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으로 건너뛰기
평해황씨대동보 문헌록
사용자 도구
등록
로그인
사이트 도구
검색
도구
문서 보기
이전 판
역링크
최근 바뀜
미디어 관리자
사이트맵
등록
로그인
>
최근 바뀜
미디어 관리자
사이트맵
추적:
c32-011
이 문서는 읽기 전용입니다. 원본을 볼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관리자에게 문의하세요.
===만휴당황귀성행장(晩休堂黃貴成行狀)=== <WRAP 37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만휴당황귀성행장(晚休堂黃貴成行狀)**\\ \_공의 휘는 귀성(貴成)이요 초휘는 귀영(貴榮)이라. 자는 치장(致章)이요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라. 선세(先世)는 평해인(平海人)이니 학사(學士) 휘(諱) 낙(洛)의 후손이며 개국창업공신(開國創業功臣)으로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신 휘(諱) 천계(天繼) 호(號) 잠재공(潛齋公)의 8(八)세손이다.\\ \_공이 나면서 바탕이 특이하여 기개가 높고 범상치 않으며 어릴 때부터 나의 선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先生)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진취한 바 있더니 기축(己丑)년에 선생이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름을 받고 공을 수행케하니 서울에 이르러 본즉 왜사(倭使) 의지현소(義智玄蘇) 등이 우리나라 사람의 밀입국자 수인을 잡아 바치는지라 왕이 가상히 여겨 불러보시고 환영연을 베풀어 주시는지라 공이 서애선생(西厓先生)에게 고하되 왜사(倭使)가 온 것은 포망자(逋亡者)를 바치는데 본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실상은 우리나라 형변을 탐정키 위한 것이라 하였다. 과연 그후 7(七)년이 지난 경인(庚寅)년에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 명(明)나라로 진군위계(進軍爲計)이니 통로를 빌리라는 통신을 하고 또 임진(壬辰) 4(四)월에 왜병이 대거 침입해오니 조정에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서애선생이 명장(明將)을 접대하기 위하여 평양(平壤)에 유(留)하시더니 이날에 왜적이 벌써 평양을 공격하는지라.\\ \_이때 공은 서애선생(西厓先生)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라있었더니 홍의적(紅衣賊)이 가만이 모래 언덕에 숨어 조총(鳥銃)을 쏘거늘 공은 편전(片箭)을 연발해서 적을 많이 상하였다.\\ \_그후 왕의 행차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선천(宣川)으로 환행(還幸)할새 서애선생(西厓先生)으로 하여 정주(定州)를 수비케 하더니 적장이 군량을 약탈코저 양곡창고로 대도(大刀)를 차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4(四)방에서 대거 몰려오거늘 공이 말을 타고 활을 메고 크게 외치고 돌격해 나아가니 활시위 소리가 나는 곳에 적이 쓰러지는지라 그 목을 베어 창고 길가에 달아두니 적의 무리가 간담이 떨어져 싸울 뜻을 갖지 못하고 도망하여 흩어지는지라 이로 인하여 정주읍 양곡창고는 보전되었다.\\ \_그때 가뭄이 몹시 심하여 강물이 얕아지니 선생이 상류의 방비가 무너질까 염려하고 변방수어(邊方守禦)할 계책을 의논하며 공으로 대정강(大定江)을 지키라 명하다. 이를 지키는 중 강변에서 도망 온 군사를 보고 혹 평양에 실수가 있지나 않나 의심되어 공이 이를 탐지한 즉 이미 평양이 함락되었는지라 곧 이를 선생께 보고하니 선생이 대경(大驚)하여 즉시 공을 보내 왕의 임시 행궁(行宮)에 상계(土啓)하였다.\\ \_그리고 장차 명(明)나라 구원병이 이르면 양곡과 사료(飼料)의 비측이 없으므로 선생이 근심하고 들으니 구성(龜城)에 양곡이 많이 있다하니 공과 종록(宗祿)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가서 곡식과 사료를 준비하라 명하는지라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이르러 도망간 백성들을 모아 국가의 위급함과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불일지간(不日之間)에 많은 양곡과 사료를 비축하고 원병을 고대하였다.\\ \_그해 12(十二)월에 원군(援軍) 도원수(都元帥) 이여송(李如松)이 안주(安州)에 당도하니 선생이 이원수(李元帥)를 보러가려 하거늘 공이 선생에게 아뢰기를 처음 만날 때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 흐뭇하도록 할 계책을 강구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니 충분한 지략을 짜라 하였다. 선생 또한 같은 생각을 가져 두 분이 충분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이제독(李提督)을 만나 소매 속에 평양지도를 내보이니 이여송(李如松)이 주선(朱線)을 쳐 가며 자세히 살피고 말하되 왜적의 포로가 눈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였다.\\ \_명장(明將) 조승훈(祖承訓)이 안주(安州)에서 패전하고 돌아갈 제 공이 선생의 명을 받들어 술과 음식으로 크게 위로연을 베풀어주고 자진퇴병하기를 권하니 승훈(承訓)이 스스로 패전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돌아갔다.\\ \_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니 공이 급히 락오(駱吳) 두 장군께 권하여 일시에 좌우로 협공(挾攻)케 함에 적이 견디지 못하고 성내(城内)로 몰려들어 가거늘 다시 공이 고하되 적이 성내로 들어감은 마치 호랑이가 함정에 빠짐 같은 격인데 적이 궁한 즉 험악한 반동이 추측되는 것이니 적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고 뒤로서 소탕해버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제독(李提督)이 공의 말을 좇아 용병(用兵)했다.\\ \_또 서애선생(西厓先生)이 공에게 명하여 강변 여울목 지키는 군졸을 감시하라 하니 강기슭을 지나며 절구 1(一)수를 읊으니 시 왈(曰)\\ 投筆操弓手亦高(투필조궁수역고) 붓을 던지고 활을 잡으니 솜씨도 높다\\ 大同江水正滔滔(대동강수정도도) 대동강 물은 옛과 다름없이 도도히 흐르네.\\ 他時露布王城下(타시로포왕성하) 타일에 승전기 날리고 왕성 아래에 돌아가면\\ 欲挽銀河洗此刀(욕만은하세차도) 은하수〔한강수(漢江水)]를 길러다 피묻은 칼을 씻으리라.\\ 하니 서애선생이 웃으시며 장사시인(壯士詩人)이 있다하더니 오늘날에 그대를 보겠다 하더라.\\ \_정월(正月)에 원병이 경성(京城)으로 향할 새 해빙(解氷)되어 강을 건널 수 없으매 제독(提督)이 부교(浮橋)를 놓을 것을 명하는지라 이에 선생이 공을 불러 우봉군수(牛峰郡守) 이희원(李希愿)과 한가지로 부교를 놓는데 필요한 칡넝굴을 끊어오라 하거늘 공이 이군수(李郡守)와 의논하기를 지금 민력이 퇴폐해있는데 강제로 부역을 시키느니보다는 먼저 우리 두 사람이 직접 산에 올라 칡을 끊는 것이 오히려 민심을 달래고 감동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라하고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더니 원근에 사는 백성들이 다투어 칡을 모은 고로 불일내(不日内)에 부교를 이루었다. 4(四)월에 원군이 경성(京城)에 들어와 다시 도성(都城)을 회복하고 왕의 거마(車駕)도 회복할새 공이 호성(扈聖) 즉 왕가(王駕)를 호위한 공로로 정략장군(定略將軍)의 관직을 하사받고 후에 선무공신충공(宣武功臣忠公)이라.\\ \_무술(戊戌) 10(十)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남해에서 전사하니 선생이 듣고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공으로하여 대신 조문케하니 공도 일찍부터 이공(李公)과 더불어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상합(相合)하여 막역지간(莫逆之間)이었는지라 더욱 애석히 여기고 몹시 아파하였으며 이공(李公)의 질(姪) 완(莞) 분(芬) 등과 치상지절(治喪之節)을 협의(協議)하여 정중히 장사를 치루었다.\\ \_공은 이 해에 직책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퇴폐해진 구대(舊臺)를 헐고 수간의 초당을 새로 짓고 그 당에 만휴(晩休)라 현액하였다. 후인들이 공에게 세제향사(歲祭享祀)를 모책하고 익양서당(益陽書堂)을 건립하였다.\\ \_\_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교리지제교(校理知製敎)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官) 기주관(記注官) 풍산(豊山) 유광목(柳光睦) 근찬(謹撰) </typo> </WRAP>
c32-01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12:21 저자
ssio2
문서 도구
문서 보기
이전 판
역링크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