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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사헌부지평황공전지제단비(通訓大夫司憲府持平黃公銓之祭壇碑)=== <WRAP 35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_通訓大夫司憲府持平黃公銓之祭壇碑\\ 此故通訓大夫司憲府持平黃公之墓也日其傍後孫順變世燮甫袖其先蹟一通屬晉 秀以顯刻之文余以耄聩惡能當是寄固辭不獲按公諱銓姓黃氏始祖諱溫仁麗朝官 金吾將軍太子檢校居平海月松子孫貫平海始此歷數世有諱璡檢校軍資監於公五 世祖也曾祖諱原老號七林亭登第宰寧海府祖諱瑾文科直提學考諱有定號米囷入 我朝工曹判書自少至老愛誦論語一部鄕人稱之以米囷先生出仕中外晩以謝病南 歸掃灑軒楣於龜城之下城底里第即三判書古宅是也妣\_貞夫人奉化鄭氏尙書云 敬女生三子長銓即公次鉉成均館大司成次鋋生員訓導三棣聯芳詳見榮州誌公生 于元至正癸卯卒于我\_太廟辛卯而文獻無徵固無可據之籍但書之於舊譜小<fc #ff0000>紸</fc>云 十六魁三試二十一又魁三試而壽不過四十餘薦授司憲府持平知淸道郡事卒于官 邸學文德行恢弘當時竟不能需時澤世而其遺文亦沒無傳是不惟爲子孫無窮之恨 竊惟傍後孫錦溪草谷梅窓諸先碩竝萃於堂廡之間而代不甚遠或可傳聞垂示而杳 無一言則固不恨哉配淑人固城李氏三司希泌女墓郡東斗月里德洞判書公墓同崗 負卯之原合兆生三男一女長孟夏生員次仲夏生員出系仲父大司成后三季夏鑑察 女權孝騫進士其嗣孫曰秉益餘不錄嗚呼今距公之世五百餘年之久而其德行文獻 必有可傳者世遠不得其詳後昆寢替未嘗表其墓道其仲季兩公後孫秉三漢柱海鎭 合謀竪碣如右云系以銘曰\_於赫箕黃顯允麗季名公巨卿庶承連世至于剛州迺創 米囷孝悌仁義體先循循德洞之邃衣履之阡父子同原永世省筵亦合延初千秋重伉 推公終始豈弟周詳我揭銘詩昭示無彊\\ \_\_歲戊午十月上浣\\ \_\_\_\_延城後人\_金晉秀謹撰\\ \_\_\_\_後裔孫\_鎬鎭謹書 </typo> </hidden> \\ \_통훈대부 사헌부지평 황공 전 제단비\\ \_여기는 옛날 통훈대부로서 사헌부지평을 지낸 황공 전(銓)의 묘이다.\\ \_어느 날 그 방후손(傍後孫)인 순섭(順燮)과 세섭(世燮) 선비가 그 선대의 사적(事跡) 한통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 진수(晉秀)에게 비문(碑文)을 지을 것을 위촉하거늘 나는 늙고 귀먹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어찌 이 부탁을 감당할 수 있으리오 그래서 못 짓겠다고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_상고해 보면 공의 휘는 전(銓)이고 황씨인데 시조의 휘는 온인(溫仁)이니 고려조에서 금오장군 태자검교였으며 평해의 월송에서 살았으니 자손들이 평해를 본관(本貫)으로 삼은 것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_이로부터 몇 대를 내려와 휘 진(璡)이 있었으니 그는 검교군자감(檢校軍資監)인데 공(公)에게는 5세조(五世祖)가 되는 분이다. 또 공의 증조할아버지의 휘는 원로(原老)이니 호가 칠림정(七林亭)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영해부사(寧海府使)였고, 할아버지의 휘는 근(瑾)인데 문과에 올라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유정(有定)이니 호가 미균(米囷)인데 조선조에 들어와 공조판서가 되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논어 일부를 애송(愛誦)하니 향인(鄕人)들이 미균(米囷: 쌀창고 [註] 古書에 문장을 잘하는 이를 곡식이 풍성하다고 한데서 비유하는 것으로 생각됨)선생이라고 불렀다.\\ \_벼슬은 내직과 외직을 거치고 늙어서 병(病)을 이유로 낙향(落鄕)하여 구성(龜城) 아래 동리의 자택(本家)에서 소쇄헌(掃灑軒)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것이 곧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봉화정씨(奉化鄭氏)인데 상서(尙書)를 지낸 운경(云敬)의 딸이니 세 아들을 낳았다.\\ \_그 맏은 전(銓)이니 바로 공(公)이고, 둘째는 현(鉉)이니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였고, 그 다음은 연(鋋)이니 생원 훈도(訓導)였다.\\ \_이 삼형제가 다 과거에 올라 벼슬을 하였으니 이는 영주군지(榮州郡誌)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공은 원(元)나라 지정(至正) 계묘(癸卯)(공양왕 12(一二)년 1363(一三六三))에 출생하여 조선조 태종(太宗) 11(一一)년 신묘(辛卯 1411(一四一一))에 서거하였는데 근거가 될 수 있는 문헌이 없고, 다만 옛 족보 작은주(小註)에 적혀 있기를 16(一六)세에 삼시(三試)에 장원을 했고, 21(二一)세에 또 삼시(三試)에 장원을 했으며, 나이는 불과 40(四○)여세에 지나지 않았으며, 벼슬은 천거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또 청도군수(淸道郡守)가 되었는데 그 관저(官邸)에서 서거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넓고 컸으나 당시 시대에 쓰여져서 세상에 은택을 남길 수가 없었으며, 또 그 남긴 글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자손된 자로서 끝없는 통한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방후손(傍後孫)인 금계(錦溪)와 초곡(草谷)과 매창(梅窓)등 여러 선대의 석학들이 아울러서 당무(堂廡)에 모아 놓아서 세대(世代)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아서 혹은 전해서 드리워 볼 수가 있었을 텐데 묘연히 한마디도 없게 되었으니 즉 진실로 한스럽지 않겠는가?\\ \_배(配)는 숙인(淑人) 고성(固城) 이씨인데 삼사(三司) 희필(希泌)의 딸이다. 묘소는 군 동쪽 두월리(斗月里)의 덕동(德洞) 판서공 묘와 같은 산언덕 묘방(卯方)을 등지고 내외분 함께 합봉(合封)했다. 공은 삼남 일녀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맹하(孟夏)이며 생원(生員)이었고, 차남은 중하(仲夏)인데 출계(出系)하여 중부(仲父)인 대사성(大司成)의 자손으로 되었다. 삼남은 계하(季夏)인데 감찰(鑑察)이었고, 딸은 권효건(權孝騫)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진사 (進士)이다. 그 종손은 병익(秉益)이며 그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겠다.\\ \_오호라! 공은 지금부터 오백여년이나 오래되었으니 그 덕행과 문헌이 필히 전해짐이 있을 터인데, 세월이 너무 지나 그 상세함을 얻지 못하고, 또 후손들이 침체되어 일찍이 그 묘소에 표석(表石)도 세우지 못했으니 그 둘째와 셋째 아들 후손 중 병삼(秉三), 한주(漢柱), 해진(海鎭) 등이 계획 의논 합의하여 비석(碑碣)을 세우기로 하였으니 좌(左)와 같이 이에 명(銘)하노라.\\ 이 명(銘)에 이르기를\\ 於赫箕黃 아! 빛나도다 기성황씨(箕城黃氏)는 \\ 顯允麗季 진실로 고려 말기에 뚜렷이 나타났도다.\\ 名公巨卿 명공거경(名公巨卿)들이 \\ 庶承連世 대를 이어 계속 이어져 왔도다.\\ 至于剛州 강주(剛州) 땅에 이르러 \\ 迺創米囷 이에 미균(米囷)선생이 나타나시어 \\ 孝悌仁義 효제(孝悌)와 인의(仁義)를 행하며 \\ 體先循循 몸소 앞장서서 선대의 착함을 본 받았도다.\\ 德洞之邃 덕동(德洞)의 깊숙한 곳은 \\ 衣履之阡 옷과 신발을 함께 묻은 무덤을 이루셨네.\\ 父子同原 부자간에 같은 산에 산소를 함께 했으니\\ 永世省筵 영세토록 산소를 보살펴 모실 것이네.\\ 亦合延初 또한 부부간에도 합장을 하니\\ 千秋重伉 천추에 무거운 짝이 되었도다.\\ 推公終始 공을 추모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 豈弟周詳 즐거운 정이 두루 상세하게 어울렸더라.\\ 我揭銘詩 나의 글을 실어 새겨 놓으니\\ 昭示無彊 오랫동안 밝게 보여질진저.\\ \_\_해는 무오(1878(一八七八)) 10(一○)월 상순\\ \_\_\_\_연성후인(延城後人) 김진수(金晉秀)는 삼가 짓고\\ \_\_\_\_후손 호진(鎬鎭)은 삼가 쓴다.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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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7 16:20 저자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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