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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 <WRAP 42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先府君家狀\\ 先府君諱世基字子平姓黃氏系出平海黃氏自羅代上世 爲望族於東方冠冕奕世而譜失無徵焉在麗朝連以文章 節行克世其家當我 太祖龍興也有諱希碩佐成開濟業 於府君爲十一代祖高祖諱紐行龍驤尉副護軍公少孤自 春川南徙興城興之有黃氏自此始曾祖諱慶中司宰主簿 祖諱以厚累擧不中悃幅樂善有古人風考諱宗爀妣完山 李氏進勇校尉磊之女以崇禎戊辰六月初六日生府君于 興城龜壽里離任之夕李氏夢黑龍飛騰入寢舍俄而漸微 小李氏驚恨知有高世之姿而終復屯邅也生而穎悟甫學 語李氏持五顆柿戲曰能一時盡取乎府君即於左右手各 取一顆挾于兩腋又取一顆含于口徐復以手各持一顆而 起李氏大奇之七歲能賦詩語輒驚人嘗從游奇進士振鐸 進士噐之其仲子松巖先生挺翼待以畏友二十七中發解 遊京城一世名公如李相慶億爭愛賞焉府君志氣慷慨俯 視濁世卞覈臧否無所顧憚俗子輩競媦疾不已丁酉府君 年三十爲邑宰所陷害蹇蹇窮阨迨三五年庚子丁內憂自 後無意世事以嚴君命黽勉赴擧連收京鄕諸試而卒不成 名時論寃之庚戌丁外憂服除遂杜戶不出以書史自娛乙 卯時事遽變在朝賢類相繼斥黜府君雖布衣家居猶恐禍 及己慨然有遺世志隱居瀛洲之海村其地江山幽憂迥隔 塵臼府君樂之愁憂無聊必飮酒飮輒至醉醉後高談不遜 時輩乘勢措捏府君未少屈也庚申三月晦日以病終于鞍 峴靜居是年五月十四日葬于菖蒲洞壬坐之原府君娶慶 州金氏竹亭先生玄孫學生鼎鉉之女生二男二女男長載 萬次不肖孤載重女長適李益懋高潔類府君次適崔倜早 死李室女有一女載萬前娶河西先生玄孫生一女繼娶高 士金灌之孫生一男一女載重娶士人宋范女生一男二女 金氏後十七年卒將祔葬竁中有水害因遷祔于道里金先 塋側府君姿性勤厚接人薰然以和言笑樂易至見有非義 則斥絕不容若將浼焉淸介寡欲家貧屢空而汚賤之物視 如惡臭也所喜𥍊故至懽然供具酒食不復計甔石已空也 遭內艱時益窮空送終不能如禮豐備府君痛貫心骨每念 及悲哭少有恙材爲文操筆立成不加點餙與時文程式不 同以此不見知於世性嗜酒日飮數甌徹醺杖屨尙羊于魚 磯幽溪之澗興至飮一深盃題一絕詩詩罷忼慨悵望千古 一日無朝餽我毋氏悶之府君以詩慰曰室人告余無朝饋 笑而不答心自安母氏知其意不復告嘗靜坐江干見一白 𩿨翛然獨立于磯上乃作歌其亂曰世間無友人兮與之遊 如何亦測其出壁之想也與高汝興柳必源韓翊愼元萬友 善以文行相尙高學於義村尹先生踐履敦篤府君尢愛重 之衣食與共之常講究近思錄心經二書高死府君服緦哀 泣其敦乎朋友皆此類也尤潔淸貌視名位李西河公嘗來 游興城諸名士爭奔走致情西河公素知府君名欲與相見 府君以書謝曰道苟同不面而面道不同面而不面西河答 曰往來南中稔聞高義此來病伏無緣承誨其見重於名卿 每如此重惟府君窮困以沒而載重又無所肖似不克顯揚 志業敢敍次生卒之詳以爲請文作者資\\ \_\_崇禎戊辰之後七十六年癸未七月日\\ \_\_不肖孤載重泣血謹狀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 \_선부군(先府君)의 휘(諱)는 세기(世基)요 자(字)는 자평(子平)이니, 성은 황씨(黃氏)요 계통은 평해황씨(平海黃氏)에서 나왔다. 신라 시대 상대(上世)로부터 망족(望族, 이름난 가문)이 되어 동방(東方)에서 관면(冠冕, 명문가)으로 대대로 이어졌으나, 족보가 없어져 증빙할 길이 없다. 고려조에 들어서는 연이어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그 집안을 대대로 세상에 떨쳤다.\\ \_우리 태조(太祖)께서 용흥(龍興, 창업)하실 때 휘 희석(希碩)이 계셔서 개국(開國)의 업(業)을 도우셨으니, 부군에게는 11대조가 되신다. 고조(高祖)의 휘는 뉴(紐)이니 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셨다. 공(公)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춘천에서 남쪽으로 흥성(興城)으로 옮겨 사셨으니, 흥성에 황씨가 있게 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증조의 휘는 경(慶)이니 사재(司宰) 주부(主簿)였고, 할아버지(祖)의 휘는 이후(以厚)이니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했고 성품이 도탑고 즐겨 선을 행하여 고인(古人)의 풍모가 있었다. 아버지(考)의 휘는 종혁(宗爀)이요, 어머니(妣)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진용교위(進勇校尉) 뇌(磊)의 딸이다.\\ \_숭정(崇禎) 무진년(戊辰年, 1628) 6월 초엿샛날 부군을 흥성 구수리(龜壽里)에서 낳으셨다. 부군이 태어나기 전날 저녁 이씨(모친)께서 흑룡(黑龍)이 날아올라 침소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는데, 얼마 뒤 점차 작아졌다. 이씨는 놀랍고 한스럽게 여기면서도 고세(高世)의 자질이 있으되 끝내 다시 둔전(屯邅, 곤궁함)을 겪을 것임을 알았다.\\ \_태어나면서부터 영오(穎悟, 총명)하였다. 막 말을 배울 무렵 이씨가 감 다섯 개를 가지고 장난삼아 이르기를 "한꺼번에 다 가질 수 있겠느냐" 하니, 부군이 즉시 좌우 손에 각각 하나씩 쥐고 양쪽 겨드랑이에 하나씩 끼우고 또 하나는 입에 물고서 천천히 다시 손으로 각각 하나씩 들고 일어나니, 이씨가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_일곱 살에 능히 시를 지으니 말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일찍이 진사 기진탁(奇進鐸)을 따라 종유(從遊)하였는데, 진사가 그릇으로 여겼다. 그 둘째 아들 송암선생(松巖先生) 정익(挺翼)은 부군을 외우(畏友, 존경하는 벗)로 대하였다. 스물일곱에 발해(發解, 향시)에 합격하여 경성(京城)에 유학(遊學)하였는데, 당대의 명공(名公)들 예컨대 상국(相國) 이경억(李慶億) 같은 이들이 다투어 아끼고 칭찬하였다.\\ \_부군은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여 흐린 세상을 굽어보며 시비를 가림에 거리낌이 없으시니, 속된 무리들이 다투어 미워하고 시기함이 그치지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부군이 서른 살에 읍재(邑宰, 고을 수령)에게 모함을 당하여 곤궁과 궁액(窮阨)이 3, 5년에 이르렀다. 경자년(庚子年)에 내우(內憂, 모친상)를 당하였다. 그 뒤로는 세상일에 뜻이 없었으나 엄군(嚴君, 부친)의 명으로 힘써 과거에 응시하여 연이어 경향(京鄕)의 여러 시험에 합격했으나 끝내 명성(名成)을 이루지 못하니, 당시 여론이 이를 원통히 여겼다.\\ \_경술년(庚戌年)에 외우(外憂, 부친상)를 당하고 복(服, 3년상을 말함)이 끝난 뒤로는 마침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며 서사(書史, 경서와 역사서)로써 스스로 즐기셨다. 을묘년(乙卯年)에 시사(時事)가 갑자기 변하여 조정에 있던 어진 이들이 잇달아 배척당하여 쫓겨나니, 부군은 비록 포의(布衣)로 집에 계셨으나 오히려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개연히 세상을 등질 뜻을 품고 영주(瀛洲)의 해촌(海村)에 은거하셨다. 그 땅은 강산(江山)이 그윽하고 아득하여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부군이 이를 즐기셨다.\\ \_근심과 무료함이 있으면 반드시 술을 마셨는데 마시면 문득 취하도록 마셨고, 취한 뒤에는 고담(高談)을 나누며 시류(時流)에 굽히지 않으셨다. 시배(時輩)들이 세력을 타고 모함하려 하였으나 부군은 조금도 굽히지 않으셨다.\\ \_경신년(庚申年) 3월 그믐날 병으로 안현(鞍峴) 정거(靜居)에서 별세하시니, 이 해 5월 14일 창포동(菖蒲洞)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_부군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죽정선생(竹亭先生)의 현손(玄孫)인 학생(學生) 정현(鼎鉉)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으셨다. 아들은 맏이가 재만(載萬)이요 다음은 불초고(不肖孤, 상주 자신) 재중(載重)이며, 딸은 맏이가 이익무(李益懋)에게 시집갔는데 고결함이 부군을 닮았고, 다음은 최척(崔倜)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이실(李室, 맏딸)에게는 딸 하나가 있다. \\ \_재만은 전처가 하서선생(河西先生)의 현손이었는데 딸 하나를 낳았고, 계실(繼室)은 고사(高士) 김관(金灌)의 손녀로 1남 1녀를 낳았다. 재중(자신)은 사인(士人) 송범(宋范)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김씨(부인)가 17년 뒤에 별세하여 나중에 부장(祔葬)하려 하였으나 광중(壙中)에 수해(水害)가 있어 이로 인해 도리(道里)의 김씨 선영(先塋) 곁으로 옮겨 부장하였다.\\ \_부군은 자성(姿性)이 근후(勤厚)하시어 사람을 대함에 온화한 기운으로 화기롭게 말씀하시고 웃으시며 즐겁고 편안하셨으되,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물리치고 용납지 않으시어 마치 자신이 더럽혀질 듯이 여기셨다. 청개(淸介)하고 욕심이 적으시어 집이 가난하여 자주 궁핍하였으나 더럽고 천한 재물은 마치 악취처럼 여기셨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옛 친구가 이르면 흔쾌히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되 다시 곳간이 빈 것을 헤아리지 않으셨다.\\ \_내간(內艱, 모친상)을 당하셨을 때는 더욱 궁핍하여 상을 치르는 예를 예법대로 넉넉히 갖추지 못하시니, 부군이 이를 뼈에 사무치게 아파하시어 매양 이를 생각하실 때마다 슬피 우셨다. 조금이라도 병이 있는 이가 글을 지으라 하면 붓을 잡아 즉시 이루시되 점철(點餙, 손질)을 더하지 않으셨는데, 당시 문장의 격식과는 같지 않으셨으니 이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셨다.\\ \_성품이 술을 즐기시어 날마다 여러 사발을 마시고 몹시 취하도록 지팡이와 신발로 물가와 그윽한 계곡 사이를 소요(逍遙)하시다가 흥이 이르면 큰 잔으로 한 잔 마시고 절구(絕句) 한 수를 지으시며, 시를 짓고 나면 강개(慷慨)히 천고(千古)를 슬피 바라보셨다.\\ \_하루는 아침에 밥 지을 것이 없었는데 우리 모친께서 이를 근심하시니, 부군이 시로써 위로하여 이르시되 "室人告余無朝饋 아내가 나에게 아침 끼니가 없다 고하기에, 笑而不答心自安 웃으며 답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절로 편안하다" 하시니, 모친께서 그 뜻을 아시고 다시는 고하지 않으셨다.\\ \_일찍이 강가에서 조용히 앉아 계시다가 백구(白鷗) 한 마리가 초연히 홀로 물가 바위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이에 노래를 지으셨는데, 그 난(亂, 결어)에 이르시되 "世間無友人兮, 與之遊 세간에 벗할 사람 없으니 저것과 더불어 노닐리라" 하셨으니, 어찌 그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헤아릴 수 있으리오.\\ \_고여흥(高汝興), 유필원(柳必源), 한익신(韓翊愼), 원만우(元萬友)와 더불어 문행(文行)으로 서로 숭상하였는데, 고(高)는 의촌(義村) 윤선생(尹先生)에게 배워 실천이 돈독하였다. 부군이 더욱 아끼고 중히 여기시어 의식(衣食)을 함께 하시고 늘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두 책을 강구(講究)하셨는데, 고(高)가 죽자 부군이 시최(緦, 석 달 상복)를 입고 슬피 곡하셨으니, 그 붕우(朋友)에게 돈독함이 이와 같았다.\\ \_더욱이 청렴결백하시어 명위(名位)를 도외시하셨다. 이서하공(李西河公)이 일찍이 흥성에 유람 오시니 여러 명사(名士)들이 다투어 달려가 정성을 다하였는데, 서하공은 평소 부군의 명성을 알고 서로 만나고자 하였다. 부군이 편지로 사양하여 이르시되 "道苟同不面而面道不同面而不面 도(道)가 진실로 같다면 만나지 않아도 만난 것이요, 도가 같지 않다면 만나도 만나지 않은 것과 같다" 하시니, 서하공이 답하여 이르되 "往來南中 남쪽 지방을 왕래하며 稔聞高義 그대의 높은 의(義)를 익히 들었는데, 此來病伏 이번 길에 병으로 누워 無緣承誨 가르침을 받을 인연이 없었다" 하였으니, 그 명경(名卿)에게 존중받음이 매양 이와 같았다.\\ \_다만 생각건대 부군께서 곤궁하게 지내시다 세상을 떠나셨는데, 재중(載重, 글쓴 이) 또한 닮은 바가 없어 능히 그 뜻과 학업을 드러내지 못하니, 감히 생졸(生卒)의 상세함을 서술하여 이로써 만사(挽詞)와 문(文)을 짓는 이들에게 자료가 되고자 청하는 바이다.\\ \_\_숭정(崇禎) 무진(戊辰) 이후 76년 계미년(癸未年, 1703) 7월 일\\ \_\_\_\_불초고(不肖孤) 재중(載重) 읍혈근장(泣血謹狀)\\ \_\_(Claude 번역, Sonnet5, 2026/07/12) </typo>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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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6/07/12 10:01 저자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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