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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 황영석 행장(黙菴黃永錫行狀)=== <WRAP 33em justify> <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行狀 \\ \_公諱永錫 字建祚 號黙菴, 姓黃氏平海人. 我太祖朝 有襄武公諱希碩 卽公之十八代祖也. 七傳諱禧男 丙亂後自平昌 寓于淸安 更移卜於龍宮之新里.\\ \_禧男生諱承立 號新川, 及親喪居廬 有馴虎之異以孝聞. 六傳諱光澈 官中樞府事 是公高祖也. 曾祖諱鳳秀, 祖諱鐘周 號月浦 以文翰著.\\ \_父義鎭 妣淸州鄭氏 藥圃先生後 昌宇之女 曉小學書 𠆊儀甚備 以高宗癸未十月二十九日 生公于佳谷里第. 公生之日 有人以明心寶鑑 來請易米 母夫人曰 方生此兒而適來是異事 遂以米易冊焉.\\ \_自幼性溫謹 不煩提敎 六嵗就坦堂金公 學解字煩慧多爲長者所稱許 旣受小學書 一日告塾長曰 覺得灑掃後似有平天下之樣 朱子所謂灑掃應對 爲治平之本者 果不我欺也. 塾長嘆嗟曰, 此兒將有大進之漸.\\ \_嘗與其弟永根共飯 弟指器內餘液曰 盍刷而盡之? 公蹙然曰 不獨於器液 乃爾吾日用言動類多不精 汝須檢察以言其聞過從善 亦多此類.\\ \_曾以百緡金有貸於人 而不報者公受心經近思錄二冊折券 而還告于親曰 此書學聖之訣 不以金錢方之也 伏願勿慮焉.\\ \_己亥丁內艱 毀戚踰禮時的冬寒 與弟永根省墓歸路 遇賊\\ 掠取其衣服 公脫與之曰 此阿季年弱酷寒 若裸則不免僵斃矣 願勿迫焉. 辭甚懇賊感而舍.\\ \_庚子秋聞毅堂朴先生講道 于淸風茀山與弟永根 徃拜受學 先生一見許其異器. 乙巳毁聖廟之變 先生擧義討復 公以致死之義從軍 而共還, 公錄先生語 在先生文集中.\\ \_後謁持菴金先生 於南隱寓舍 先生語于公曰 人之有性本無不善 而惡之所生氣質病之也. 公避席而答曰 風氣之病甚於氣質之害, 先生曰子自得乎? 答曰 曾見於柳省齋集中. 先生嘆其不剿襲也. \\ \_平居討靜室危坐 日必冠帶 未嘗有惰容, 几案書冊整頓 不亂放案上. 常置心近諸書 座右揭愼其獨保晩節 六宇朝夕省覽 扁其所居室曰默菴.\\ \_凡一切是非得喪 旁人過惡絶口不道 尤惓惓於誠敬 自治愈嚴, 雖處困拂 坦然若無事. 嘗曰 求仁去私, 尊攘崇闢 我毅堂先生平日講學骨子 爲吾徒者當守 此準的.\\ \_日倭卒數十軰 剽掠村閭人 皆逃避 公獨毅然對坐. 彼見闊袖衣 而詰之, 曰此何服也? 答曰吾先王法服. 彼曰 奈邦禁何? 對曰 儒者所守禮義而己.\\ \_時王矯制 有不暇恤也 酬應自若彼亦義之 或以新學誘之曰\\ 現今文化世界 許多奇巧 可謂開發人才 所謂儒道云云 不免陳腐. 公笑曰 吾數十年所讀 皆虛也耶? 吾請言其所以 子其聽之. 吾儒只此三綱五常 亙古今罔墜之道. 彼所謂學滅倫 反常壞經 侮聖糜人沼國之毒螫也. 且所謂奇技淫巧 尤蠱惑人膓肚而已.\\ \_鄕里子姪多犯西敎者 所謂牧士主敎者 以其術動之 因進一編云聖經. 公徐笑曰 其所謂聖怎麼聖人 乃劈破邪正之 不容相混 彼亦嘿退, 謂人曰 某公精透金石 明析毫銖 莫以異敎惑之也.\\ \_弟永根分戶仍稟于親曰 只有渠兄弟二人 弟飢兄何忍獨飽? 願以數項田益之, 其友于之篤 爲人所誦.\\ \_庚戌秋 聞國破之報 西望號痛 橅釼自歌曰 隆熙四年秋 杖釼讀春秋 華夷人獸界 白刃漂欲秋. 又吟一絶曰, 磨爾一片心 誓我百年心 義利交錯地 借爾快剖心. 以釼密藉納之篋. 旣而聞毅堂先生自靖之報 設位而痛哭 赴吊而加麻. 己未高宗昇遐時 議懾於虜勢岐 於着白之論 公據本朝君喪儀 以白笠三年之制 率同志行哭班. 擧因山前 廢大小祀之儀, 停正朝茶禮 隣里從之.\\ \_甲子正月値回錄之災 家藏什物盡入灰燼. 公唏曰, 家財捐失 固不足恤 世守遺籍 逮余不完保 甚慨焉. 公素不喜著作而槩毁稿 弟永根請其灰燼之餘者 蒐輯以備後蹟 公止之曰 學貴行己而已, 奚文爲也? 惟以家訓九篇 企子孫之服膺 勿替而已焉.\\ \_公以暴患舌噤神亂 不能遺一語 以垂昆謨經二日 而瞑時 甲子二月十五日戌時 得年四十二. 踰月而葬于烏頭谷 枕坤原, 遠近士友痛惜焉. 配義城金氏 士人碩周女, 生二男長秉龍 次秉道.\\ \_嗚乎 若公者以醇溫謹密之姿 加學問淵源之正 其孝友之篤 得之天畀, 不敢一毫 自有而自專.\\ \_其存省之察 則靜以存養, 儼然若思 動以省察 條暢發越 畏兢亹亹. 雖造次顚沛動遵塗轍 一以古人自期 其尊攘崇闢之嚴 得之師門 截然有不可犯, 故其道亡之痛 發於撫釼之句. 毅然有舍命 不渝底氣, 使人讀之 不覺膽落而氣欝也.\\ \_惜乎, 若天假之以年 而征邁不已 則斯文之托庻穆卜 而才及無聞 天奪之速 何哉? 此豈孟子所謂性也 有命焉非歟? 余少從茀山門下遊 見公二難於鏗瑟之席 得於動容辭氣 而服公者深且久矣.\\ \_日公之季永根甫 袖一通家狀 枉余朝陽之广囑余曰 此吾先兄朝聞之畧也, 環顧同門宿德 淪謝殆盡 知吾伯之懿者莫子若 盍狀其蹟 爲備立言者之揚抱焉. 顧念舊契 終辭不得 乃檃括如右以塞 孔懷之恳云爾.\\ \_\_永曆五丙寅殿春((영력오병인전춘(永曆五丙寅殿春): 영력(永曆)은 남명(南明)의 영력제(永曆帝/ 1647-1662)의 연호이니 영력5(永曆五)라 함은 영력 원년인 1647년에서 5주기(5週期) 곧 300년이 지나간 뒤라는 뜻이며, 그 300년 뒤에 오는 병인(丙寅)이 되므로 서기 1926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행장문은 1926년 전춘(殿春) 즉 춘계(春季)로 봄철의 말미(末尾) 곧 음력 3월에 지었다는 표현이다.)) 竹溪 安在極\\ </typo> </hidden> \\ \_공의 휘(諱)는 영석(永錫)이요 자(字)가 건조(建祚), 호는 묵암(默菴)이니, 성은 황씨로 평해인(平海人)이다. 우리 태조(太祖) 때에 양무공(襄武公) 휘 희석(希碩)(8世)이 계셨으니 바로 공의 18대 할아버지이시다. 7대를 전하여 휘 희남(禧男)(15世)이 병자호란(丙子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입한 난리. 청나라에서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한 것을 조선이 물리치자 청나라 태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하였다. 이에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청나라에 대하여 신(臣)의 예를 행하기로 한 굴욕적인 화약(和約)을 맺었다.)) 뒤에 평창(平昌)((평창(平昌):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으로부터 청안(淸安)((청안(淸安): 현재의 충청북도 증평군 전 지역과 청원군 북이면·오창면의 일부, 그리고 괴산군 청안면·사리면, 진천군 초평면과 음성군 원남면의 일부로 이루어진 옛 행정구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해 연풍군(延豊郡)과 함께 괴산군에 통합되어 폐지되었다. 현재는 괴산군 청안면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에 사시다가 다시 용궁(龍宮)((용궁(龍宮): 경상북도 안동부 용궁군. 1914년 예천군에 병합되었다.)) 새마을(新里)((새마을(新里): 현 안사면 만리1리는 위 쪽부터 ‘오가실’, ‘중터’, ‘새마을’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시때 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 ‘오가실’은 비안군 현동면, ‘새마(신리, 新里)’는 용궁군 신하면 관할이었다.))로 이거하셨다.\\ \_희남은 휘 승립(承立)(16世)을 낳으니 호는 신천(新川)이고, 어버이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여막(廬幕): 궤연(几筵)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지어 놓고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에 거처하며 호랑이를 길들이는 기이함으로 효행의 소문이 났다.((영남삼강록(嶺南三岡錄, 장우상 저, 1939) 권지3에 “黃承立廬墓 子孫居義城郡萬里”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승입은평ᄒᆞㅣ인이니통뎡례남의자라어버이셤기기랄지극히효하야감지공괴와온정지셩니자식어직분을다하더니밋우랄만나ᄆᆞㅣ려모삼년애범이막밧개직히더라사림이효로쎠도ᄇᆞᅟᅵᆨ어게들이포창문이잇더라”)) 6대를 지나서 휘 광철(光澈)(22世)은 벼슬이 중추부사((중추부사(中樞副使): 족보에 의하면, 以壽 贈嘉善, 즉 장수하셔서 가선대부를 증직 받으셨다. 1797년(정조 21년) ~ 1875년(고종 12년) 향년 79세.))였으며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는 휘 봉수(鳳秀)(23世)이시고, 할아버지는 휘 종주(鐘周)(24世)요 호가 월포(月浦)로 문필로 이름이 나셨다.\\ \_아버지는 의진(義鎭)(25世)이고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약포(藥圃)선생 후예로 창우(昌宇)의 따님이니 소학 책에 밝았고((요소학(䁱小學): 요(䁱)자는 오기(誤記)일 것 같아 역자가 밝은 효(曉)자로 정정했음을 밝힌다.)) 부인의 깊은 덕을((곤의심비(壼儀甚備): 곤의는 왕후(王后)의 덕을 말하고 왕후를 은유하는데, 여기서는 그토록 빼어난 부인의 덕을 아주 깊이 갖추었다는 뜻이 된다.)) 갖추었는데 고종 계미(癸未) 1883년 10월 29일에 가곡리(佳谷里) 가곡리(佳谷里): 1)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현 경북도청 동쪽), 2)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가곡리가 있으나, 풍천면 가곡리로 추정됨)) 본댁에서 공을 낳으셨다. 공이 출생하시던 날 어떤 이가 명심보감을 가지고 와서 쌀을 바꾸기를 요청하매 모부인(母夫人)((모부인(母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이르는 말.))이 ‘방금 이 아이가 났는데 마침 기이한 일이로고!’하시면서 책과 쌀을 바꾸어 주셨다.\\ \_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순하고 삼가서 별반 가르치지 않아도 6세에 탄당(坦堂) 김공(金公)((탄당 김공(坦堂 金公): 호가 탄당인 김영주(金永胄) 선생이다.))에게 가서 글자를 애써서 해득하였는데 연장자들처럼 지혜로워 소학(小學) 책을 배우다가 하루는 글방 선생에게 말했다, ‘물 뿌리고 청소하는 쇄소(灑掃)를 한 뒤에는 천하가 태평한 것 같이 깨달으오니 주자(朱子)가 쇄소응대(灑掃應對)((쇄소응대(灑掃應對): 주희(朱熹)의 대학장구(大學章句 序)에 ‘인생 8세에 다 소학(小學)에 입문케 하여 물 뿌리고 마당 쓸며 손님 응대하게 함으로 진퇴의 예절을 배우게 한다’는 데서 어릴 적에 기초교육의 훈련을 말한 것이다. ))를 말한 바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기초가 됨은 과연 저를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선생이 감탄하여 말했다, ‘이 아이는 장차 점점 크게 진보함이 있으리라.’\\ \_일찍이 그 동생 영근(永根)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동생이 그릇 속의 남은 국물을 가리키면서 ‘어찌 다 깨끗이 비우지 않는가?’ 하자, 공이 움츠리면서 말했다, ‘그릇의 국물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우리 일상의 말과 행동에도 정갈하지 못한 종류가 많으니 모름지기 너는 남의 말을 잘 살펴서 듣고 선을 따르도록 해야 할지니 그런 일이 역시 많을 것이다.’\\ \_전에 1백냥의 돈을 어떤 사람에게 꾸어주었는데 그가 갚지 못하자 심경과 근사록(心經 近思錄)((심경 근사록(心經 近思錄): 심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의 준말로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성현의 마음을 논한 여러 학자의 논설과 그에 주선을 한 책이고, 근사록은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함께 편집한 책으로 정자(程子) 등의 저서와 어록에서 일상 수양에 요긴한 발췌 622조목을 추려서 분류한 초학자들도 알기 쉽게 한 14권의 책이다.)) 두 권을 받고 채권을 무효로 해주고는((절권(折券): 채권(債券)을 무효로 하거나 파기한다는 말로 부채의 환수를 포기함이다.)) 돌아와서 어버이께 아뢰었다, ‘이 책은 성인의 요결을 배울 만한 것이므로 금전의 방식으로 계산할 수 없으니 엎드려 원하오니 염려하지 마시기를 청하옵니다.’\\ \_기해 1899년에((영석 1883년생 17살, 영근 1886년생 14살)) 어머니 상(喪)을 당해 너무 슬퍼한 것이 몸을 상하게 하여 예(禮)를 지나칠 정도였으니, 추운 겨울 동생 영근과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모친 청주 정씨의 묘는 다인면 송호동 사붓 남산에 있으므로, 선의재(문암산과 곤지산 사이)를 통해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우연히 도적을 만나 의복을 빼앗으려 하자 공은 옷을 벗어주며, 말했다. ‘이 동생은 나이 어리고 너무 추우니 옷을 벗으면 쓰러져 죽음을 면치 못하겠으니 압박하지 말기를 바라오.’ 말씀이 심히 간절하여 도적도 감동하고 놓아주었다.\\ \_경자 1900년 가을에 의당 박(毅堂 朴) 선생((의당 박세화(毅堂 朴世和) 선생을 말한다.))의 가르침을 듣고서 청풍(淸風)의 불산(茀山)으로 동생 영근과 함께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니 선생이 그 기이한 기량(器量)을 한 번 보고는 허락하였다. 을사 1905년에 문묘(文廟) 훼손에 박 선생이 국권의 회복을 위해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공이 죽도록 싸움터로 나아갔다가 함께 돌아왔고((편집자주: 을사년(乙巳, 1905). 스승인 의당의 거의(擧義)에 참여하려고 문경으로 갔으나, 의당의 병으로 귀가한 것으로 보인다. 근거: 의당 박세화 학술총서 1 “의당 박세화의 학문세계”, “의당 박세화의 삶과 죽음” 98p 구완희, “박세화는 황해도 쪽으로 와 달라는 유인석의 청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1905년 가을, 일제가 주군(州郡)을 통폐합하고 ‘성묘(聖廟)’를 헐어버리고 ‘합방(合邦)’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라와 도(道)가 함께 망하는’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의병을 준비하려고 문경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갑자기 병으로 눕는 바람에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게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아들인 형교(衡敎), 손자인 면기(冕基), 문인인 윤응선.이종하(李鍾夏).김유성(金逌成) 등이 모두 문경까지 잡혀가게 되었다. 이때 신현국.이수영(李守榮) 등이 병참까지 찾아가서 소란을 피우며 항의하다가 대구까지 끌려가 석 달이나 구금되는 일이 생겼다. 박세화 일행은 서울ᄁᆞ지 잡혀갔다가 이듬해 4월에야 풀려 날 수 있었다.”)), 공은 선생 문집 의당집(毅堂集)(( 속에 선생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이 행장(行狀)을 쓰신 사암 안재극이 직접 이강년의병진(李康秊義兵陣) 좌종사로 활약하고, 또 의당 박세화 문인이므로, 이 기록은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의당집(毅堂集)에 묵암 황영석의 질문과 의당의 답변이 수록되어 있다.))\\ \_후에 남은(南隱)의 거처에 사시는 지암(持菴) 김 선생((지암 김재경(持菴 金在敬) ))을 찾아뵈니 선생이 공에게 말했다, ‘사람의 품성은 본래 선하지 않음도 없고 악이 기질의 병폐도 없는 것이다.’ 공이 자리를 피하면서 대답하였다, ‘풍조의 병은 기질의 해악보다 더욱 심합니다.’ 선생이 이르기를, ‘그대가 스스로 터득한 것인가?’물으니 대답하였다, ‘일찍이 유성재(柳省齋)((유성재(柳省齋): 유중교(柳重敎/ 1832-1893)의 호가 성재인데, 그는 고흥유씨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었으며 사헌부장령 등에 제수를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성재문집(省齋文集) 60권 등 저서를 여럿 남겼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의 문집에서 보았습니다.’ 선생이 감탄하면서, ‘그건 표절(剽竊)한 것은 아니로다.’ 하였다. \\ \_평소에 고요한 방에서 똑바로 앉아 낮에는 반드시 사모관대((사모관대 (紗帽冠帶): 사모와 관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 본디 벼슬아치의 복장이었으나, 지금은 전통 혼례에서 착용한다.))를 갖추었으니 단정치 못한 모습은 보인 적이 없으며, 책상의 서책은 정돈되고 어지럽게 흩트리지 않았다. 항상 심경과 근사록 같은 여러 책들을 두고 좌석 우측에는 ‘신기독(愼其獨)’과 ‘보만절(保晩節)’((신기독, 보만절(愼其獨, 保晩節): 신기독은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중용장구(中庸章句)에 나오는 개념으로 혼자 있을 때에라도 근실히 삼간다는 뜻이니 독(獨)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해도 자기만은 아는 것(人所不知而己所獨知)’로 해석한다. 보만절은 늘그막까지 그 정신을 보전하여 지킨다는 뜻이 되니 시경(詩經)에‘보이지 않는 곳에도 하느님(上帝)이 임한 듯 행동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에서도 자신을 굳게 지킨다(不顯亦臨 無射亦保)’는 데서 나온 개념으로 항상 자신을 지킨다는 뜻이다.))이라 게시하고서 천지사방(天地四方)((육우(六宇): 하늘과 땅, 동서남북을 말하니 상하와 사방(四方)을 뜻한다.))으로 아침저녁 성찰하면서 거실에 편액을 거니, 일컬어 ‘묵암(默菴)’이라 하였다.\\ \_무릇 일체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이나 남의 실수와 악행은 입에 언급하지를 않고 더욱 정성과 공경에 삼가며 스스로 더욱더 엄격하였으니, 비록 어려움에 시달릴지라도 평탄한 듯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어짊을 구함[求仁]이란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인데, 받들고 물리치며 높이고 멀리함은((존양숭벽(尊攘崇闢): 중중하고 배격하며 높이고 물리침이란 말로, 일찍이 춘추(春秋)에서부터 내려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개념인 것 같으니, 곧 왕(王) 곧 주(周)나라의 왕통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상이다.)) 우리 의당(毅堂) 선생께서 평일에 가르치던 골자였으니 우리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_하루는 왜졸(倭卒) 수십 패거리가 마을사람들을 노략질을 하자 모두들 도피하였으나 공은 홀로 의연히 저들을 대하여 앉았다. 저들이 넓은 소매 옷을 보고는 비난하면서, ‘이게 무슨 옷이오?’ 묻기에 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선대 임금님의 예복이오.’ 저들이 말했다, ‘어느 나라가 무슨 까닭으로 통제하오?’ 대답했다, ‘유학자가 예의를 지키는 바일 뿐이오!’\\ \_그때에 왕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대는 자가 있으나 돌아볼 겨를이 없어 마치 그도 의리가 있는 것처럼 응수하거나 혹은 새로운 학문으로 유혹하여 ‘지금의 문화세계의 허다한 기교를 말하면서 인재(人才)를 개발한답시고 소위 유학(儒學)이라는 것은 썩어빠졌다’고 운운하기도 하였다. 공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수십 년 읽은 바가 다 허사란 말인가? 그대가 들은 바 그 까닭의 말을 해주기를 청하노라. 우리 유학은 다만 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고금에 걸쳐서 하늘이 다하도록 잘못되는 일이 없는 도리((망추지도(罔墜之道): 흔히 말하는 극천 망추지도(極天罔墜之道)이니 하늘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도리라는 강조의 표현이다.))이다. 저들은 소위 윤리를 멸하고 떳떳한 도리를 반대하며 경서의 파괴를 배우는 것들이니, 성인을 업신여기고 사람을 짓무르고 늪지대의 쏘는 독충들이다. 또 소위 기괴한 기술과 음탕한 기교로 더욱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유혹일 뿐이다.”\\ \_마을의 집안 여러 자녀들이 서교(西敎)((西敎(서교): 기독교(基督敎)를 서양(西洋)의 종교(宗敎)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를 범한 것은 소위 목사(牧士) 사제[主敎]라는 자들이 그 술책으로 감동시켜서 한 편의 성경(聖經)이라는 책으로 인함이었다. 공이 천천히 웃으며 ‘그 성(聖)이라는 것이 무슨 성인(聖人)인가’ 하면서 그 옳고 그름을 쪼개고 격파하여 혼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저들도 입을 다물고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某) 어른은 쇠와 돌(金石)처럼 대단히 투철하고 아주 치밀히((호수(毫銖): 터럭과 작은 수(銖)의 무게를 들어서 근소(僅少)하거나 경미(輕微)한 것을 비유하는 말. 수(銖)는 예전에 무게의 단위로 한 냥(兩)의 24분의 1로 고대에는 기장 낟알 100개를 1수(銖)라 했고 24수(銖)를 1냥이라 했다.)) 명석하여서 이교(異敎)가 유혹할 수 없다.”\\ \_ 아우 영근이 분가(分家)를 나자((제적등본에 의하면, 명치 43년(1910년) 10월 10일 동군(비안군) 정북면 신리동 1통 9호 분가. 이는 (법적으로) 25살에 분가한 것이다. 참고로 저자가 돌아가실 때의 본가는 비안군 현동면 오가동이다. (거리는 100~200m 정도) )) 어버이께 여쭈었다, “아우가 주리면 형이 어찌 홀로 배불리겠습니까? 몇 필지를 아우에게 더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돈독한 우애를 사람들이 되뇌게 되었다. \\ \_경술 1910년 가을 나라가 망한 소식을 듣고 서쪽을 향하여 애통하게 부르짖고 검을 만지면서 스스로 읊었다.\\ \_隆熙四年秋 융희4년 가을 \_杖釼讀春秋 지팡이와 칼 잡고 춘추 읽는데\\ \_華夷人獸界 화이(華夷)와 인수(人獸) 세상에는\\ \_白刃漂欲秋 칼날이 떠도는 가을이 오네.((춘추(春秋), 화이 인수(華夷 人獸): 춘추는 공자가 지은 노(魯)나라 역사책인데 역사서의 표준으로 인식되어 옳고 그름의 바른 모범으로 삼는다. 화이는 문명의 중국과 야만의 주변국들을 말하고, 인수는 사람과 짐승을 말하니 역시 문명의 인간세계와 모모한 짐승의 세계를 대조하는 표현이니 일본을 야만으로 중국과 우리를 문명인으로 은유하는 것 같다.))\\ 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다. \\ \_磨爾一片心 이 일편단심 갈아서\\ \_誓我百年心 내 마음 백년을 맹서커니\\ \_義利交錯地 의리와 이익 뒤섞인 데는\\ \_借爾快剖心 그 마음의 칼을 빌려 심장을 가르리.\\ 그로서 칼은 은밀히 상자에 넣었다.\\ \_얼마 후에 의당 선생의 자결 소식((의당 박세화의 순도(殉道)를 말한다. 순도=단식을 통한 순절(殉節) ))을 듣고는 위패(位牌)를 차리고 통곡을 하고는 달려가 조문하고 상복을 입었다. 기미 1919년 고종 임금이 승하했을 때는 노세기(虜勢岐)에서((노세기(虜勢岐): 그 지역의 지명(地名) 같다.)) 삼가 흰옷 입는 의논을 하니 공이 조선의 임금의 상례의 예전에 근거하여 백립(白笠)((백립(白笠): 흰 베로 싸개 한 흰 갓이란 말로 국상(國喪)에 백성이, 또는 대상(大祥) 지낸 뒤 담제(禫祭)까지에 상제들이 패랭이에 흰 헝겊이나 백지를 둘러서 사용하는 갓이다.))의 3년 예제(禮制)로서 하고 동지들을 이끌어 곡하는 반열(班列)을 실행하였다. 임금의 인산(因山) ((인산(因山): 인산위릉(因山爲陵)이란 말로 산에 능(陵)을 만든다는 뜻이라 임금이나 태상왕(太上王, 왕비, 태자 등의 장례를 높인 표현이다.)) 전에는 크고 작은 제사의 예를 폐하고 설날 차례도 정지하니 이웃 마을이 그렇게 따랐다.\\ \_갑자(甲子) 1924년 1월에 화재로 집에 간직한 집물(什物)이 다 재가 되었다. 공이 탄식하였다, “집의 재산 손실은 진실로 근심하지 않지만 대를 이어 간직해온 서적을 내 온전히 보전하지 못한 것이 심히 개탄스럽도다.” 공은 평소에 저작(著作)을 즐겨하지 않았는데 대개 있던 원고도 없어져서 아우 영근이 그 화재에서 남은 것들을 수집하고 그 후의 유적을 갖추도록 청하자 공은 만류하였다, “배워서 실행함이 귀할 뿐인데, 글을 무엇 하겠는가? 다만 가훈(家訓) 9편은 자손의 마음에 새기도록 폐(廢)하지 말게 하라.”\\ \_공은 갑작스런 병환으로 입을 다물고 정신이 어지러워 한마디도 남길 수가 없었으니 그렇게 이틀이 지나 편안히 눈을 감으시니, 갑자 1924년 2월 15일 술시(戌時)로 향년 42년이었다. 달을 넘겨 오두골[烏頭谷] 곤좌(坤坐)에 장사지내니 원근 각지의 선비들이 안타까이 슬퍼하였다. 배위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선비[士人] 석주(錫周)의 따님이니, 두 아드님을 두어서 장남 병룡(秉龍)(27世)과 차남 병도(秉道)이다.\\ \\_아아 공과 같은 이는 진실 온화하고 근실한 자태에 연원도 깊은 정도(正道)의 학문을 더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함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으로 터럭만큼이라도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였도다.\\ \_본성을 반성하고 살핀즉 고요히 본심을 잃지 않고 착한 성품을 길렀으니, 생각하는 듯 행동을 엄연히 성찰하여 자라고 펴져서 뛰어났으며, 두려워 조심함이 꾸준하였다. 비록 잠시 동안((조차전패(造次顚沛): 조차(造次)는 급하고 당황스럽다는 황망(慌忙)함의 뜻이고 전패(顚沛)는 좌절하고 넘어지면서 곤궁함에 빠진다는 말을 합친 표현이니, 잠시 동안이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옛 방도를 따를지라도((동준도철(動遵塗轍): 도철은 과거에 지나간 옛날의 길이고 동준은 따라서 행동함을 말하니, 옛 방식을 따라감을 뜻한다.)) 옛 사람들이 스스로 기약했던 한 방식에 따라 숭상하고 배척하며 받들고 물리치는 엄격함을 스승에게 배운 바를 확실하게 범하지 아니하였으니, 그러므로 도(道)가 망하는 아픔에서 칼을 어루만지던 시구(詩句)((무검지구(撫劒之句): 이는 앞의 언급한 경술국치(庚戌國恥) 때에 공이 읋었던 ‘무검자가(撫劒自歌)’의 시를 말한다.))가 나온 것이다. 의연히 목숨을 버릴 뱃심의 변하지 않는 정신이 있었으니, 읽는 이로 하여금 낙담하지 말고 기가 죽지 않도록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_애석하도다, 하늘이 수명을 더 주어 멀리 나아가게((정매(征邁): 멀리 나아감.)) 했다면 유학자(儒學者)가 될 기대를 한 몸에 받도록 점쳐졌는데 그 재주 이뤘다 소리 못 듣고 하늘이 빼앗아 갔으니 어찌된 일인고? 이 어찌 맹자가 말한 소위 본성(本性)에는 명(命)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젊어서 불산(茀山)의 의당(毅堂) 문하에서 형제가 낭랑히 함께 공부할 때((갱슬지석(鏗瑟之席): 낭낭히 거문고를 연주하는 자리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글을 읽고 뛰어나게 공부를 하는 자리를 은유한다.)) 둘이 난형난제(難兄難弟)였으니((이난(二難): 형제(兄弟)를 뜻하니, 세설신어(世說新語 德行篇)에 전하기를, 후한(後漢) 때 진기(陳紀 字元方)와 아우 진심(陳諶 字季方)이 훌륭하여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해 난형난제(難兄難弟)의 고사가 나왔는데, 그들의 아버지 진식(陳寔)이 일찍이 두 형제를 평론하기를, “원방은 형이 되기 어렵고, 계방은 아우 되기가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고 했다는 데서 이난(二難)이라는 것이다.)) 그 행동과 말씨에 내가 감복한 것이 깊었고 또 오래였도다.\\ \_하루는 공의 아우 영근(永根)이 내게 와서 가장(家狀) 한통을 소매에서 꺼내주면서 말했다, “이는 돌아가신 형님의 짧은 삶의 대략이온데, 동문(同門)으로 덕 있는 선비들이 거의 세상 떠나시고 제 형님을 깊이 아는 분이 군(君)만한 분이 없으니 어찌 그 자취를 모아 말씀을 갖추어 들어내 주지 않겠소?” 옛 친구를 생각하면 끝내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위와 같이 채워서 총괄하고 간절한 그리움으로 이렇게 이르노라.\\ \_\_1926년 음력 3월 순흥 안재극\\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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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3 16:32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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