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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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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39 [2025/05/21 12:50] ssio2c3-039 [2025/06/04 21:03]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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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전서(典書)로부터 전서(典書)로부터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_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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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줄 70: 줄 70: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_또 향교(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_또 향교(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줄 93: 줄 93: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_일찍이 공(公)의 고향(故)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줄 116: 줄 116: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라 지었다.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라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c3-039.174779945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1 12:5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