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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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2025/05/14 11:39] – 121.166.63.129 | c3-039 [2025/06/04 21:03]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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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錦溪先生行狀**\\ | \_**錦溪先生行狀**\\ | ||
\_성주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諱)는 준량(俊良)이요 | \_성주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諱)는 준량(俊良)이요 | ||
- | 자(字)는 중거(仲擧)며 평해인(平海人)이니 고려(高麗) 때에 시중(侍中)을 지낸 | + | 자(字)는 중거(仲擧)며 평해인(平海人)이니, 고려(高麗) 때에 시중(侍中)을 지낸 |
휘(諱) 유중(裕中)이라는 분은 그의 먼 조상(祖上)이다. 휘(諱) 유중(裕中)의 손(孫)되는 휘(諱) 근(瑾)이라 하는 분은 | 휘(諱) 유중(裕中)이라는 분은 그의 먼 조상(祖上)이다. 휘(諱) 유중(裕中)의 손(孫)되는 휘(諱) 근(瑾)이라 하는 분은 |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조정(朝廷)에서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조정(朝廷)에서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 ||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김속명(金續命): |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김속명(金續命): | ||
- |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 + |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 ||
- |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鋌)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 + |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鋋)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
전서(典書)로부터 | 전서(典書)로부터 | ||
- |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 + |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 ||
줄 22: | 줄 22: | ||
공(公)의 문학(文學)은 벌써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다. | 공(公)의 문학(文學)은 벌써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다. | ||
그 후(後)로 과거(科擧) 때 마다 항상(恒常) 앞줄에 있어 정유년(丁酉年)에 생원(生員)에 합격(合格)하고 기해년(己亥年) 정시(庭試)에서 | 그 후(後)로 과거(科擧) 때 마다 항상(恒常) 앞줄에 있어 정유년(丁酉年)에 생원(生員)에 합격(合格)하고 기해년(己亥年) 정시(庭試)에서 | ||
- | 회시(會試)에 달리어 경자년(庚子年)에는 을과(乙科)에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及第)하여 권지(權知)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로 성주(星州) 훈도(訓導)에 | + | 회시(會試)에 달리어, 경자년(庚子年)에는 을과(乙科)에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及第)하여 권지(權知)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로 성주(星州) 훈도(訓導)에 |
- | 선임(選任)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에는 학유(學諭)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 + | 선임(選任)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에는 학유(學諭)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
- | 그리고 계묘년(癸卯年)에는 학록(學錄) 겸(兼) 양현고(養賢庫) 봉사(奉事)로 승격(昇格)되어 갑진년(甲辰年)에 다시 학정(學正)에 승진(昇進)되고 | + | 그리고 계묘년(癸卯年)에는 학록(學錄) 겸(兼) 양현고(養賢庫) 봉사(奉事)로 승격(昇格)되어 갑진년(甲辰年)에 다시 학정(學正)에 승진(昇進)되고, |
을사년(乙巳年)에 승문원(承文院) 전고(殿考)로서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와 상주(尙州) | 을사년(乙巳年)에 승문원(承文院) 전고(殿考)로서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와 상주(尙州) | ||
교관(敎官)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 가을에 내직(內職)으로 도로 들어와서 박사(博士)가 되고 그해 겨울에 전적(典籍)으로 | 교관(敎官)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 가을에 내직(內職)으로 도로 들어와서 박사(博士)가 되고 그해 겨울에 전적(典籍)으로 | ||
- | 승격(昇格)되고 이듬해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서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전적(典籍)으로부터 | + | 승격(昇格)되고, 이듬해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서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전적(典籍)으로부터 |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 춘추관(春秋官) 기사관(記事官)을 겸(兼)하여 중종(中宗) 인종(仁宗)의 양조(兩朝) 실록(實錄)을 |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 춘추관(春秋官) 기사관(記事官)을 겸(兼)하여 중종(中宗) 인종(仁宗)의 양조(兩朝) 실록(實錄)을 | ||
- | 닦는데 참여(參與)하더니 겨울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轉職)되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으며 신해년(辛亥年) 2월(二月)에 왕명(王命)으로 | + | 닦는데 참여(參與)하더니, 겨울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轉職)되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으며, 신해년(辛亥年) 2월(二月)에 왕명(王命)으로 |
- | 경상도(慶尙道)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되었다가 다시 승문원(承文院) 검교(檢校)로 바꾸어 차질(差帙)되고 6월(六月)에 추생어사(抽栍御史)가 | + | 경상도(慶尙道)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되었다가 다시 승문원(承文院) 검교(檢校)로 바꾸어 차질(差帙)되고, 6월(六月)에 추생어사(抽栍御史)가 |
- | 되었다가 7월(七月)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더니 이에 나가지 않으매 9월(九月)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 + | 되었다가 7월(七月)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더니 이에 나가지 않으매, 9월(九月)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
내려 주었다. 그때 한(韓)성(姓)을 가진 사람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어 몹시 공(公)을 구(求)한 바 있었으나 | 내려 주었다. 그때 한(韓)성(姓)을 가진 사람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어 몹시 공(公)을 구(求)한 바 있었으나 | ||
- | 공(公)이 응(應)하지 않으니 그 부(府)에서 많은 논의(論議)를 하였어도 드디어 친걸(親乞) 즉 어버이 봉양(奉養) 때문에 | + | 공(公)이 응(應)하지 않으니, 그 부(府)에서 많은 논의(論議)를 하였어도 드디어 친걸(親乞) 즉 어버이 봉양(奉養) 때문에 |
- |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굳이 사양하니 외직(外職)으로 신녕(新寧) 현감(縣監)을 시키는지라 | + |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굳이 사양하니, 외직(外職)으로 신녕(新寧) 현감(縣監)을 시키는지라 |
병진년(丙辰年) 겨울에 병(病)으로 인수(印綬)를 풀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듬해 가을에 조정(朝廷)에서 | 병진년(丙辰年) 겨울에 병(病)으로 인수(印綬)를 풀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듬해 가을에 조정(朝廷)에서 | ||
단양군(丹陽郡)이 몹시 피폐함을 알고 특히 공(公)을 이를 치유(治諭)하는 임(任)에 뽑아 단양군수(丹陽郡守)를 | 단양군(丹陽郡)이 몹시 피폐함을 알고 특히 공(公)을 이를 치유(治諭)하는 임(任)에 뽑아 단양군수(丹陽郡守)를 | ||
- | 제수(除授)하거늘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여 3년(三年)을 근무(勤務)하고 만기(滿期)가 되어 | + | 제수(除授)하거늘,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여 3년(三年)을 근무(勤務)하고 만기(滿期)가 되어 |
- | 집에 돌아와 휴양(休養)하더니 다시 병조(兵曹)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 + | 집에 돌아와 휴양(休養)하더니, 다시 병조(兵曹)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
경신년(庚申年) 가을에 성주(星州) 목사(特使)를 내리니 4년이 지난 계해년(癸亥年) 봄에 신병(身病)을 얻어 | 경신년(庚申年) 가을에 성주(星州) 목사(特使)를 내리니 4년이 지난 계해년(癸亥年) 봄에 신병(身病)을 얻어 | ||
- | 사직(辭職)하고 돌아오는 도중 병세(病勢) 더욱 심(甚)하여 3월 11일에 예천(醴泉) 지경(地境)에 다다르자 | + | 사직(辭職)하고 돌아오는 도중, 병세(病勢) 더욱 심(甚)하여 3월 11일에 예천(醴泉) 지경(地境)에 다다르자 |
- | 드디어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불과(不過) 47세더라. 공(公)의 사람됨이 영수불범(潁秀不凡)하여 | + | 드디어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불과(不過) 47세더라. |
- | 명민(明敏)한 풍표(風標)가 있으며 미목(眉目)이 그림같이 수려(秀麗)하고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들으면 | + | |
+ | \_공(公)의 사람됨이 영수불범(潁秀不凡)하여 | ||
+ | 명민(明敏)한 풍표(風標)가 있으며, 미목(眉目)이 그림같이 수려(秀麗)하고,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들으면 | ||
열가지를 이해(理解)하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고을살이((고을살이: | 열가지를 이해(理解)하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고을살이((고을살이: | ||
자취를 살펴보면 그 직무(職務) 수행(遂行)에 조금도 비겁하지 않고 장래(將來) 참고(參考)할 수 있고 | 자취를 살펴보면 그 직무(職務) 수행(遂行)에 조금도 비겁하지 않고 장래(將來) 참고(參考)할 수 있고 | ||
- | 또 모범(模範)된 역사(歷史)의 문안(文案)을 정비(整備)하는데 힘쓰며 어떻게 하면 백성(百姓)이 굶주리지 않고 | + | 또 모범(模範)된 역사(歷史)의 문안(文案)을 정비(整備)하는데 힘쓰며, 어떻게 하면 백성(百姓)이 굶주리지 않고 |
헐벗지 않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하는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 헐벗지 않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하는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 ||
그가 신녕(新寧)에 있을 때 흉년(凶年)을 | 그가 신녕(新寧)에 있을 때 흉년(凶年)을 | ||
- | 만나 백성(百姓)이 굶주림을 보고 스스로 굶주림을 당함과 같이 여겨 진휼(賑恤)로서 백성(百姓)이 되살게하여 | + | 만나 백성(百姓)이 굶주림을 보고, 스스로 굶주림을 당함과 같이 여겨 진휼(賑恤)로서 백성(百姓)이 되살게하여, |
현민(縣民)들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 현민(縣民)들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 ||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 ||
- |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 + |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
- |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増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 + |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增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 ||
- |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 + |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
- | 또 지방(地方)을 순시(巡視)할 때 수레에서 내려 민정(民情)을 살피니 과세(課稅)가 심하여 백성(百姓)이 살 수 없어 | + | 또 지방(地方)을 순시(巡視)할 때 수레에서 내려 민정(民情)을 살피니, 과세(課稅)가 심하여 백성(百姓)이 살 수 없어 |
- | 이산(移散)하고 남긴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있고 잔류(殘留)한 백성(百姓)들은 식량(食糧)이 없어 굶주려 | + | 이산(移散)하고 남긴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있고, 잔류(殘留)한 백성(百姓)들은 식량(食糧)이 없어 굶주려 |
- | 늘어져 누워있는 것을 직접(直接)보고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나라는 백성(百姓)이 근본(根本)이 되는 것인데 | + | 늘어져 누워있는 것을 직접(直接)보고,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나라는 백성(百姓)이 근본(根本)이 되는 것인데 |
- | 관폐(官弊)로 백성(百姓)이 못 살아서야 될 말이냐 하며 실정(實情)과 적폐(積弊)를 소상(昭詳)하고 | + | 관폐(官弊)로 백성(百姓)이 못 살아서야 될 말이냐 하며, 실정(實情)과 적폐(積弊)를 소상(昭詳)하고 |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 ||
- | \_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 + | \_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 ||
- | 심(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 + | 심(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公)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하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公)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하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 ||
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는가? | 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는가? | ||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 ||
- | \_또 향교(鄉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 + | \_또 향교(鄕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 ||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 ||
줄 79: | 줄 81: | ||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 ||
- | \_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 + | \_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
- |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 | + |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 |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 ||
규모(規模)를 개척(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오사문건(吳斯文建)((사문(斯文): | 규모(規模)를 개척(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오사문건(吳斯文建)((사문(斯文): | ||
같으므로 의논(議論)을 모아 제자(弟子) 몇 사람을 가려 4등급(四等級)으로 나누고 오(吳)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 같으므로 의논(議論)을 모아 제자(弟子) 몇 사람을 가려 4등급(四等級)으로 나누고 오(吳)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 ||
- | 책임(責任)을 맡겨 매월(毎月) 한 차례씩 모여 강(講)을 하되 검독(檢督)하고 시험(試驗)하며 이해(理解)키 곤란(困難)한 태문(台文)은 풀어주고 | + | 책임(責任)을 맡겨, 매월(毎月) 한 차례씩 모여 강(講)을 하되 검독(檢督)하고 시험(試驗)하며 이해(理解)키 곤란(困難)한 태문(台文)은 풀어주고 |
그 성적(成績)에 따라 상벌(賞罰)을 주니 성주(星州) 1군(一郡)의 교화(敎化)가 크게 진작(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 그 성적(成績)에 따라 상벌(賞罰)을 주니 성주(星州) 1군(一郡)의 교화(敎化)가 크게 진작(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 ||
또 성주(星州) 동(東)쪽에 공곡(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유생(儒生)들이 서당(書堂)짖기를 원(願)함으로 | 또 성주(星州) 동(東)쪽에 공곡(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유생(儒生)들이 서당(書堂)짖기를 원(願)함으로 | ||
줄 91: | 줄 93: | ||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 ||
- |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鄉)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 + |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鄕)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 ||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 ||
잘 알면서도 계속(繼續) 친교(親交)를 하는 중(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견식(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 잘 알면서도 계속(繼續) 친교(親交)를 하는 중(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견식(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 ||
그러나 그가 전(前)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 그러나 그가 전(前)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 ||
- | 오직 문사(文辭)로만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았는데 공(公)과 점점(漸漸) 사우(師友)로 종유(從遊)하는 사이에 성리연원설(性理淵源說)을 | + | 오직 문사(文辭)로만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았는데, 공(公)과 점점(漸漸) 사우(師友)로 종유(從遊)하는 사이에 성리연원설(性理淵源說)을 |
듣고 비로소 학문(學問)이란 것은 알아 | 듣고 비로소 학문(學問)이란 것은 알아 | ||
- | 자랑삼고 남에게 칭찬(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繼續) 지행일치(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 + | 자랑삼고, 남에게 칭찬(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繼續) 지행일치(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
차학(此學)에 뜻을 두어 심경사록(心經思錄) 등(等)의 모든 | 차학(此學)에 뜻을 두어 심경사록(心經思錄) 등(等)의 모든 | ||
- | 성리서(性理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감발(感發)하였다 하더니 성주(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 + | 성리서(性理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감발(感發)하였다 하더니, 성주(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
- | 학우(學友)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 그 교화(敎化)로서 치민(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 | + | 학우(學友)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 그 교화(敎化)로서 치민(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 |
그 공(功)이 더욱 깊었었다.\\ | 그 공(功)이 더욱 깊었었다.\\ | ||
- | \_매양(每樣)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오(吳) 교수(敎授)와 함께 책상(冊床)을 맞대고 강독(講讀)하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 + | \_매양(每樣)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오(吳) 교수(敎授)와 함께 책상(冊床)을 맞대고 강독(講讀)하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
침식(寢食)을 잊고 열심(熱心)함으로 사람들이 과로(過勞)로 병(病)날 것을 근심하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 침식(寢食)을 잊고 열심(熱心)함으로 사람들이 과로(過勞)로 병(病)날 것을 근심하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 ||
그러나 항상(恒常) 이에 대답(對答)이 독서(讀書)는 학문(學問)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기운(氣運)을 | 그러나 항상(恒常) 이에 대답(對答)이 독서(讀書)는 학문(學問)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기운(氣運)을 | ||
- |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독서(讀書)로 인(因)하여 병(病)이 날 이치(理致)가 있겠는가? | + |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독서(讀書)로 인(因)하여 병(病)이 날 이치(理致)가 있겠는가? |
\_그 혹시 반대(反對)되는 것은 명(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거처(居處)하는 | \_그 혹시 반대(反對)되는 것은 명(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거처(居處)하는 | ||
- | 곳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4벽(四壁)에 | + | 곳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4벽(四壁)에 |
써 붙이고 스스로 보아 경계(警誡)하며 깨우치고 근엄(謹嚴)하고 공손(恭遜)한 생활(生活)로 지내왔으나, | 써 붙이고 스스로 보아 경계(警誡)하며 깨우치고 근엄(謹嚴)하고 공손(恭遜)한 생활(生活)로 지내왔으나, | ||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 ||
- |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 + |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
- |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舎)라 지었다. | + |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舍)라 지었다. |
- |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 + |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
- |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 + |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
- | 더 큰 것이 있었을 것인데 애석(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 + | 더 큰 것이 있었을 것인데, 애석(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
문득 병(病)을 얻어 승화(乘化)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가석(可惜)하도다.\\ | 문득 병(病)을 얻어 승화(乘化)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가석(可惜)하도다.\\ | ||
\_비록 그러하나 공(公)의 이름이 홍문관(弘文館) 양재(養才)에 선발(選拔)되어 무오년(戊午年) 봄에 공(公)이 단양(丹陽)으로 | \_비록 그러하나 공(公)의 이름이 홍문관(弘文館) 양재(養才)에 선발(選拔)되어 무오년(戊午年) 봄에 공(公)이 단양(丹陽)으로 | ||
- | 부임(赴任)한 것을 보고 조정(朝廷)의 신하(臣下)들이 의논(議論)하고 狀啓로 公을 불러 文翰의 職位에 두려하여 | + | 부임(赴任)한 것을 보고, 조정(朝廷)의 신하(臣下)들이 의논(議論)하고 |
- | 周旋을 하였으나 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中止하였다. | + | 주선(周旋)을 하였으나, 동진자(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
- | 그러므로 朝廷 諸公들이 公의 가상한 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公인즉 그 能한 才操에도 | + | 그러므로 |
- | 뜻을 더하여 榮進의 名利를 汲汲히 取하려 하지않고 도리어 生覺을 달리하고 努力을 | + | 뜻을 더하여 |
- | 거듭하여 人生 一生에 求하지 못한 바를 求하며 凡人들이 | + | 거듭하여 |
- |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禍福이 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 + |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
- | 無我狀態에 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人生이 죽은 後에는 | + | 무아상태(無我狀態)에 잠입(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
- | 그만이지마는 그가 擇한 道가 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人生을 改造하는데는 | + | 그만이지마는 그가 |
- | 바른 方法이요 또 이 道를 熱心히 嚮導함은 가상할 노릇이다.\\ | + | 바른 |
- | \_또 公은 友愛篤實하여 좋은 物質은 먼저 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 + | \_또 공(公)은 우애독실(友愛篤實)하여 좋은 |
- | 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하였다. 鄕黨故舊에게는 窮한데 | + | 자기(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 하였다. |
- | 或 미치지 못할 때는 恒常 마음에 섭섭함을 禁치 못하였다.\\ | + | 혹(或) 미치지 못할 때는 |
\_그리고 그 몸이 죽는 날에 이르러서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남에게 베를 꾸어 | \_그리고 그 몸이 죽는 날에 이르러서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남에게 베를 꾸어 | ||
- | 감을 하였으며 옷이 棺을 채우지 못한 것을 | + | 감을 하였으며 옷이 |
- | 보고서 남들이 또 그 淸貧함과 嬌慢하고 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 + | 보고서 남들이 또 그 청빈(淸貧)함과 |
- | 또 아름다운 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名山적水가 | + | 또 아름다운 |
- | 있으면 반드시 親友들과 함께 놀며 詩를 읊고 討論하며 或 몸을 빼처 홀로 徘徊嘯詠하고 | + | 있으면, 반드시 |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 ||
- | \_丹陽의 島潭과 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主人되는 李隱士의 藩屛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 + | \_단양(丹陽)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주인(主人)되는 |
- | 놀고 求景하던 것을 자못 奇異하고 好男兒의 일이라하여 더욱 崇尙하였으며 또 太白山 溪谷에 | + | 번병(藩屛)((번병(藩屛): |
- | 많이 내린 눈 위와 北漢江 上에 白玉같이 희고 굳게 結晶된 얼음 위에 | + | 놀고 |
- | 永江雪馬의 | + | 많이 내린 눈 위와 |
- | 快適하게 여기고 그 큰 韻致는 비할 바 없어서 많은 類를 거느리고 한 때를 즐겼다.\\ | + | 영강설마(永江雪馬)의 놀음을 한껏 즐겨 때로는 |
+ | 쾌적(快適)하게 여기고 그 큰 운치(韻致)는 비할 바 없어서 많은 | ||
- | \_그리고 어느날 公의 病勢 오래도록 快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 + | \_그리고 어느날 |
- | 告訣하던 말뜻이 맑고 새로워 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 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 + | 고결(告訣)하던 말 뜻이 맑고 새로워 |
- | 다시 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 그 情神이 죽을 | + | 다시 |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 ||
- | \_公은 禮安人 察訪 李文樑의 女를 娶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秀良의 아들 瑛으로써 嗣續을 | + | \_공(公)은 예안인(禮安人)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의 여(女)를 취(娶)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
- | 삼고 이듬해 甲子年 正月에 郡 東 山內谷 坎坐之原 先塋 왼편에 葬事하다.\\ | + | 삼고 이듬해 |
- | \_察訪은 곧 聾巖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公을 先生의 門下에서 알게되어 서로 함께 | + | \_찰방(察訪)은 곧 농암(聾巖) 선생(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
- | 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密接하였으나 愚陋(退溪先生 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 + | 종유(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
- | 들은 바가 없었더니 公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公이 先生의 門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 + | 들은 바가 없었더니 |
- | 實로 往來가 많았고 옛날의 言約을 닦으며 公이 恒常 나를 늙고 病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 + | 실(實)로 왕래(往來)가 많았고, 옛날의 |
못할까 근심을 했던 | 못할까 근심을 했던 | ||
- | 것이 어찌하여 늙고 病든 사람은 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 + | 것이, 어찌하여 늙고 |
- |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公의 言行을 가히 記錄할제 鄭重해서 敢히 다 하지 못하고 | + |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
- |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 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 + |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 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
- | 잡을 사람의 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 + | 잡을 사람의 |
- | 嗚呼라 슬프도다 公의 著述한 바의 文集 二卷과 詩集 | + |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공(公)의 저술(著述)한 바의 |
- | 두권은 집에 간수하여 두니라.\\ | + | 2권은 집에 간수하여 두니라.\\ |
- | \_\_明宗 十八年 癸亥 十二月 日 眞城 李滉 謹狀 | + | \_\_명종(明宗) 18년(十八年) 계해(癸亥) 12월(十二月) 일(日) 진성(眞城) 이황(李滉) 근장(謹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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