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으로 건너뛰기
평해황씨대동보 문헌록
사용자 도구
등록
로그인
사이트 도구
검색
도구
문서 보기
이전 판
역링크
최근 바뀜
미디어 관리자
사이트맵
등록
로그인
>
최근 바뀜
미디어 관리자
사이트맵
추적:
b-016
이 문서는 읽기 전용입니다. 원본을 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관리자에게 문의하세요.
===병진대동보서(丙辰大同譜序) (1976년)===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平海黃氏世譜丙辰重刊序**\\ 惟吾黃之得姓이 歷代가 亦古矣라 肇自學士公諱洛中國漢朝에 奉使交趾라가 漂到于東國하야 抵于平海月松崛山之下하사 子孫이 仍爲貫하다 裔孫이 有三兄弟하니 長曰甲古니 箕城君이요 次曰乙古니 長水君이요 三曰丙古니 昌原伯이라 三貫之子孫이 散在八域者| 其麗不億이나 然이나 平海之祖는 諱甲古以後로 有諱溫仁官金吾將軍太子檢校요 曾孫에 有三兄弟하니 長의 諱는 璡이니 官檢校요 次의 諱는 瑞니 官金紫光祿大夫評理門下侍中諡는 文節이요 三의 諱는 𤨭이니 官大匡輔國崇祿大夫諡는 忠敬이라 分爲三派하야 同聲相應하며 同氣相救러니 世代寢遠하야 後裔繁盛이나 是는 一祖之孫이라 古人張公藝는 九世同居하야 爲一家之親하니 如此譬之컨대 惟我도 即以一家之親이로다 以一家之親으로 大同合譜하면 豈不爲慕先裕後之本意리요 於乎라 倫綱이 頹廢하고 族誼가 疎遠하니 庸是爲懼라 自數年前으로 世元氣淸德出및 僉宗이 累次討論한바 齋室狹窄으로 奠祀時遠近諸宗祭官이 會合하야 一夜宿泊에도 困難이 莫甚하와 因宗會而公議한 結果 他郡僉宗과 渡海한 宗人浚九與宗人諸位로 書詢面議하야 發此通諭하니 雖是經濟之困難이나 顧其齊室이 狹窄則不得<fc #ff0000>己</fc>라하며 幾年間으로 黽勉竣功後에 又舊齊室及㕏舍가 年久歲深하야 風磨雨酒로 柱椽이 朽敗하야 廢室之境也라 宗會席上에서 爛相公議나 束手無策이러니 此際議論會席에 適時在日宗人後九來參하야 寒心한 光景을 視之하고 單獨으로 竭力誠意하야 壹百數拾萬원 贊助金으로 元像復舊竣功하니 慕先의 誠心은 永世不忘이라 及當此時하야 齋宇上下室과 㕏舍는 己畢完工이나 分貫之祖箕城君以下四代位와 祭壇堅碑及祭壇入門室을 增築重建으로 自榮州世明의 通諭文에 因하야 宗會席上에서 公議發文하와 各處指定有司派遣이나 特遣有司는 慶州潤範靑松永浩榮州世明이 二個星霜으로 各道各郡邑收金中에 夜則宿泊은 不溫하고 晝則風雨를 不避하며 幾百萬원의 贊助金을 收集하야 立碑及祭壇完築과 門樓를 竣功하니 雖幾百歲之後라도 어찌 爲先의 矜事가 되지 않으리요 然則其工事에 監視者는 氣淸鎭玄君也요 且昨年十月中丁日前夕에 自會長及某某僉宗으로 本他道郡僉宗會會席上에 告之曰自甲戌大同譜以後로 其中間에 各修派譜나 然이나 當今之時하야 後世子孫이 年代沈遠하고 規模節次도 未詳하리니 此時에 大同合譜가 如何오 問議則宗中僉員이 咸曰唯唯之說을 贊同이라 其後豐基永宗淸安麟模로 相議而發刊通文하야 各處配送後各其各派收單하야 正抄之所則特設於平海月松先齋하니 平海는 即始祖樹貫之鄕而先齋는 即裔孫追遠之所也라 始祖裔孫으로 敦睦講誼하야 綠事會同合力하면 盡心所感에 必無爾我라 事歸神速而必成合單하야 敦畢大事면 存一髮於殘機하고 講百世於同篇이면 上以承傳來父老之餘戒요 下以遺後來子孫之明案이라 敢以僭妄之說로 遂其所感하야 略敍顚末云爾\\ \_\_檀紀四三〇九年歲在丙辰小春上澣後裔孫載宇謹序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병진보(丙辰譜) 서문(序文)**\\ \_우리 황씨(黃氏)가 득성(得性)한 역사는 또한 오래되었다.\\ \_일찍이 학사공(學士公) 휘(諱) 낙(洛)께서 중국의 한(漢)나라 조정에서 교지(交趾)<sup>주1</sup>에 사신(使臣)으로 가셨다가 표류(漂流)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여 평해(平海)의 월송(月松) 굴산(崛山) 밑에 살았기 때문에 자손들이 평해(平海)를 관향(貫鄕)으로 했다.\\ \_후손(後孫)이 삼형제가 있었으니 맏이는 갑고(甲古)이니 기성군(箕城君)이요 둘째는 을고(古)이니 장수군(長水君)이요 셋째는 병고(丙古)이니 창원백(昌原伯)이다.\\ \_세 관향(貫鄕)을 가진 황씨의 자손이 팔역(八域)<sup>주2</sup>에 흩어져 사는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조상은 휘(諱) 갑고(甲古) 이후로는 휘(諱) 온인(溫仁)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벼슬을 지낸 분이 있으며 증손자(曾孫子)에 삼형제가 있으니 맏이는 휘(諱)가 진(璡)이며 벼슬은 검교(檢校)요 둘째는 휘(諱)가 서(瑞)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 벼슬을 하여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며 셋째는 휘(諱)가 용(𤨭)이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벼슬을 하여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 \_이 삼형제가 삼파(三派)로 나누어져서 한 목소리로 서로 호응하고 같은 기미(氣味)로 서로 도우며 살았으나 세대(世代)가 점점 멀어져서 후손이 번성하였지만 이는 모두 한 할아버지 자손이다. 옛날 장공예(張公藝)는 아홉 대(代)의 자손이 함께 살면서 한 집에서 친하게 살았으니 이 같은 사실(史實)에 비유한다면 오직 우리도 일가(一家)의 친족이라 일가(一家)의 친족으로써 대동보(大同譜)로 합보(合譜)한다면 어찌 조선(祖先)을 추모하고 후손을 넉넉히 하는 본의(本意)가 아니겠는가.\\ \_아! 윤리(倫理)와 강령(綱領)이 무너지고 종족(宗族)의 의(誼)가 소원(疎遠)해지고 있으니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이라.\\ \_수년 전부터 세원(世元)과 기청(氣淸)과 덕출(德出) 및 여러 종친(宗親)들이 여러차례 토론한 바 재사(齋舍)가 협착하여 전사(奠祀)를 올릴 때에 원근에서 모인 종친제관(宗親祭官)들이 하룻밤을 숙박하는 데도 곤란이 막심하여 종회시(宗會時)에 그것을 공의(公議)한 결과 본군과 타군에 사는 종친과 해외(海外)에 나가 있는 종인(宗人) 준구(浚九)와 여러 종친들에게 서면(書面)으로 의사를 묻고 또 대면하여 상의해서 통고문(通告文)을 발송하니 이 때가 비록 경제적으로 곤란하지만 그 재실(齋室)이 협착한 것을 생각하면 부득이한 일이라 하여 몇해 사이에 그럭저럭 준공(竣功)했는데 그 뒤에 또 주사(㕏舍)가 세월이 오래되니 바람에 깍이고 비에 씻겨서 기둥과 서까래가 썩어서 집이 넘어질 지경이라. 종회(宗會)의 석상에서 충분히 공의했으나 아무 대책(對策)이 없었는데 이 때 회의석상에는 마침 일본(日本)에서 살고 있는 종인(宗人) 준구(浚九)가 와서 참석하여 한심한 광경을 보고 단독으로 성력(誠力)을 표시하여 일백수십만원(一百數十萬원)의 찬조금을 내어 재사(齋舍)를 원상(原狀)대로 복구하여 공사를 마쳤으니 선조를 생각하는 정성은 길이 길이 잊지 못할 일이라.\\ \_이 때를 당하여 재사(齋舍)의 상하실(上下室)과 주사(㕏舍)는 이미 공사를 마쳤으나 관향(貫鄕)이 갈라진 방조(傍祖) 기성군(箕城君) 이하로 사대위(四代位)에 대한 제단비(祭壇碑)의 건립과 제단에 들어가는 문루(門樓)를 증축(增築)하고 중건(重建)키로 하여 영주(榮州)에 사는 세명(世明)으로부터 온 통고문에 의하여 종회석상(宗會席上)에서 공의(公議)한 데로 발문(發文)하여 각처에 지정한 유사(有司)를 파견했으나 특별유사(特別有司)는 경주(慶州)는 윤범(潤範)으로 하고 청송(靑松)에는 영호(永浩)로 하며 영주(榮州)에는 세명(世明)으로 하여 2(二)년에 걸쳐 각도(各道)와 각군읍(各君邑)을 다니며 수금하던 중에 밤에는 차가운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비바람을 무릅쓰고 고생하여 몇백만원의 찬조금을 수집하여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완축하며 문루(門樓)도 준공했으니 비록 몇백년 뒤에 까지라도 어찌 위선(爲先)하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_그런즉 그 공사를 감독(監督)한 사람은 기청(氣淸)군과 진현(鎭玄)군이요 또 작년 10(十)월 중정일(中丁日) 전날 밤에 회장(會長)과 아무아무 종친(宗親)이 본도와 타도에서 종친이 참석한 회의석상에서 말하기를 “갑술년에 대동보(大同譜)를 한 이후로 그 중간에 각파별로 피보(派譜)는 닦았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후세의 자손이 연대(年代)가 멀어지고 규모(規模)와 절차(節次)도 자세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대동보(大同譜)를 닦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물으니 종중의 여러 회원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찬동했다. 그 후에 풍기에 사는 영종(永宗)과 청안(淸安)의 인모(麟模)가 상의하여 통문(通文)을 각처에 발송한 후 각파별로 수단(收單)하고 정본(正本)과 초본(抄本)을 기록하는 보소(譜所)는 특별히 평해(平海)의 월송선재(月松先齋)에 설치하였으니 평해는 즉 우리 시조공(始祖公)이 관향(貫鄕)을 세운 곳이며 월송선재(月松先齋)는 즉 우리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追慕)하는 곳이다.\\ \_시조공(始祖公)의 후손으로서 목족(睦族)의 의(誼)를 돈독히 하고 문사(門事)로 인하여 모임을 함께하고 힘을 합해 마음에 느낀 바를 다한다면 반드시 너와 나가 없을 것이다. 일을 신속히 처리하여 반드시 합보(合譜)를 성취하여 대사(大事)를 돈독히 끝내고 남은 기회(機會)에도 털끝만한 일까지 세심히 잘 보아 백세(百世)토록 같은 족보에 족의(族誼)를 다져간다면 위로는 전해 내려오는 부로(父老)가 남기신 훈계를 계승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밝은 대안(對案)인 것이다.\\ \_감히 분수에 넘치는 망령된 말로 그 느낀 바의 전말(顚末)을 간략하게 서술할 따름이다.\\ \_\_단기 4309(四三〇九)년 병진 10(十)월 상순에 후예손 재우(載宇) 삼가 서하다.\\ \\ <WRAP subnote> 주1.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북부(北部) 통킹 하노이 지방(地方)의 옛명칭\\ 주2. 팔역(八域): 전국(全國) </WRAP> </typo> </WRAP>
b-016.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07:11 저자
ssio2
문서 도구
문서 보기
이전 판
역링크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