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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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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2025/05/16 20:44] 121.166.63.129c3-039 [2025/06/04 21:03] (현재) ssio2
줄 10: 줄 10: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전서(典書)로부터 전서(典書)로부터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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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줄 70: 줄 70: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_또 향교(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_또 향교(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줄 81: 줄 81: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_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 ~ 1568년(선조 1).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노적(盧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임중(任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官)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벼슬아치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되었다.))이 +\_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 ~ 1568년(선조 1).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노적(盧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임중(任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官)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벼슬아치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되었다.))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줄 93: 줄 93: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줄 116: 줄 116: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라 지었다.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라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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