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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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평해황씨세보서(平海黃氏世譜序)**\\ | \_**평해황씨세보서(平海黃氏世譜序)**\\ | ||
- | \_황씨(黃氏)의 동극에 나타난 역사는 오랜 옛날이며 그 번영해온 유래는 신라조(新 | + | \_황씨(黃氏)의 동국에 나타난 역사는 오랜 옛날이며 그 번영해온 유래는 |
- | 羅朝)에서 안정박이김최(安鄭朴李金崔)의 | + | 신라조(新羅朝)에서 안정박이김최(安鄭朴李金崔)의 |
- | 리와 줄기와 잎이 퍼져서 우리 황씨는 어느덧 대성(大姓)이 되어 파계(派系)가 나누 | + | 그 뿌리와 줄기와 잎이 퍼져서 우리 황씨는 어느덧 대성(大姓)이 되어 파계(派系)가 |
- | 어지고 관향(貫鄕)이 달라서 철원(鐵原) 창원(昌原) 장수(長水) 평해(平海) 등에 가장 | + | 나누어지고 관향(貫鄕)이 달라서 철원(鐵原) 창원(昌原) 장수(長水) 평해(平海) 등에 가장 |
- | 많은 편이며 그 중에도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멀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 | 많은 편이며 그 중에도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멀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
- | 그러면 황씨의 시조는 누구였던가? | + | |
- | 군(黃將軍)이라는 어른이 구장군(丘將軍)이라는 분과 함께 들어오셨다는 것인데 황 | + | |
- | 장군은 월송(月松) 북쪽 기슭에 살아계셔서 지금도 황장군의 사신 터가 있으며 구장 | + | |
- | 군은 구미(丘尾) 북포(北浦)에 배를 대어 상륙하셨다하여 그 지방명을 지금도 구미 | + | |
- | 진(丘尾津)이라 부르고 있다. 이 모든 말이 다 평해군지(平海郡誌)에 등재되어 있으 | + | |
- | 나 세대가 황박(荒朴)하고 문적이 소실되어 확실히 증빙(證憑)할 근거는 없다.그러 | + | |
- | 나 뜻하건데 황성(黃姓)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근원을 삼은 것은 틀림없는것 같다. | + | |
- | 그리고 대개 장수(長水) 창원(昌原)은 평해(平海)에서 나누어졌다 하니 이 三파는 처 | + | |
- | 음 한 조상에서 갈린것을 짐작할 수 있다. | + | |
- | 우리 평해황씨는 고려초로부터 대대로 문관과 무관에 재상의 자리를 바라볼만한 | + | |
- | 명망높은 분들이 많았고 또 이름난 재상과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한 분들이 많아서 | + | \_그러면 황씨의 시조는 누구였던가? |
- | 이조에 | + | 황장군(黃將軍)이라는 어른이 구장군(丘將軍)이라는 분과 함께 |
- | (祖先)의 심인후택(深仁厚澤)의 적공(積功)이 아니었던들 어찌 수백년동안을 그같은 | + | 황장군은 월송(月松) 북쪽 기슭에 살아계셔서 지금도 황장군의 사신 터가 |
- | 찬연한 문벌로 가업을 이어내려 올 수 있었겠는가? | + | 구장군은 구미(丘尾) 북포(北浦)에 배를 대어 상륙하셨다하여 그 지방명을 지금도 |
- | 무릇 세상은 심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거두게되고 물은 대면 반드시 흐르는 법임 | + |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르고 있다. 이 모든 말이 다 평해군지(平海郡誌)에 등재되어 |
- | 에 역대의 찬연했던 우리 보사(譜史)도 반드시 보첩을 통하여 서로 믿고 전함이 | + | 있으나 세대가 황박(荒朴)하고 문적이 소실되어 확실히 증빙(證憑)할 근거는 없다. |
- | 었던것을 확신하노라. 그런데 고려말에 일본해적떼가 침입하여 죽령(竹嶺) 이남은 | + | 그러나 뜻하건데 황성(黃姓)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근원을 삼은 |
- | 거개(擧皆)가 도적에게 쑥밭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피난하게 됨에 가졌던 조 | + | 그리고 대개 장수(長水) 창원(昌原)은 |
- | 상전래의 물건을 모두 병화로 소실하고 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게됨으로 그 정 | + | 처음 한 조상에서 갈린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 | 상은 | + | |
- | 연유요, 또 처음된 일로 생각된다 | + | |
- | 그다음은 이조초에 병조판서(兵曹判書) 황상(黃象)이 문천군(文川郡)에서 돌아가 | + | |
- | 장사(葬事)함에 그 후손의 일부가 흩어져 살게된 것이 두번째였다. 그리고 각읍각처 | + | |
- | 에 산거하여 번연하게 사는 | + | |
- | 히려 끊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회고하건데 보첩을 잃고 또 듣 | + | |
- | 는 바 없이 살아온 | + | |
- | 였으니 | + | |
+ | \_우리 평해황씨는 고려초로부터 대대로 문관과 무관에 재상의 자리를 바라볼만한 | ||
+ | |||
+ | 명망높은 분들이 많았고 또 이름난 재상과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한 분들이 많아서 | ||
+ | 이조에 들어와서도 역사에 반반(班班)함을 가히 자랑할만하다. 이것은 진실로 | ||
+ | 조선(祖先)의 심인후택(深仁厚澤)의 적공(積功)이 아니었던들 어찌 수백년동안을 그같은 | ||
+ | 찬연한 문벌로 가업을 이어내려 올 수 있었겠는가? | ||
+ | \_무릇 세상은 심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거두게 되고 물은 대면 반드시 흐르는 | ||
+ | 법임에 역대의 찬연했던 우리 보사(譜史)도 반드시 보첩을 통하여 서로 믿고 전함이 | ||
+ | 있었던 것을 확신하노라. 그런데 고려말에 일본 해적떼가 침입하여 죽령(竹嶺) 이남은 | ||
+ | 거개(擧皆)가 도적에게 쑥밭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피난하게 됨에 가졌던 | ||
+ | 조상전래의 물건을 모두 병화로 소실하고 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게됨으로 그 | ||
+ | 정상은 진실로 슬프고 가석할 노릇이었다. 이것이 우리 황씨가 북방에 많이 살게된 | ||
+ | 연유요, 또 처음된 일로 생각된다.\\ | ||
- | 이 지냈으니 이어찌 대행중대불행(大幸中大不幸)이 아니였으랴!\\ | + | \_그 다음은 |
+ | 장사(葬事)함에 그 후손의 일부가 흩어져 살게된 것이 두번째였다. 그리고 각읍각처에 | ||
+ | 산거하여 번연하게 사는 이들은 모두가 간구한 생활로 한 터럭에 견줄 것이나 오히려 | ||
+ | 끊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회고하건데 보첩을 잃고 또 듣는 바 없이 | ||
+ | 살아온 고로 평해황씨 자손들이 3(三)파로 나뉘어 그 조상을 각각으로 하였으니 | ||
+ | 처음에 한 조상이 누구였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 혼인을 하여 부끄러움이 없이 | ||
+ | 지냈으니 이 어찌 대행중대불행(大幸中大不幸)이 아니였으랴!\\ | ||
- | \_황서(黃瑞)께서는 익대원훈(翊戴元勳)으로써 승군(陞郡) 즉 기성현(箕城縣)을 평해 | + | \_황서(黃瑞)께서는 익대원훈(翊戴元勳)으로써 승군(陞郡) 즉 기성현(箕城縣)을 |
- | 군(平海郡)으로 올리시고 황현(黃鉉)은 경명행수(經明行修)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고 | + | 평해군(平海郡)으로 올리시고 황현(黃鉉)은 경명행수(經明行修)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고 |
- | 근대에 와서 또 황서(黃瑞)와 황준량(黃俊良) 두분의 박흡다문(博洽多聞)으로서도 | + | 근대에 와서 또 황서(黃瑞)와 황준량(黃俊良) 두분의 박흡다문(博洽多聞)으로서도 |
- | 두 종사(宗史)에 상심치 못한바 있어 한 조상으로 그 동종인 것이 드러남이 없으니 | + | 모두 종사(宗史)에 상심치 못한바 있어 한 조상으로 그 동종인 것이 드러남이 없으니 |
- | 드디어 우리 자손의 무궁한 슬픔이라 하겠다.오호라 우리 고을은 벽향(僻鄉)이며 | + | 드디어 우리 자손의 무궁한 슬픔이라 하겠다. 오호라 우리 고을은 벽향(僻鄉)이며 |
- | 우리들은 잔약한 자손이라 이들의 흐름을 살펴볼때 가난하고 천한 상민으로 기울어 | + | 우리들은 잔약한 자손이라 이들의 흐름을 살펴볼 때 가난하고 천한 상민으로 |
- | 짐이 많으니 진실로 후손들의 장래가 크게 통탄케 되는도다. 과연 이 일이 장차 어 | + | 기울어짐이 많으니 진실로 후손들의 장래가 크게 통탄케 되는도다. |
- | 떻게 되어갈까? | + | 과연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되어갈까? |
\_이에 거듭한 임진(壬辰) 계사(癸巳)의 재난이 여말(麗末)의 해구(海寇)의 재난보다 | \_이에 거듭한 임진(壬辰) 계사(癸巳)의 재난이 여말(麗末)의 해구(海寇)의 재난보다 | ||
- | 더욱 심하니 이제까지의 증빙(證憑)을 후일에 제시치 못할것이 오늘보다 더할것이 | + | 더욱 심하니 이제까지의 증빙(證憑)을 후일에 제시치 못할것이 오늘보다 더할 것이 |
명약관화(明若觀火)하며 또 동족의 천(賤)해짐과 그 장래의 탄식됨이 오늘의 자손이 | 명약관화(明若觀火)하며 또 동족의 천(賤)해짐과 그 장래의 탄식됨이 오늘의 자손이 | ||
- | 오늘보다 응당 더할것이므로 이에 크게 두려움이 있어 종족의 보사를 수집코져 | + | 오늘보다 응당 더할 것이므로 이에 크게 두려움이 있어 종족의 보사를 수집코져 |
- | 였으나 질병이 잦고 이목이 넓지 못하여 숙부 응청(應清)어른의 평일 수기한 것을 | + | 하였으나 질병이 잦고 이목이 넓지 못하여 숙부 응청(應淸) 어른의 평일 수기한 것을 |
토대로 나의 교유(交遊)간에 듣고 본 바를 보입(補入)하여 일가의 사사로이 전하는 | 토대로 나의 교유(交遊)간에 듣고 본 바를 보입(補入)하여 일가의 사사로이 전하는 | ||
- | 편람으로 하였으니 그간에 혹 자세함과 혹 간략함과 혹 빠진것을 쓰지않음은 전지 | + | 편람으로 하였으니 그간에 혹 자세함과 혹 간략함과 혹 빠진 것을 쓰지 않음은 |
- | 에 따른것이며 혹 동명으로서 파가 같지 않고 혹 동생으로서 이름이 가지런하지 않 | + | 전지에 따른 것이며 혹 동명으로서 파가 같지 않고 혹 동생으로서 이름이 가지런하지 |
+ | 않아 의심으로 전하고 믿음으로 전하여 그대로 두고 깍지 않음은 선대를 높인 것이오. | ||
+ | 외손(外孫)의 외파(外派)와 구친(舅親)의 구족(舅族)을 계속 기록(記錄)한 것은 | ||
+ | 사족의 근원을 밝힌 것이오, 상민 아전 서자 천민이 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지 | ||
+ | 않은 것은 동종(同宗)을 중하게 여김이라.\\ | ||
- | 아 의심으로 전하고 믿음으로 전하여 그대로 두고 깍지 않음은 선대를 높인 것이오. | + | \_오호라 과거 수백년 간의 조상이 어찌 이로 힘입어 혹 후세에 전할 줄 알았겠으며 |
- | 오' 외손(外孫)의 외파(外派)와 근친(舅親)의 구족(舅族)을 계속 기록(記錄)한 것은 | + | 또 장차 수백년 간에 자손들이 어찌 이로 이어서 더욱 자세할 줄 누가 알 일이겠는가? |
- | 사족의 근원을 밝힌 것이오' | + | 만든 바 계획대로 족보가 완성되었으니 이에 가히 유감이 없을지니라.\\ |
- | 않은 것은 동종(同宗)을 충하게 여깊이라. | + | \_\_선조(宣祖) 갑진(甲辰) 상완(上浣)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예천군수(醴泉郡守) 여일(汝一) 근서(謹序) |
- | 오호라 과거 수백년간의 조상이 어찌 이로 힘입어 혹 후세에 전할 줄 알았겠으며 | + | |
- | 또 장착 수백년간에 자손들이 어찌 이로 이어서 더욱 자제할 줄 누가 알 일이겠는 | + | |
- | 가? 만든바 계획대로 족보가 완성되었으니 이에 가히 유감이 없을지니라. | + | |
- | 宣祖甲辰上浣通訓大夫行 醴泉郡守 汝一 謹序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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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02.1749217617.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6 22:46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