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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황세술유적(孝子黃世述遺蹟)=== <WRAP 37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fs:1.2em> \_**孝子黃世述遺蹟**\\ 夫孝者百行之源也以之爲先則誠以之事君則忠以之交人則信得之於日 用常行而百歲之下猶可起敬則孝之於人不其大乎孝子姓黃氏諱世述系 出平海即海月先生諱汝一之玄孫處士諱增之子也生而天性純孝事親色 養不違如愚晨昏之問志體之養備盡誠敬只知有親不知有身及丁內外艱 六載廬墓泣血枕苫哀誠感人樵竪牧兒之至今過往者指點謂孝子谷每遇 國忌必食素隣里聞有喪則亦不御酒肉接人行己一以恭儉與物無競遠邇 聳服稱之以海月家色始祖先壇古無碑亦無閣公與宗中先輩協議調劃芒 屩藜杖周流各郡不廢風雨憚誠鳩財建碑築壇式至今賴而無憾於追遠者 矧果伊誰之力哉公之孝行可詳於李聾窩亨祿及張魯軒東浚諸公遺集中 而爲先憚竭亦可參照於江陵宗諱宅正敘事中可見矣夫君子之樹德修功 將以遺後也而公則旣乏嗣續斷斷血誠只在於事親及爲先一事寧歿身無 悔而不暇顧後者其視世人之求名要譽相去遠矣昞也生晩雖未及公之世 而窃常耳目於長老及鄕先文字間矣今又譜役適會于始祖先齋有時展拜 螭頭宿苔壇邊老松悅然若手澤之尙新而隔世想感殆令人按住不得然公 之子孫迄未系承有誰能提說使各派諸宗知公効誠於當世耶窃恐傳聞漸 贊風響愈邈故略記遺蹟俾爲吾宗之觀感焉\\ \_\_族後孫昞謹撰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1em; lh:1.5em> \_**효자(孝子) 황세술(黃世述) 유적(遺蹟)**\\ \_무릇 효도(孝道)란 백(百)가지 행실의 근본이다. 효로써 선대(先代)를 위하면 정성스러우며 효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성스럽고 효로써 남을 사귀면 신의(信義)가 있으며 일상생활의 행위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백세(百世)가 지난 후에도 효자라면 오히려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효도는 사람에 있어서 큰 것이 아니겠는가.\\ \_효자(孝子)의 성(姓)은 황씨(黃氏)요 휘(諱)는 세술(世述)이며 평해황씨(平海黃氏)의 후예(後裔)로서 해월선생(海月先生) 휘(諱) 여일(汝一)의 현손(玄孫)이요 처사(處士)인 휘(諱) 증(增)의 아들이다.\\ \_세상에 나면서부터 천성이 순진하고 효도(孝道)로웠으며 항상 부모의 얼굴빛으로 불편 여부를 살펴 부모의 마음에 들도록 효도하기를 흡사 바보처럼 뜻을 어김이 없었다.\\ \_새벽과 저녁에 문안(問安)드리는 일과 부모의 몸과 마음을 봉양함에 있어서 정성과 공경을 갖추어 극진히 하여 부모만 생각하고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_그러다가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6(六)년 동안 여묘(盧墓)생활을 하며 피눈물이 베개와 자리를 적시며 슬퍼하는 효성이 사람들을 감동케 하여 나무하는 아이와 소 먹이는 목동(牧童)들이 지금도 그 곳을 지나다니며 그 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효자골이라 한다.\\ \_국기일(國忌日)<sup>주1</sup>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고기가 없는 나물밥을 먹었으며 이웃 마을에 초상(初喪)을 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또한 술과 고기를 차리지 못하게 했고 사람을 접대하거나 자기 일을 행할 때에도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남과 다투는 일이 없으니 원근(遠近)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높이 복종하며 해월선생(海月先生)의 집안 얼굴이라고 칭찬했다.\\ \_시조공(始祖公)의 단소(壇所)에 옛날부터 비(碑)도 없고 또 비각(碑閣)도 없었는데 공(公)이 종중(宗中)의 선배(先輩)들과 더불어 계획을 협의하여 짚신과 청려장(靑藜杖)<sup>주2</sup> 차림으로 각군(各郡)을 두루 돌아다니기를 비바람이 부는 날도 폐하는 일이 없었으며 정성을 다하여 자재(資材)를 모아 비(碑)를 건립하고 단(壇)을 쌓아서 지금까지 멀리 선조를 추모(追慕)함에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과연 누구의 힘이었던가.\\ \_공(公)의 효행에 대해서는 이농와(李聾窩) 형록(亨祿)과 장노헌(張魯軒) 동준(東浚)과 같은 제공(諸公)들의 유집(遺集) 글 속에 자세히 올라 있으며 선조(先祖)를 위한 사업에 힘을 다한 업적(業績)도 강릉(江陵)의 종인(宗人) 휘(諱) 택정(宅正)이 사실(事實)을 서술한 글 속에서 볼 수 있다.\\ \_무릇 군자(君子)가 덕(德)을 심고 공(功)을 닦는 것은 장차 후세대(後世代)를 위해 남기는 것인데 공은 이미 대(代)를 이을 후사(後嗣)도 없고 단단한 혈성(血誠)은 단지 양친(兩親)을 섬김과 위선(爲先)하는 사업에 있어서 차라리 몸이 죽어도 후회없이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그 세상 사람들이 명예(名譽)를 구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거리가 먼 것이다. 내가 늦게 태어나서 비록 공이 살던 세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시(常時)에 남몰래 늙은 어른들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일과 향중(鄕中) 선배들의 문자(文字) 속에서 접(接)할 수 있었는데 지금 또 보사(譜事) 때문에 마침 시조공(始祖公)의 선재(先齋)에 모여서 때때로 공손히 절 드리니 이끼 낀 비석(碑石) 머리와 단(壇)가의 늙은 소나무에는 어슴프레 공의 손때가 아직도 새로운 듯하여 자못 사람들로 하여금 격세(隔世)의 감회(感恢)를 참지 못하게 한다.\\ \_그러나 공의 자손이 마침내 세계(世系)를 잇지 못하니 누가 능히 제안(提案)하여 각파(各派)의 여러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그 당시에 공이 성력(誠力)을 다해 이룩한 사실(事實)을 알게 하겠는가.\\ \_가만히 생각하니 전해지는 말이 점점 없어지고 공의 기풍(氣風)의 영향(影響)이 더욱 멀어 질까 두렵기 때문에 유적(遺蹟)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우리 종인(宗人)들이 보고 감화(感化)하도록 하노라.\\ \_\_족손(族孫) 병(昞) 삼가 짓다.\\ \\ <WRAP subnote> 주1. 국기일(國忌日): 국왕(國王)이나 왕비(王妃)의 제삿날\\ 주2. 청려장(靑藜杖): 명아주대로 만든 지팡이 </WRAP> </typo> </WRAP>
b-059.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07:19 저자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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