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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량희구재황공행략(通德郞喜懼齋黃公行略)===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 \_**通德郞喜懼齋黃公行略**\\ 公諱琛字君玉姓黃氏黃爲其城著姓高麗侍中諡文節公諱瑞其遠祖也中世有諱汝 一號海月\_宣廟射策登第以文章德業著名當世龍蛇之變以朝天書狀官隨白沙月沙\\ 上副价卞丁主事應泰之誣及還沉淪於冗散州郡卛官工曹參議歿後以翊戴勳 贈嘉 善大夫吏曹參判士林尸祝于明溪書院與仲父大海先生並享馬於公爲六代祖也五 代祖諱中憲宣敎郞高祖諱石平\_贈通訓大夫司僕寺正曾祖諱塾\_贈通政大夫承政\\ 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孝行出天學識超倫結茅于五台峯下娛樂泉石而號曰龜臺 當時交遊安參判黃懈軒諸公記其實行而褒美之祖諱世元\_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考諱受夏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先妣貞夫人安 東權氏士人諱萬濟之女無育繼妣貞夫人坡平尹氏士人諱徵三之女公以\_英廟丁卯 八月二日生于沙洞里弟幻而機警絶人凡於愛親敬長隆師親友之方不敎而動輒中 矩性又好學勤劬如飢渴年甫弱冠才思穎發屢捷鄕觧華聞籍甚鄕人莫不以遠大期 之而洪奉賀秀輔金判書履彬累加勸勉而稱歎焉癸卯春赴楊口鄕試歸路聞先夫人 訃星夜奔哭泣血哀毀情文備至三年之後外制雖變而風樹餘懷恤恤乎猶未盡也絶 意外慕不復治擧子業偏奉春<fc #ff0000>闛</fc>至誠無間自以家勢淸寒無以盡随𣺫之供爲憂乃勤 蠶績力耕稼養鶏豚便身之衣適口之味保元之資靡不用極以老人衰腸易飢易寒一 日之內進膳無常燃突無時而必躬執其役采甞使子弟婢僕代之至於粥飮濃煎之方 肉鮮爛烹之節亦親自看攝適其溫冷鹹淡而進之積六十年如一日每當諱日前期齋 宿致哀致敬備盡如在之誠先夫人墓所在於十里之外而每月必具酒果奠掃以爲常 雖祈寒盛暑未甞或廢愛日之誠至老彌篤扁其所居齋曰喜懼盖欲其目擊思從以寓 其終身濡慕之至意也平居侍側怡愉承順和容婉色百世之下復見老莱子七十戲綵 之像嗚呼休哉始公之曾王考\_贈承旨龜臺公以童年澈天之孝屢登鄕薦而未蒙棹稧\\ 之典鄕人嗟惜之不已令於百年之後卓絶奇<fc #ff0000>常</fc>之行又鍾於玄曾孫盖其積累之漸所 從來遠矣是豈偶然哉權學士晙以士林重望宰本郡時累造其廬深加歎賞記其齋而 嘉奬之其略曰至如某也謂孝子者非耶郡中人士之狀有曰某孝誼純至斯人爲誰寔 爲君王大人也<fc #ff0000>常</fc>所之靈芝有本醴泉有源者不其信然歟盖深服之語也歲戊辰先府 君春秋已治滿九十矣君以望七之年侍奉朝夕暫不離側加以衰病浸尋勢難遠役而 以先府君大耊陞資而未蒙實典心常慨恨乃於暮春之月扶病强作艱辛赴洛後數日 往謁西銓金公履翼語及先府君壽職事金公見公儀表之端雅辤情之剴功爽然異之 即夕首擬於窠闕實同知詰朝蒙\_恩受點後又數日三世追榮並以華啣具兼帶而下鳴 呼異哉此豈非天與之順歸便乎制下之日東南人士莫不嘖嘖奇異之曰猗歟鬼神鑒 其誠也公手奉恩敎婦報親庭方與諸宗謀所以慶不踰月懸貫焚黃之節將刻日利成 矣夫何樂極生悲吉反爲凶張碩人以五月二十二日遘厲不幸無何公又寢疾於明溪 之寓舍以閏五月十二日飮恨長逝得年纔六十二是夕舁婦于本宅險殯才畢先府君 因廢食飮沉吟成疾是月二十五日繼又不諱嗚呼痛哉天地之間此何等情界也不世 榮光無邊禍色慘錯於一月之內使慈婦孝子之魂會哀抱寃於九泉之下是何蒼蒼之 無神而漠漠之無信也鳴呼痛哉是月九月初七日庚午克襄先府君于郡北三十里梨 田洞負亥之原二十日癸未窆公於同洞間一麓員已之原距先府君幽宅纔數百擧武 相望之地也泉臺侍奉之樂無減於人世則公將伸孝於八地之日幽明之間可慰者此 也公前配幸州田氏士人諱弘玉之女先公二十七年而歿葬于周墙\_向之原後配蔚珍\\ 張氏士人諱東玉之女先公一月而歿與公同穴兩碩人俱以貞亮之姿內行純備壺儀 無憾而不幸無子以本生再從兄瑺之第二子致泓爲嗣女三人爲士人李龜熽妻士人 張天翼妻者田氏出也士人李相箕妻者張氏出也致泓娶務安朴鎭標女生一男尙幼 李龜熽無育張天翼有三男皆幼嗚呼公之傳受淵源有自來矣幼而啓發於復齋李\\ 公春龍誘掖之方長而成就於伯父川西翁師夏爐錘之間畢竟樹立如是卓越於哀季 吾夫子所謂魯無君子斯馬取斯者政謂公發也風度秀<fc #ff0000>常</fc>氣宇軒昻性行高潔持論鄕 黨不肯俯仰於流俗聞人之善若已有之推許闡楊猶恐不及見人之惡若將<fc #ff0000>일</fc>焉嚴加 峻斥不少假借故鄕人之善者慕之不善者忌之然其律巳之謹嚴制行之公平賢不肖 之所共歎服者故能處濁世而怨禍不及於身吁亦可尙也已今夫𡾟巖草澤之中非無 特立獨行之士而我國家取人專尙科目蒐逸之典不及於遐荒故士之抱負志行名<fc #ff0000>연</fc> 沒無稱者指不勝屈是可數也念昔川西公以孝友文行廉謹醇雅負儒林重望而卒乃 枯頂黃䤋畢命於蓬蒿之下以公出天之誠高世之行懷寶莫售隱德不顯埋沒窮巷與 草木同腐可勝痛哉可勝惜哉廼令致泓圖君志行之不朽於世袖持家狀一通來余請 記實文字余以育廢一物不自量力草先令公行略已極儧越矣何敢更構拙語畳托語 傳信之地而第念平日通家之誼便是姓不同兄弟義有所不可終辤者敢忘其固陋於 原狀中略加欒括而撰次世係志行如右以備當世秉篳士之裁擇而去就焉\\ \_\_上之八年戊辰九月日戚記尹東憲謹狀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통덕랑(通德郞) 희구재(喜懼齋) 황공(黃公) 행략(行略)**\\ \_공(公)의 휘(諱)는 침(琛)이요 자(字)는 군옥(君玉)이라 성(姓)은 황씨(黃氏)니 황씨(黃氏)가 기성(箕城)에서 제일(第一)가는 성(姓)이라. 고려(高麗) 시중(侍中) 시(諡)는 문절공(文節公)이요 휘(諱)는 서(瑞)니 그 원조(遠祖)라. 중세(中世)에 휘(諱)는 여일(汝一)이요 호(號)는 해월(海月)이 있었으니 선조(宣祖) 때 활을 쏴서 과거(科擧)하였고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으로서 이름을 나타냈으니 당세(當世)에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조정(朝庭)에 글을 올려 벼슬이 백사(白沙)와 월사(月沙)에 따랐고 상부개변(上副价卞) 정(丁) 주사(主事) 응태(應泰)((정응태 무고사건: 조선 선조 31년(1598) 명나라 간신 정응태(丁應泰)가 명 황제 만력제에게 조선을 무고한 사건으로 류성룡이 실각하고 북인이 집권하는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다. 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하였는데 조선은 양호와 가까웠기 때문에 양호를 옹호하였다. 그러자 정응태가 화를 내어 조선을 무고한 것이다. 조선이 해명함으로서 일이 해결되었고 정응태는 파직되고 쫒겨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의 무(誣)와 떠돌아 다니는 벼슬로서 산주군(散州郡) 솔(卛)에 빠져 공조참의(工曹參議)를 하였으니 후(後)에 거룩한 공(功)으로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하셨고 사림(士林)들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중부(仲父) 대해(大海) 선생(先生)과 같이 병향(並享)하시니 공(公)의 6대조(六代祖)라. 5대조(五代祖)에 휘(諱)는 중헌(中憲)이니 선교랑(宣敎卽)이라, 고조(高祖)의 휘(諱)는 석평(石平)이니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숙(塾)이니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이라. 효행(孝行)이 출천(出天)하였고 학식(學識)이 뛰어나서 띠집을 오봉산(五峯山) 아래 짓고 개미와 돌을 사랑하며 호(號)를 귀대(龜臺)라 하니 당시에 교유(交遊)하는 안참판(安參判)과 황해헌(黃懈軒) 모든 분(分)들이 그 실행(實行)을 기록(記錄) 포상(褒賞)하고、아름다움을 칭찬(稱贊)하더라. 조(祖)의 휘(諱)는 세원(世元)이니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이시고, 고(考)의 휘(諱)는 수하(受夏)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만제(萬濟)의 여(女)라 무후(無后)하고, 계비(繼妣)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징삼(徵三)의 여(女)라. 공(公)은 영묘(英廟) 정묘(丁卯) 8월(八月) 2일(二日) 사동(沙銅)에서 출생(出生)하셨다. 유시(幼時)부터 모든 행동(行動)이 남에게 뛰어나서 무릇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恭敬)하며 벗을 친(親)하는 방법(方法)이 가르치지 아니해도 그 규모(規模)가 달랐고 또 배움을 좋아하고 근면(勤勉)함을 기탕(飢湯)과 같이하여 나이 20(二十) 미만(未滿)에 재능(才能)이 영특(穎特)해서 그 민첩(敏捷)한 행동(行動)이 소관(所關)이 자자(籍籍)하여 향인(鄕人)들이 그 원대(遠大)한 포부(抱負)를 말하지 않은 자(者) 없었으며 치하(致賀)하지 않은 자(者) 없더라. 김판서(金判書) 이빈(履彬)이 여러 번 그 근면(勤勉)함을 칭찬(稱贊)하더라. 계묘(癸卯)년 봄에 양구(楊口)의 향성(鄕誠)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인(先人)의 부음(訃音)을 받고 밤에 달려와 피눈물로 슬피 우매 지극(至極)한 정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결한 날이 없었고 3년(三年)이 지난 후(後)에도 외세(外勢)가 비록 변(變)해도 어버이를 사모(思慕)한 것이 조금도 변(變)함이 없이 뜻을 밖에 두어도 자식(子息) 사랑 하는데 두지 않고 오로지 편모(偏母)에게 지성(至誠)을 다하여 한가한 날이 없더라. 가세(家勢)가 점점(漸漸) 빈한(貧寒)해지자 먹고 살 일을 근심하여 누에를 치고 갈고 심으며 양돈(養豚)과 양계(養鷄)를 하여 몸에 편의(便宜)하도록 옷을 해 입고 입에 맞추어 음식(飮食)을 하여 건강(健康)을 보존(保存)하고 노인(老人)들의 배 고프고 추운 것을 감안하여 반찬을 진공(進供)하며 추울 때에는 반드시 손수 나무를 하여 자제(子弟)나 노비(奴婢)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고 그 음식(飮食)과 육(肉)과 생선(生鮮)을 다루는 방법(方法)이 또한 직접(直接) 자기(自己)의 손으로 하고 그 뜨시고、찬 절차(節次)와 그 더러운 것을 무려 60년(六十年)을 하루같이 하여, 매양(每樣) 휘(諱)((여기에서는 '제삿날'로 쓰임.)) 전(前)날 밤에는 슬퍼하고 공경(恭敬)하기를 생존(生存)해 계실 때와 같이하며 선부인(先夫人) 묘소(墓所)가 10리(十里)밖에 있어도 매일(每日) 반드시 주과(酒果)를 갖추어 묘소(墓所)를 정결히 쓸고 항상 춥고 덥고 한 것을 늘 염려하여 정성을 다 하며, 나이 많을수록 소거(所居)한 재(齋)를 갈 때 희구(喜懼)라 하니 대개 눈에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종신(終身)토록 추모(追慕)하는 뜻이 지극(至極)함이라 평시(平時) 옆에서 모실 때 평안(平安)하게 해드리고 화순(和順)한 얼굴을 하여 백세하(百世下)에 다시 노자(老子)께서 70(七十)에 희채(戲彩)의 상(像)을 보게 하였다. 슬프고 슬프다. 처음에 증왕고(曾王考)께서 증(贈) 승지(丞旨)하시고 귀대공(龜臺公)이 동년(童年)에 철천지효(徹天之孝)로서 여러 번 향천(鄕薦)을 올렸으나 한번도 도계(棹禊)외 전(典)을 입지 못하여 향인(鄕人)들이 슬퍼하고 아쉬워 한지 우금(于今) 백년(百年)이라. 뒤에 탁월(卓越)한 기위(奇偉)의 행(行)이 현증손(玄曾孫)에게 울리니 그 적루(積累)한 점이 멀리 와 비춘 것이다. 이것이 어찌 우연(偶然)한 일일 것인가. 권학사(權學士) 준(晙)이 사림(士林) 중망(重望)이 본군(本郡)에 재(宰)하실 때에 여러번 그 집을 고치고 깊이 근귀(勤貴)을 가(加)하여 그 재(齋)를 기(記)하고 아름답게 권장(勸奬)하고 약(略)해 가로대 모(某)를 보고 효자(孝子)라 아니할 자(者) 있으랴, 또 군(郡) 중(中)의 인사(人士)들이 장(狀)이 이어갈 때 모효(某孝)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로 군옥(君玉) 대인(大人)을 위한 것이다. 당소(倘所)에 운(云)하되 영지(靈芝)는 근본(根本)이 있고 예천(醴泉)은 근원(根源)이 있다는 것은 믿어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은 깊이 심복(心服)한 말이다. 해가 무진(戊辰)에 선부군(先府君)의 춘추(春秋)가 이미 만90(滿九十)이나 군(君)이 7년(七年) 전(前)부터 조석(朝夕)으로 시봉(侍奉)하여 잠깐도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노병(老病)이 점점 더하여 멀리 떠나려 했으나 선부군(先府君)의 노병(老病)이 많이 위독(危篤)하지 아니함으로 마음에 항상(恒常) 개한(慨恨)하고 있다가 모(暮) 춘월(春月)에 병(病)이 조금 낳은 기색(氣色)이 있기로 서울에 갔다가 수일(數日) 후(後)에 배알(拜竭)하니 서전(西銓) 김공(金公) 이익(履翼)의 말이 선부군(先府君)은 수직사(壽職事)라 김공(金公)이 공(公)을 보고 단아(端雅)하고 사정(辭情)하여 정신(精神)이 산연(傘然)하더니 즉석(即夕)에 머리가 옆으로 삐끗하더니 조반(朝飯)을 점(點)한 후(後)에 또 수일(數日)만에 3세(三世)를 추영(追榮)하시고 마침내 허덕이고 흐느낌으로서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슬프다 이 어찌 하늘이 준 순귀(順歸)가 아닐까보다. 복제(服制)를 하던 날에 동남(東南) 인사(人士)들이 다 크게 소리 지르며 기이(奇異)해 말하기를 아름답다 귀신(鬼神)에 그 정성(精誠)을 보이라 하더니 공(公)이 손수 은교(恩敎)를 받으러 돌아가신 것을 제종(諸宗)들과 더불어 평안(平安)히 계시는 곳을 마련하고 달이 넘지 않게하여 좋은 날을 택(擇)하여 이성(利成)을 하였으니 무슨 낙(樂)이 이 생(生)과 비(悲)와 길(吉)이 이에 더 할 수 있으랴. 석인(碩人)이 5월(五月) 22일(二十二日)에 안장(安葬)하고 공(公)이 명계서원(明溪書院) 움막집에서 침식(寢食)을 같이하시다가 윤5월(閏五月) 12일(十二日)에 마침내 돌아가시니 겨우 나이 62(六十二)라. 이날 저녁에 마주 들어 본댁(本宅)으로 운시(運尸)하여 염빈(殮殯)을 마치고 또 선부군(先府君)께서 음식(食飮)을 전폐(全閉)하고 침연(沈然)히 병(病)을 얻어 이달 25일(二十五日)에 계부(繼父)를 이어 돌아가시니 슬프고 슬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이것이 무슨 정계(情界)야 세상이 영광(榮光)이 없고 또 화(禍)가 끝이 없이 참착(慘錯)한 일이 1(一)개월 내(內)에 자부효자(慈婦孝子)의 혼(魂)이 슬픔을 머금고 원병(冤病)함을 구천(九泉)앞에 끝나니 이 어찌 창창(蒼蒼)히 귀신(鬼神)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나. 슬프고 아프다. 이날 9월(九月) 즉(即) 7월(七月) 경오(庚午)에 선부군(先府君)을 군북(郡北) 30리(三十里) 이전동(梨田洞) 부해(負亥)의 원(原)에 양례(襄禮)를 지내고 20일(二十日) 계미(癸未)에 공(公)을 같은 동간일록(洞間一麓) 사이 사(巳)의 원(原)에 합폄(合窆)을 하니 거리(距里)가 선부군(先府君) 유택(幽宅)과 겨우 수백보(數百步) 서로 망견(望見)한 땅이다. 천당(泉堂)에서 시봉(侍奉)한 낙(樂)이 사람이 사는 세상(世上)과 같음이 없는 즉 공(公)은 장차(將次) 효도(孝道)를 땅에 입지(入地)한 날까지 유명간(幽明間)에 가(可)히 위로(慰勞)한 자(者)이라. 공(公)의 전배(前配)는 행주전씨(幸州田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홍옥(弘玉)의 여(女)니 선공(先公) 27년(二十七年)에 돌아가셔서 은장(恩墻)에 ○향(向)의 원(原)에 장(葬)하고, 후배(後配) 울진장씨(蔚珍張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동옥(東玉)의 여(女)니 선공(先公) 1월(一月)에 몰(歿)하여 공(公)과 더불어 동혈내(同穴內)에 같이 합장(合葬)을 하여 정량(貞亮)의 자태(姿態)가 서로 순비(純備)하고 곤의(𠆊儀)가 무감(無憾)하나 불행(不幸)히 무자(無子)하여 본생(本生) 재종형(再從兄) 상(瑺)의 제2자(第二子) 치홍(致弘)으로 사(嗣)하고 여(女)로 사인(士人) 이귀소(李龜熽) 사인(士人) 장천익(張天翼)의 처(妻)로 전씨(田氏)의 소생이다. 사인(士人) 이상기(李相箕) 처(妻)로 장씨(張氏)의 소생이다. 치홍(致弘)은 무안(務安) 박진표(朴鎭標)의 여(女)에게 장가가서 1남(一男)<fc #008080>인데 아직 어리고</fc> 이귀소(李龜熽)는 무육(無育)하고 장천익(張天翼)은 3남(三男)이 있으나 다 어리다.\\ \_슬프다 공(公)의 전(傳)하고 받는 일이 다 연원(淵源)이 있다. 어려서는 복재(復齋) 이공(李公) 춘룡(春龍)의 가르침을 받았고 성장(成長)해서는 백부(伯父) 천서옹(川西翁) 사하(師夏)공(公)의 도움을 받아 필경(畢境)에 이와 같이 뜻을 양계(襄季)에 수립(樹立)하였으니 부자(夫子)가 이른바 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없다는 것이 곧 이것이며 이를 취(取)한 자(者) 정(政)이라 하셨으니 이는 공(公)을 두고 말한 것이다. 풍체(風体)가 수위(秀偉)하고 기력(氣力)이 건장(健壯)하며 또 성행(性行)이 고결(高潔)하여 향당(鄕黨)에서 논의(論議)하실 적에 남에게 질타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선(善)을 들으면 모(慕)에 추허(推許)한 것 같아서 도리어 오직 두려워하고 남의 악(惡)을 본 즉, 도리어 부끄러워하여 엄연(嚴然)히 이를 멀리 물리치고 조금도 이를 가차(假借)하지 아니함으로 향인(鄕人)이 선자(善者)를 모(慕)하고 선(善)치 않은 자(者)를 기(忌)하여, 그 지기(知己)의 근엄(勤嚴)을 제제(制除)하니 공(公)이 평소(平素)에 어지고, 어지지 않은 것을 탄복(嘆服)한 고(故)로 능(能)히 탁세(濁世)에 처(處)해도 원(怨)과 화(禍)가 몸에 미치지 못한 것은 가(可)히 숭상(崇尙)할 바다. 이제 더구나 혼탁(渾濁)한 시대(時代)에 특(特)히 독행(獨行)한 선비가 우리 국가(國家)의 사람들을 취(取)하고 모든 과목(科目)과 모든 법전(法典)을 수일(蒐逸)한 것이 멀리 보지 못함으로 선비들의 포부와 지행(志行)과 명예(名譽)가 매몰(埋沒)해서 무칭자(無稱者)가 손을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에 가(可)히 탄식(嘆息)할 일이라 옛날에 천서공(川西公)의 효우(孝友)와 교행(交行)에 염근(廉謹)하고 순아(醇雅)한 것이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으로서 졸연(卒然)히 이에 황괵(黃䤋)의 명(命)을 봉호(蓬蒿)아래이다 하였으니 공(公)의 출천지효성(出天之孝誠)과 고세(高世)의 행(行)과 회보(懷寶)와 은덕(隱德)을 매몰(埋沒)에 나타내지 아니하여 초목(草木)을 더불어 같이 썩으니 가(可)히 아프고 가(可)히 아프다. \\ \_이제 치홍(致弘)의 소매에 감춘 가장(家狀) 1통(一通)이 나에게 실기문자(實記文字)를 부탁(付託)함으로 나의 역량(力量)으로서는 감(敢)히 얻지 못하고 원장(原狀)을 생각(生覺)하여 중략(中略) 그대로 적고 다음 세(世)에 지행(志行)을 위와 같이 당세(當世) 병필지사(秉筆之士)가 겸비(兼備)할 것을 찬(撰)하고 물러가노라.\\ \_\_상지(上之) 8년(八年) 무진(戊辰) 9월(九月) 일(日) 척기(戚記)((척하(戚下): 성(姓)이 다른 겨레붙이를 상대(相對)하여 자기(自己)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一人稱) 대명사(代名詞).)) 윤동헌(尹東憲) 근장(謹狀) </typo>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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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3 09:04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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