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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3 [2025/06/07 13:44] – 만듦 ssio2 | c32-023 [2025/06/09 09:35]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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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포공(樂園公) 행장(行狀)략(略)=== | ===낙포공(樂園公) 행장(行狀)략(略)=== | ||
+ | <WRAP 37em justify> | ||
+ | <typo ff:' | ||
+ | \_**낙포공(樂園公) 행장(行狀)략(略)**\\ | ||
+ | \_황씨의 선대는 중국의 강하인(江夏人)이다. 동한(東漢) 건무(建武) 4(四)년에 배를 | ||
+ | 타고 동쪽으로 건너와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니 이분이 평해황씨(平海黃氏)의 | ||
+ | 시조가 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유증(裕中)이 용(𤨭)을 낳으니 | ||
+ |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 ||
+ | 조에 들어와 태종대왕 때 휘 우(祐)가 있으니 병조전서(兵曹典書) 증 좌의정이며, | ||
+ | 천계(天繼)를 낳으니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다. 이로부터 후에는 관직에 오름이 | ||
+ |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 ||
- | 낙포공(樂園公) 행장(行狀)략(略) | + | \_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인데, 백씨 정략장군(定畧將軍) 만휴당(晩休堂)과 |
- | 一九九九年 丁卯月 裔孫夏起謹記 | + | 함께 임진난을 겪고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가 산야(山野)에 숨어 취적(取適)하였으며, |
- | 황씨의 선대는 중국의 강하인(江夏人)이다.동한(東漢) 전무(建武) 四년에 배를 타 | + | 세상일을 관망함으로 |
- | 고 동쪽으로 | + | |
- | 氏)의 시조가 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유증(裕中)이 용(墉)을 낳으니 | + | \_고조(高祖)의 휘는 순남(舜南)이요, |
- |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 + | 구석(九錫)이다. 고의 휘는 대진(垈鎭)이며 호는 운포(雲圃)이다. 비(妣)는 |
- | 조에 들어와 태종대왕 때 휘 우(祐)가 있으니 병조전서(兵曹典書) 증 좌의정이며, | + | 수성나씨(壽城羅氏) 사인(士人) 만수(萬洙)의 따님인데 유가(柔嘉)하고 정예(貞嫕)하여 |
- | 계(天繼)를 낳으니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냈다.이로부터 후에는 관직에 오름 | + | 부인의 덕에 배합되어 어김이 없었다. 인조 계유(1633(一六三三))생 이시다.\\ |
- | 이 대대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다. | + | |
- |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인데, | + | |
- | 堂)과 함께 임진난을 겪고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형제가 산야(山野)에 숨어 취적(取 | + | |
- | 適)하였으며, | + | |
- | 고조(高祖)의 휘는 순남(舜南)이요, | + | |
- | (九錫)이다.고의 휘는 대진(垡鎭)이며 호는 운포(雲圃)이다.비(她)는 수성나씨(壽 | + | |
- | 城羅氏) 사인(士人) 만수(萬洙)의 따님인데 유가(柔嘉)하고 정예(貞嫣)하여 부인의 덕 | + | |
- | 에 배합되어 어김이 없었다. 인조 계유(一六三三)생 이시다. | + | |
- | 공을 낳음에 재능이 뛰어나 총명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다름이 있었다. 점점 자라 | + | |
- | 五・六세가 되어 무리지어 노님에 위태한 일은 하지 않았고 웃으며 물러서며 말하 | + | |
- | 기를 「만약 패함에 이르러도 신체를 훼손할 수 없다. 신체를 상하게 되면 부모님은 | + | |
- | 어떠하겠는가? | + | |
- | 찬을 들었고, 일찍이 응하(應夏)에게 수업함에 문의(文意)의 지름길을 잃지 않았다. | + | |
- | 접하였다. | + | \_공을 낳음에 재능이 뛰어나 총명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다름이 있었다. 점점 자라 |
- | 나이 겨우 十七~八세에 문사가 뛰어나 문체를 | + | 5~6(五・六)세가 |
- | 지음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게 뜻을 헤아렸다.스승이나 덕망있는 선비는 추대하지 | + | 말하기를 「만약 패함에 |
- | 않음이 없었고, 가세가 청빈(清貧)하여 양친 봉양이 어려웠으나 맛있는 음식으로 대 | + | 어떠하겠는가? |
- | 일찍이 스스로 | + | 들었고, 일찍이 |
- | (自力)으로 농사지어 집안을 넉넉하게 하고 윤택하게 | + | |
- | 했다. | + | |
- | 성(都城)에서는 관직과 벼슬을 훔친 것을 인정하니' | + | |
- | 기에 어버이에게 무릎꿇고 하지못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나, 도리어 근심을 끼치는 | + | |
- | 것 같아 편안하지 않았다. | + | |
- | 일찍이 | + | |
- | 에 힘쓰고 어린이를 가르치며 숨어살아 겨우 조석(朝夕)의 근심을 면하였으며, | + | |
- | 과 여가가 있을 때에 종당(宗黨)이나 인척(姻戚)이 | + | |
- | 치루지 못함이 있으면 스스로 재물을 내어 반드시 도와주어 때를 | + | |
- | (情)을 펴게 하였다. 또 행인이 궁색하여 말 못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옷을 벗어 | + | |
- | 입혀주었으니 대개 그 어짊과 사랑하심이 이와 같았다. | + | |
- | 부친상을 당함에 슬퍼하기를 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니 정성되고 효성스러움 | + | |
- | 에 유감이 없었고, 묘소를 살펴 배알함이 한달에 한 두 번이 아니었다.모부인(母夫 | + | 나이 겨우 17~8(十七~八)세에 문사가 뛰어나 문체를 지었고, 만사(輓詞)나 뢰사(誄詞)를 |
- | 人)의 탕로(湯爐)가 깊어 몇 해가 되었으나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약을 드리 | + | 지음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게 뜻을 헤아렸다. 스승이나 덕망있는 선비는 추대하지 |
- | 고 미음을 드릴 때는 반드시 몸소 올렸고, 병으로 해수(咳嗽)와 타체(唾涕)가 흐름에 | + | 않음이 없었고, 가세가 청빈(淸貧)하여 양친 봉양이 어려웠으나 맛있는 음식으로 |
+ | 대접하였다.\\ | ||
+ | |||
+ | \_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학문(學問)하는 것은 여력(餘力)으로 하는 일이요. | ||
+ | 자력(自力)으로 농사지어 집안을 넉넉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 ||
+ | 했다. 과업(科業)을 겸하여 일찍이 여러번 향리에서 벗어났으나 이롭지 않았고, | ||
+ | 도성(都城)에서는 관직과 벼슬을 훔친 것을 인정하니, | ||
+ | 아니기에 어버이에게 무릎 꿇고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였으나, | ||
+ | 것 같아 편안하지 않았다.\\ | ||
+ | |||
+ | \_일찍이 본분을 생각하고 힘썼으나 마음이 있지 않았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농사에 | ||
+ | 힘쓰고 어린이를 가르치며 숨어 살아 겨우 조석(朝夕)의 근심을 면하였으며, | ||
+ | 여가가 있을 때에 종당(宗黨)이나 인척(姻戚)이 길흉 대소사(大小事)를 궁핍으로 | ||
+ | 치루지 못함이 있으면 스스로 재물을 내어 반드시 도와주어 때를 잃지 않고 그 정(情)을 | ||
+ | 펴게 하였다. 또 행인이 궁색하여 말 못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옷을 벗어 | ||
+ | 입혀주었으니 대개 그 어짊과 사랑하심이 이와 같았다.\\ | ||
+ | |||
+ | \_부친상을 당함에 슬퍼하기를 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니 정성되고 효성스러움에 | ||
+ | 유감이 없었고, 묘소를 살펴 배알함이 한달에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모부인(母夫人)의 | ||
+ | 탕로(湯爐)가 깊어 몇 해가 되었으나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약을 드리고 | ||
+ | 미음을 드릴 때는 반드시 몸소 올렸고, 병으로 해수(咳嗽)와 타체(唾涕)가 흐름에 | ||
반드시 몸소 빗질하여 드리고 청소하며 자신이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 반드시 몸소 빗질하여 드리고 청소하며 자신이 대신하기를 하늘에 빌었다. 마침내 | ||
회복되었으나 몇 해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니 상례의 모든 절차는 부친상과 같이 | 회복되었으나 몇 해 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니 상례의 모든 절차는 부친상과 같이 | ||
하였고, 슬픔이 가시지 않음에 거문고를 타는 간절한 소리를 내니 감히 지나치지 | 하였고, 슬픔이 가시지 않음에 거문고를 타는 간절한 소리를 내니 감히 지나치지 | ||
- | 않는 뜻을 알 수 있었다.초토(草土) 이후에 번거로운일을 버리고 오직 산수(山水)에 | + | 않는 뜻을 알 수 있었다. 초토(草土) 이후에 번거로운 일을 버리고 오직 산수(山水)에 |
- | 나아가 스스로 만족해하며 작은 집을 낙동강 가에 지어 | + | 나아가 스스로 만족해 하며 작은 집을 낙동강 가에 지어 |
- | 고종 신묘(一八九一)에 우로전(優老典)이 있어 공께 통정(通政)의 품계가 내려졌 | + | |
- | 고기축(一八八九)에 병환이 들어 六월 十六일에 졸하니 수(壽) 七十七세였으며, | + | |
- | 공산(玄空山) 곤좌(坤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안동권씨(安 | + | |
- | 東權氏) 종근(宗根)의 따님으로 二남 그녀를 두었으니, | + | |
- | 종수(宗壽)며 여는 안갑호(安甲鎬)에게 시집갔다.종위의 남은 상구(相九)·영구(永 | + | |
- | 九)·형구(亨九)며、종수의 남은 중구(中九)·치구(致九)·헌구(憲九)이다. 상구의 사 | + | |
- | 자(嗣子)는 병창(昞昶)이다. 영구의 남 병창은 출계했고 다음은 병주(昞柱)며, | + | |
- | 김성경(金聖經)·박승수(朴勝洙)·권태규(權泰奎)·정병락(鄭屏洛)이다. 형극의 사자 | + | |
- | (嗣子)는 병숙(昞淑)이며, | + | |
+ | \_고종 신묘(1891(一八九一)에 우로전(優老典)이 있어 공께 통정(通政)의 품계가 내려졌고, | ||
+ | 기축(1889(一八八九))에 병환이 들어 6(六)월 16(十六)일에 졸하니 수(壽) 77(七十七)세였으며, | ||
+ | 현공산(玄空山) 곤좌(坤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은 | ||
+ | 안동권씨(安東權氏) 종근(宗根)의 따님으로 2(二)남 1(一)녀를 두었으니, | ||
+ | 차남은 종수(宗壽)며 여는 안갑호(安甲鎬)에게 시집갔다. 종위의 남은 | ||
+ | 상구(相九)·영구(永九)·형구(亨九)며, | ||
+ | 상구의 사자(嗣子)는 병창(昞昶)이다. 영구의 남 병창은 출계했고 다음은 병주(昞柱)며, | ||
+ | 김성경(金聖經)·박승수(朴勝洙)·권태규(權泰奎)·정병락(鄭屏洛)이다. | ||
+ | 형구의 사자(嗣子)는 병숙(昞淑)이며, | ||
+ | 병창의 남은 운기(運起)·혁기(赫起)·복기(福起)·호기(虎起)며, | ||
+ | 안충모(安春模)·박기섭(朴基燮)·윤복희(尹復熙)·김지한(金智漢)이다. 병주의 남은 | ||
+ | 학기(鶴起)·용기(龍起)·봉기(鳳起)며, | ||
+ | 홍우석(洪祐石)·권태수(權泰洙)·정창동(鄭昌東)·권녕환(權寧煥)·배영창(裵永昌)이다. | ||
+ | 그 나머지 자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 ||
- | 다. 병창의 남은 윤기(運起)·혁기(赫起)·복기(福起)·호기(虎起)며, | + | \_아! 내가 향린(鄕隣)의 후생으로 후미진 곳에서 살다보니 우러르지 못했는데, 이제 |
- | 春模)·박기섭(朴基燮)·윤복희(尹復熙)·김지한(金智漢)이다.병주의 남은 학기(鶴 | + | 봉구(鳳九)씨가 행장을 청하나 숨겨진 것을 밝힘에 행장이 실재의 만분의 일이나 |
- | 起)·용기(龍起)·봉기(鳳起)며, | + | 되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그 뜻을 완미(玩味)하면 타고난 성품이 이미 돈후(敦厚)하여 |
- | 東)·권녕환(權寧煥)·배영창(裵永昌)이다.그 나머지 자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 + | 문학(文學)으로써 구제(救濟)하였고, |
- | 않는다. | + | 성실하였음을 알 것이다. 남의 위급함을 헤아려 마땅히 베풀어 주었으며, |
- | 아! 내가 향린(鄉隣)의 후생으로 후미진 곳에서 살다보니 우러르지 못했는데'이 | + | |
- | 제 봉구(鳳九)씨가 행장을 청하나 숨겨진 것을 밝힘에 행장이 실재의 만분의 일이나 | + | |
- | 되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그 뜻을 완미(玩味)하면 타고난 성품이 이미 돈후(敦厚)하 | + | |
- | 여 문학(文學)으로써 구제(救濟)하였고, | + | |
- | 하였음을 알 것이다. 남의 위급함을 헤아려 마땅히 베풀어 주었으며, | + | |
친하고 성김을 가리지 않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대하였다. 팔순에 임천(林泉)에서 | 친하고 성김을 가리지 않고 모두 기쁜 마음으로 대하였다. 팔순에 임천(林泉)에서 | ||
- | 너그럽게 즐기며 한가롭게 살아 다툼이 없었으니, | + | 너그럽게 즐기며 한가롭게 살아 다툼이 없었으니, |
- | 에 도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돌아보건대 내가 늙어 황필(荒筆)이고 또 짧고 난삽 | + | 도모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돌아보건대 내가 늙어 황필(荒筆)이고 또 짧고 난삽(難澁)한 |
- | (難澁)한 글로 부득이 장황(張皇)하게 행장(行狀)을 쓰나 어찌 능히 후사(後嗣)의 효 | + | 글로 부득이 장황(張皇)하게 행장(行狀)을 쓰나 어찌 능히 후사(後嗣)의 효도를 |
- | 도를 생각하는 마음에 부합되겠는가? | + | 생각하는 마음에 부합되겠는가? |
- | 움을 청할 뿐이다. | + | \_\_영가 후인 권준희(權準羲) 찬함. |
- | 영가후인 권준희(權準羲) 찬함。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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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3.174927145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3:4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