때는 항상(恒常마음에 섭섭함을 금()치 못하였다.\\
  
 \_그리고 그 몸이 죽는 날에 이르러서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남에게 베를 꾸어  \_그리고 그 몸이 죽는 날에 이르러서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남에게 베를 꾸어 
-감을 하였으며 옷이 棺을 채우지 못한 것을 +감을 하였으며 옷이 관()을 채우지 못한 것을 
-보고서 남들이 또 그 淸貧함과 嬌慢하고 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보고서 남들이 또 그 청빈(淸貧)함과 교만(嬌慢)하고 외식(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세상(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또 아름다운 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名山水가 +또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여행(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명산적수(名山)가 
-있으면 반드시 親友들과 함께 놀며 詩를 읊고 討論하며 或 몸을 빼처 홀로 徘徊嘯詠하고+있으면반드시 친우(親友)들과 함께 놀며 시()를 읊고 토론(討論)하며 혹(몸을 빼처 홀로 배회소영(徘徊嘯詠)하고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_丹陽의 島潭과 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主人되는 李隱士의 藩屛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_단양(丹陽)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주인(主人)되는 이() 은사(隱士)의  
-놀고 求景하던 것을 자못 奇異하고 好男兒의 일이라하여 더욱 崇尙하였으며 또 太白山 溪谷에 +번병(藩屛)((번병(藩屛): 1. 울타리나 대문(大門) 앞의 가림 담장(-牆).\\ 2. 왕실(王室)이나 나라를 수호(守護)하는 먼 밖의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많이 내린 눈 위와 北漢江 上에 白玉같이 희고 굳게 結晶된 얼음 위에 +놀고 구경(求景)하던 것을 자못 기이(奇異)하고 호남아(好男兒)의 일이라 하여 더욱 숭상(崇尙)하였으며또 태백산(太白山) 계곡(溪谷)에 
-永江雪馬의 노름을 한껏 즐겨 때로는 李隱士의 집을 지나 고을 끝까지 달리는 것을 +많이 내린 눈 위와 북한강(北漢江) 상()에 백옥(白玉)같이 희고 굳게 결정(結晶)된 얼음 위에 
-快適하게 여기고 그 큰 韻致는 비할 바 없어서 많은 類를 거느리고 한 때를 즐겼다.\\+영강설마(永江雪馬)의 놀음을 한껏 즐겨 때로는 이() 은사(隱士)의 집을 지나 고을 끝까지 달리는 것을 
 +쾌적(快適)하게 여기고 그 큰 운치(韻致)는 비할 바 없어서 많은 유()를 거느리고 한 때를 즐겼다.\\
  
-\_그리고 어느날 公의 病勢 오래도록 快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_그리고 어느날 공()의 병세(病勢오래도록 쾌()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告訣하던 말뜻이 맑고 새로워 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 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고결(告訣)하던 말 뜻이 맑고 새로워 평상시(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다시 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 그 情神이 죽을+다시 서신(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그 정신(情神)이 죽을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_公은 禮安人 察訪 李文樑의 女를 娶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秀良의 아들 瑛으로써 嗣續을 +\_공()은 예안인(禮安人)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의 여()를 취()하였으나아들이 없어 아우 수량(秀良)의 아들 영()으로써 사속(嗣續)을 
-삼고 이듬해 甲子年 正月에 郡 東 山內谷 坎坐之原 先塋 왼편에 葬事하다.\\+삼고 이듬해 갑자년(甲子年) 정월(正月)에 군() 동() 산내곡(山內谷) 감좌지원(坎坐之原) 선영(先塋왼편에 장사(葬事)하다.\\
  
-\_察訪은 곧 聾巖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公을 先生의 門下에서 알게되어 서로 함께 +\_찰방(察訪)은 곧 농암(聾巖) 선생(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공()을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알게 되어 서로 함께 
-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密接하였으나 愚陋(退溪先生 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종유(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밀접(密接)하였으나, 우루(愚陋)(퇴계(退溪) 선생(先生) 자신(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들은 바가 없었더니 公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公이 先生의 門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들은 바가 없었더니 공()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공()이 선생(先生)의 문()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實로 往來가 많았고 옛날의 言約을 닦으며 公이 恒常 나를 늙고 病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실()로 왕래(往來)가 많았고옛날의 언약(言約)을 닦으며 공()이 항상(恒常나를 늙고 병()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못할까 근심을 했던 못할까 근심을 했던
-것이 어찌하여 늙고 病든 사람은 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것이어찌하여 늙고 병()든 사람은 세상(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公의 言行을 가히 記錄할제 鄭重해서 敢히 다 하지 못하고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言行)을 가히 기록(記錄)할제 정중(鄭重)해서 감()히 다 하지 못하고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 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잡을 사람의 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잡을 사람의 상고(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졸눌(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嗚呼라 슬프도다 公의 著述한 바의 文集 二卷과 詩集 +오호(嗚呼)슬프도다! 공()의 저술(著述)한 바의 문집(文集) 2권(二卷)과 시집(詩集) 
-권은 집에 간수하여 두니라.\\ +2권은 집에 간수하여 두니라.\\ 
-\_\_明宗 十八年 癸亥 十二月 日 眞城 李滉 謹狀+\_\_명종(明宗) 18년(十八年) 계해(癸亥) 12월(十二月)  일() 진성(眞城) 이황(李滉) 근장(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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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174709043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3 07:5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