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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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9-001 [2025/05/17 09:32] – ssio2 | c9-001 [2025/05/23 20:39]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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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공의 성은 황씨요 휘(諱)는 서(瑞)니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으니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또 고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찾아보면 첨의(僉議) 주열(朱悅)과 좌정승(左政承) 한종유(韓宗愈)와 지첨의(知僉議) 황서(黃瑞)와 전서(典書) 양사도(梁思道)와 시중 차원부 등 5인이 동시에 문절(文節)로 시호를 받았다 하니 충분한 증거이고 충(忠)자가 문(文)자로 바뀌었다 하나 위선(衛先)의 도(道)에 무방하다 하겠다. \\ | \_공의 성은 황씨요 휘(諱)는 서(瑞)니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하였으니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또 고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찾아보면 첨의(僉議) 주열(朱悅)과 좌정승(左政承) 한종유(韓宗愈)와 지첨의(知僉議) 황서(黃瑞)와 전서(典書) 양사도(梁思道)와 시중 차원부 등 5인이 동시에 문절(文節)로 시호를 받았다 하니 충분한 증거이고 충(忠)자가 문(文)자로 바뀌었다 하나 위선(衛先)의 도(道)에 무방하다 하겠다. \\ | ||
- | \_시조의 휘는 낙(洛)이니 한(漢)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 신묘에 출생하여 수화(綏和) 계축에 대장군 강하후(江夏侯)로 봉함을 받았는데 광무(光武) 4년 무자에 갑고의 아들 휘 온인(溫仁)은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를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평해의 선조시고 1세를 지나 휘 유중(裕中)은 문하시중으로 삼남을 두셨으니 백씨의 휘는 진(璡)이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요 계씨의 휘는 용(庸)이니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으로 시호는 충경(忠敬)이요 중씨(仲氏)는 곧 공이시다. \\ | + | \_시조의 휘는 낙(洛)이니 한(漢)나라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 신묘에 출생하여 수화(綏和) 계축에 대장군 강하후(江夏侯)로 봉함을 받았는데 광무(光武) 4년 무자에 갑고의 아들 휘 온인(溫仁)은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를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평해의 선조시고 1세를 지나 휘 유중(裕中)은 문하시중으로 삼남을 두셨으니 백씨의 휘는 진(璡)이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이요 계씨의 휘는 용(𤨭)이니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으로 시호는 충경(忠敬)이요 중씨(仲氏)는 곧 공이시다. \\ |
\_공의 일가에 이와 같이 벼슬이 혁혁한데도 세상에 많이 나타나지 못한 것은 자손된 자의 한이 아닐 수 없다. 자고로 국가의 성쇠도 무상하고 사람의 흥찬(興贊) 또한 때가 있는 법. 세월이 오래되고 증거도 인멸되어 있는데 자손들이 사적(史蹟)을 고증하여 밝혀서 후손에게 전하여 알게 한다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 | \_공의 일가에 이와 같이 벼슬이 혁혁한데도 세상에 많이 나타나지 못한 것은 자손된 자의 한이 아닐 수 없다. 자고로 국가의 성쇠도 무상하고 사람의 흥찬(興贊) 또한 때가 있는 법. 세월이 오래되고 증거도 인멸되어 있는데 자손들이 사적(史蹟)을 고증하여 밝혀서 후손에게 전하여 알게 한다는 것은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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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그러나 보본(報本)하고자 하는 정(情)과 우모(寓慕)하고 싶은 성(誠)이 없을 수 없기에 원근의 자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기로 논의를 정하고 세명(世明)과 보(甫)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비명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 등이 족보와 고려사(高麗史)에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현들의 손에 의해 기록된 당시의 사행(事行)과 휘적(徽蹟) 등을 한 조각도 고증할 자료가 없으니 전하는 말만 가지고 만족할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선생의 고명하신 붓으로 상(上)과 하(下)를 참고하고 여러 기록들을 증거로 보완하여 후세 자손에게 전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라 내가 정신도 희미하고 병든 몸으로 감히 부탁을 받을 수 없어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하여 가지고 온 행장을 살펴보니 공이 충렬(忠烈), | \_그러나 보본(報本)하고자 하는 정(情)과 우모(寓慕)하고 싶은 성(誠)이 없을 수 없기에 원근의 자손들이 뜻을 모아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기로 논의를 정하고 세명(世明)과 보(甫)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비명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의 관작(官爵)과 시호(諡號) 등이 족보와 고려사(高麗史)에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현들의 손에 의해 기록된 당시의 사행(事行)과 휘적(徽蹟) 등을 한 조각도 고증할 자료가 없으니 전하는 말만 가지고 만족할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선생의 고명하신 붓으로 상(上)과 하(下)를 참고하고 여러 기록들을 증거로 보완하여 후세 자손에게 전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라 내가 정신도 희미하고 병든 몸으로 감히 부탁을 받을 수 없어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지못하여 가지고 온 행장을 살펴보니 공이 충렬(忠烈), | ||
- | \_조의 휘는 우정(佑精)이니 군기소윤(軍器少尹)이요, | + | \_조의 휘는 우정(佑精)이니 군기소윤(軍器少尹)이요, |
\_아!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벼슬이 있었으니 전광찬후(前光贊後)하는 것은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자손이 더욱 번성한데 우모(寓慕)할 곳이 없다는 것은 공을 위하여 미안하고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23세 사손(嗣孫)인 재우(載宇)가 나를 찾아 와 명(銘)을 청하니 후생된 자 어찌 감히 사양만 하리요. 가지고 온 행장을 살펴서 위와 같이 기술하고 이어서 명을 하니 명왈(銘曰) \\ | \_아!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벼슬이 있었으니 전광찬후(前光贊後)하는 것은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자손이 더욱 번성한데 우모(寓慕)할 곳이 없다는 것은 공을 위하여 미안하고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23세 사손(嗣孫)인 재우(載宇)가 나를 찾아 와 명(銘)을 청하니 후생된 자 어찌 감히 사양만 하리요. 가지고 온 행장을 살펴서 위와 같이 기술하고 이어서 명을 하니 명왈(銘曰) \\ |
c9-001.1747441927.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7 09:3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