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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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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2025/05/16 20:35] 121.166.63.129c3-039 [2025/06/04 21:03] (현재) ssio2
줄 10: 줄 10: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전서(典書)로부터 전서(典書)로부터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줄 54: 줄 54: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줄 63: 줄 63: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_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_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이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심(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심(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公)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하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公)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하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_또 향교(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_또 향교(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줄 81: 줄 81: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_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 ~ 1568년(선조 1).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노적(盧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임중(任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官)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벼슬아치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되었다.))이  +\_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 ~ 1568년(선조 1).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노적(盧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임중(任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官)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벼슬아치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되었다.))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공(公)이 이것을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규모(規模)를 개척(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오사문건(吳斯文建)((사문(斯文): 1. ‘이 학문(學問), 이 도(道)’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도의(道義)나 문화(文化)를 이르는 말.\\ 2. ‘유학자(儒學者)’를 높여 이르는 말.))((오건(吳建):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오종은(吳從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식(吳軾)이고,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이 성주(星州) 교관(敎官)으로 부임(赴任)할 새 서로 뜻이 규모(規模)를 개척(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오사문건(吳斯文建)((사문(斯文): 1. ‘이 학문(學問), 이 도(道)’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도의(道義)나 문화(文化)를 이르는 말.\\ 2. ‘유학자(儒學者)’를 높여 이르는 말.))((오건(吳建):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오종은(吳從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식(吳軾)이고,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이 성주(星州) 교관(敎官)으로 부임(赴任)할 새 서로 뜻이
 같으므로 의논(議論)을 모아 제자(弟子) 몇 사람을 가려 4등급(四等級)으로 나누고 오(吳)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같으므로 의논(議論)을 모아 제자(弟子) 몇 사람을 가려 4등급(四等級)으로 나누고 오(吳)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책임(責任)을 맡겨 매월(毎月) 한 차례씩 모여 강(講)을 하되 검독(檢督)하고 시험(試驗)하며 이해(理解)키 곤란(困難)한 태문(台文)은 풀어주고 +책임(責任)을 맡겨매월(毎月) 한 차례씩 모여 강(講)을 하되 검독(檢督)하고 시험(試驗)하며 이해(理解)키 곤란(困難)한 태문(台文)은 풀어주고 
 그 성적(成績)에 따라 상벌(賞罰)을 주니 성주(星州) 1군(一郡)의 교화(敎化)가 크게 진작(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그 성적(成績)에 따라 상벌(賞罰)을 주니 성주(星州) 1군(一郡)의 교화(敎化)가 크게 진작(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또 성주(星州) 동(東)쪽에 공곡(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유생(儒生)들이 서당(書堂)짖기를 원(願)함으로  또 성주(星州) 동(東)쪽에 공곡(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유생(儒生)들이 서당(書堂)짖기를 원(願)함으로 
줄 93: 줄 93: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잘 알면서도 계속(繼續) 친교(親交)를 하는 중(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견식(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잘 알면서도 계속(繼續) 친교(親交)를 하는 중(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견식(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전(前)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그러나 그가 전(前)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오직 문사(文辭)로만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았는데 공(公)과 점점(漸漸) 사우(師友)로 종유(從遊)하는 사이에 성리연원설(性理淵源說)을 +오직 문사(文辭)로만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았는데공(公)과 점점(漸漸) 사우(師友)로 종유(從遊)하는 사이에 성리연원설(性理淵源說)을 
 듣고 비로소 학문(學問)이란 것은 알아 듣고 비로소 학문(學問)이란 것은 알아
-자랑삼고 남에게 칭찬(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繼續) 지행일치(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자랑삼고남에게 칭찬(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繼續) 지행일치(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차학(此學)에 뜻을 두어 심경사록(心經思錄) 등(等)의 모든 차학(此學)에 뜻을 두어 심경사록(心經思錄) 등(等)의 모든
-성리서(性理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감발(感發)하였다 하더니 성주(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성리서(性理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감발(感發)하였다 하더니성주(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학우(學友)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 그 교화(敎化)로서 치민(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학우(學友)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그 교화(敎化)로서 치민(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
 그 공(功)이 더욱 깊었었다.\\ 그 공(功)이 더욱 깊었었다.\\
  
-\_매양(每樣)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오(吳) 교수(敎授)와 함께 책상(冊床)을 맞대고 강독(講讀)하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_매양(每樣)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오(吳) 교수(敎授)와 함께 책상(冊床)을 맞대고 강독(講讀)하는 동안에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침식(寢食)을 잊고 열심(熱心)함으로 사람들이 과로(過勞)로 병(病)날 것을 근심하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침식(寢食)을 잊고 열심(熱心)함으로 사람들이 과로(過勞)로 병(病)날 것을 근심하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항상(恒常) 이에 대답(對答)이 독서(讀書)는 학문(學問)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기운(氣運)을 그러나 항상(恒常) 이에 대답(對答)이 독서(讀書)는 학문(學問)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기운(氣運)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독서(讀書)로 인(因)하여 병(病)이 날 이치(理致)가 있겠는가?\\+기르는 것인데어찌 독서(讀書)로 인(因)하여 병(病)이 날 이치(理致)가 있겠는가?\\
  
 \_그 혹시 반대(反對)되는 것은 명(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거처(居處)하는 \_그 혹시 반대(反對)되는 것은 명(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거처(居處)하는
-곳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4벽(四壁)에+곳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고요한 온 방안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4벽(四壁)에
 써 붙이고 스스로 보아 경계(警誡)하며 깨우치고 근엄(謹嚴)하고 공손(恭遜)한 생활(生活)로 지내왔으나, 써 붙이고 스스로 보아 경계(警誡)하며 깨우치고 근엄(謹嚴)하고 공손(恭遜)한 생활(生活)로 지내왔으나,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깨닫고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라 지었다.  +몸을 늙고져 하여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라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더 큰 것이 있었을 것인데 애석(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더 큰 것이 있었을 것인데애석(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문득 병(病)을 얻어 승화(乘化)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가석(可惜)하도다.\\ 문득 병(病)을 얻어 승화(乘化)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가석(可惜)하도다.\\
  
 \_비록 그러하나 공(公)의 이름이 홍문관(弘文館) 양재(養才)에 선발(選拔)되어 무오년(戊午年) 봄에 공(公)이 단양(丹陽)으로 \_비록 그러하나 공(公)의 이름이 홍문관(弘文館) 양재(養才)에 선발(選拔)되어 무오년(戊午年) 봄에 공(公)이 단양(丹陽)으로
-부임(赴任)한 것을 보고 조정(朝廷)의 신하(臣下)들이 의논(議論)하고 장계(狀啓)로 공(公)을 불러 문한(文翰)의 직위(職位)에 두려하여 +부임(赴任)한 것을 보고조정(朝廷)의 신하(臣下)들이 의논(議論)하고 장계(狀啓)로 공(公)을 불러 문한(文翰)의 직위(職位)에 두려하여 
-주선(周旋)을 하였으나 동진자(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중지(中止)하였다.+주선(周旋)을 하였으나동진자(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중지(中止)하였다.
 그러므로 조정(朝廷) 제공(諸公)들이 공(公)의 가상한 식견(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공(公)인즉 그 능(能)한 재조(才操)에도  그러므로 조정(朝廷) 제공(諸公)들이 공(公)의 가상한 식견(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공(公)인즉 그 능(能)한 재조(才操)에도 
-뜻을 더하여 영진(榮進)의 명리(名利)를 급급(汲汲)히 취(取)하려 하지않고 도리어 생각(生覺)을 달리하고 노력(努力)을  +뜻을 더하여 영진(榮進)의 명리(名利)를 급급(汲汲)히 취(取)하려 하지 않고도리어 생각(生覺)을 달리하고 노력(努力)을  
-거듭하여 인생(人生) 일생(一生)에 구(求)하지 못한 바를 구(求)하며 범인(凡人)들이 맛보지 못한 바를 맛보아+거듭하여 인생(人生) 일생(一生)에 구(求)하지 못한 바를 구(求)하며 범인(凡人)들이 맛보지 못한 바를 맛보아,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화복(禍福)이 화복(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화복(禍福)이 화복(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무아상태(無我狀態)에 잠입(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인생(人生)이 죽은 후(後)에는  무아상태(無我狀態)에 잠입(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인생(人生)이 죽은 후(後)에는 
 그만이지마는 그가 택(擇)한 도(道)가 희망(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人生)을 개조(改造)하는 데는 그만이지마는 그가 택(擇)한 도(道)가 희망(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人生)을 개조(改造)하는 데는
-바른 방법(方法)이요 또 이 도(道)를 열심(熱心)히 향도(嚮導)함은 가상할 노릇이다.\\+바른 방법(方法)이요또 이 도(道)를 열심(熱心)히 향도(嚮導)함은 가상할 노릇이다.\\
  
 \_또 공(公)은 우애독실(友愛篤實)하여 좋은 물질(物質)은 먼저 자당(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자매제질(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_또 공(公)은 우애독실(友愛篤實)하여 좋은 물질(物質)은 먼저 자당(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자매제질(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자기(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 하였다. 향당고우(鄕黨故舊)에게는 궁(窮)한데 휼(恤)하고 급(急)한데 구제(救濟)하되+자기(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 하였다. 향당고우(鄕黨故舊)에게는 궁(窮)한데 휼(恤)하고 급(急)한데 구제(救濟)하되
 혹(或) 미치지 못할 때는 항상(恒常) 마음에 섭섭함을 금(禁)치 못하였다.\\ 혹(或) 미치지 못할 때는 항상(恒常) 마음에 섭섭함을 금(禁)치 못하였다.\\
  
줄 141: 줄 141:
 보고서 남들이 또 그 청빈(淸貧)함과 교만(嬌慢)하고 외식(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세상(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보고서 남들이 또 그 청빈(淸貧)함과 교만(嬌慢)하고 외식(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세상(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또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여행(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명산적수(名山滴水)가 또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여행(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명산적수(名山滴水)가
-있으면 반드시 친우(親友)들과 함께 놀며 시(詩)를 읊고 토론(討論)하며 혹(或) 몸을 빼처 홀로 배회소영(徘徊嘯詠)하고+있으면반드시 친우(親友)들과 함께 놀며 시(詩)를 읊고 토론(討論)하며 혹(或) 몸을 빼처 홀로 배회소영(徘徊嘯詠)하고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_단양(丹陽)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주인(主人)되는 이(李) 은사(隱士)의  \_단양(丹陽)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주인(主人)되는 이(李) 은사(隱士)의 
 번병(藩屛)((번병(藩屛): 1. 울타리나 대문(大門) 앞의 가림 담장(-牆).\\ 2. 왕실(王室)이나 나라를 수호(守護)하는 먼 밖의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번병(藩屛)((번병(藩屛): 1. 울타리나 대문(大門) 앞의 가림 담장(-牆).\\ 2. 왕실(王室)이나 나라를 수호(守護)하는 먼 밖의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놀고 구경(求景)하던 것을 자못 기이(奇異)하고 호남아(好男兒)의 일이라 하여 더욱 숭상(崇尙)하였으며 또 태백산(太白山) 계곡(溪谷)에+놀고 구경(求景)하던 것을 자못 기이(奇異)하고 호남아(好男兒)의 일이라 하여 더욱 숭상(崇尙)하였으며또 태백산(太白山) 계곡(溪谷)에
 많이 내린 눈 위와 북한강(北漢江) 상(上)에 백옥(白玉)같이 희고 굳게 결정(結晶)된 얼음 위에 많이 내린 눈 위와 북한강(北漢江) 상(上)에 백옥(白玉)같이 희고 굳게 결정(結晶)된 얼음 위에
 영강설마(永江雪馬)의 놀음을 한껏 즐겨 때로는 이(李) 은사(隱士)의 집을 지나 고을 끝까지 달리는 것을 영강설마(永江雪馬)의 놀음을 한껏 즐겨 때로는 이(李) 은사(隱士)의 집을 지나 고을 끝까지 달리는 것을
줄 152: 줄 152:
  
 \_그리고 어느날 공(公)의 병세(病勢) 오래도록 쾌(快)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_그리고 어느날 공(公)의 병세(病勢) 오래도록 쾌(快)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고결(告訣)하던 말 뜻이 맑고 새로워 평상시(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 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고결(告訣)하던 말 뜻이 맑고 새로워 평상시(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다시 서신(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 그 정신(情神)이 죽을+다시 서신(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그 정신(情神)이 죽을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줄 160: 줄 160:
  
 \_찰방(察訪)은 곧 농암(聾巖) 선생(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공(公)을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알게 되어 서로 함께 \_찰방(察訪)은 곧 농암(聾巖) 선생(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공(公)을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알게 되어 서로 함께
-종유(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밀접(密接)하였으나 우루(愚陋)(퇴계(退溪) 선생(先生) 자신(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종유(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밀접(密接)하였으나우루(愚陋)(퇴계(退溪) 선생(先生) 자신(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들은 바가 없었더니 공(公)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공(公)이 선생(先生)의 문(門)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들은 바가 없었더니 공(公)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공(公)이 선생(先生)의 문(門)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실(實)로 왕래(往來)가 많았고 옛날의 언약(言約)을 닦으며 공(公)이 항상(恒常) 나를 늙고 병(病)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실(實)로 왕래(往來)가 많았고옛날의 언약(言約)을 닦으며 공(公)이 항상(恒常) 나를 늙고 병(病)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못할까 근심을 했던 못할까 근심을 했던
-것이 어찌하여 늙고 병(病)든 사람은 세상(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것이어찌하여 늙고 병(病)든 사람은 세상(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공(公)의 언행(言行)을 가히 기록(記錄)할제 정중(鄭重)해서 감(敢)히 다 하지 못하고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공(公)의 언행(言行)을 가히 기록(記錄)할제 정중(鄭重)해서 감(敢)히 다 하지 못하고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 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잡을 사람의 상고(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졸눌(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잡을 사람의 상고(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졸눌(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공(公)의 저술(著述)한 바의 문집(文集) 2권(二卷)과 시집(詩集)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공(公)의 저술(著述)한 바의 문집(文集) 2권(二卷)과 시집(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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