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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AP 37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乙酉新刊譜序**\\ \_두고 온 산하, 눈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고향산천, 꿈에라도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고향마을,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영영 가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수록 그리운 고향이다.\\ \_그 곳에는 대를 이어 살아오신 집안 어른들이 계시고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 있다. 세월이 하도 많이 흘러서 이제 어르신들은 돌아가셨을 것이고, 살아 계신다고 하여도 백세를 넘기었으니 어찌 살아 계실 것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철없던 시절, 같이 자라던 동기들도 이제는 칠십을 넘긴 고령이 되었으니 설사 만난다고 한들 제대로 얼굴이나마 알아볼 수 있을런지.\\ \_우리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 동해를 바라보며 탁 트인 넓은 벌이다. 서쪽 부암과 규암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들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흐른다. 물이 하도 맑아서 물속의 모래알까지도 셀 수 있을 정도이다. 물은 다시 신설과 청룡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을 받아들이고 굽이굽이 돌아 멀리 동해로 빠진다. 물이 하도 맑아서 물이 지나는 지역을 통틀어서 명천으로 부르고 있다. 들의 서북쪽에 연대봉(煙臺峯)이 우뚝 솟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봉화를 피워 올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불을 지핀 흔적은 초지에 묻혀서 찾을 길 없다. 봉의 왼쪽 자락을 타고 흘러내린 산줄기가 동북방향으로 달리면서 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서남쪽으로 뻗은 다른 한 줄기는 신설계곡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청룡이 치솟듯 솟아올라, 멀리 동남쪽에 솟아 있는 재덕산으로 이어진다. 재덕산 너머가 유명한 칠보산이다.\\ \_우리의 고향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고장이다. 언 땅이 녹기 시작하고 겨우내 얼음 속에 갇혀 있던 시냇물이 햇살을 받아 은빛 옥구슬이 되어 흐르기 시작하면 들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난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앞산 중턱 어디선가 뻐꾸기가 운다. 고향 어른들은 발귀(소가 끄는 썰매)에다 궁주리(싸리로 엮은 큰 바구니) 가득히 두엄을 싣고 들로 나가신다. 느릿느릿 걷는 뒷모습만 보아도 저분은 큰집 마다배(큰아버지)거나 작은사랑 아즈바이(아저씨)임을 알 수 있다.\\ \_1980(一九八○)년 여름, 시조(始祖)의 발상지 평해를 찾아갔다. 일행은 남훈(南燻)씨, 원수(源秀)씨, 흥응(興應)씨, 세백(世百)씨, 을팔(乙八)씨 그리고 나까지 여섯. 1.4(一․四)후퇴 때 같이 월남한 분들이다. 고향에 갈 수 없으니 조상의 땅이나마 밟으면서 망향의 한을 달래고자 함이었다. 내친걸음에 종가(宗家)를 방문하고 족보가 있으면 족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_평해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이 있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정자에 오르면 멀리 동해의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자 주변은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솔 숲 사이를 흐르는 바람이 더위를 잊게 한다. 월송정은 새로 단청을 입혀서 산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정면에 최규하 대통령이 쓴 편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분의 성품 같은 단아한 필체였다. 정자 동편에 평해황씨 시조들을 모신 제단과 추모비가 들어서 있는 성지가 있다. 비석은 열 기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씻기고 이끼가 끼어 비면에 쓰인 글씨는 희미해도 담긴 뜻은 너무나 훌륭해서 찾는 이의 마음 경건하게 해준다. 차례로 둘러보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자랑스러운 조상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들었다.\\ \_오후에는 종가가 있는 사동리를 방문했다. 사동리는 평해읍에서 버스를 타고 한 이십분쯤 북으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마을이다. 종가는 마을 뒤쪽 노송(老松)이 가지를 늘어뜨린 언덕 밑에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고색창연한 것이 종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콩밭 사이로 난 마을길로 들어서자 저쪽에서 종가 분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방문할 뜻을 전하고 족보가 있으면 족보를 열람하고 싶다고 했더니 기다리고 있다가 마중을 나온 것이다. 마치 객지에서 돌아오는 혈육을 대하듯 깍듯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 할아버지의 후손들이니 그럴 법도 하다.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아온 탓에 쓰는 사투리가 조금 다를 뿐 같은 형제인 것이다. 대청 옆 협실로 안내를 받았다. 협실은 벽장이 딸린 꽤 큰방이다. 객을 맞는 방 인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곧 이어 벽장에 보관된 족보를 들어내어 열람하기 시작했다. 다섯 질에 족히 백권이 넘는 분량이다. 종가 분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한 장, 한 장, 조심스러이 넘기었다. 그러나 찾고자 하는 입북조(入北祖) 원생(遠生)공(公)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돌려가면서 찬찬히 보았으나 없다. 남훈(南燻)씨는 소년시절 종가 어른들께서 고향 마을로 수단하러 오신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아쉬워한다. 시간이 꽤 흘렀다. 더 찾을 것을 단념하고 대청마루에 나오니 녹음이 우거진 사동리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논은 한 배미도 없고 콩과 옥수수를 심은 밭이 녹음 사이사이로 드러나 보인다. 그 옛날, 원생할아버지께서는 이 마을에서 나시고 장성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가 유형이라는 엄청난 일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왜 족보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을까?\\ \_평해를 다녀온 뒤로도 계속 족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황씨중앙종친회에도 나가보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허사였다. 1994년(一九九四年) 5월(五月) 남훈(南燻)씨께서 중앙도서관에 있는 여섯 질의 평해황씨 족보를 열람하여, 입북조(入北祖) 원생(遠生)공(公) 이후 5대(五代)까지의 기록을 찾아내고, 이 기록에다 봉흥(鳳興)씨께서 생전에 기억을 더듬어 기술하신 입북조(入北祖) 원생(遠生)공(公)의 6세손(六世孫) 이후의 기록을 보완하여 가칭 “청룡황씨파보(靑龍黃氏派譜)”를 만들었다. 이 파보는 중국 을석(乙石)씨의 기록을 참고하고 한자 옆에 한글을 써서 읽기 편하게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본으로 보관되어 참고자료로 쓰이고 있다.\\ \_그런데 2004년(二○○四年) 뜻밖의 낭보가 있었다. 원수(源秀)씨께서 중국 연길(延吉)의 인척을 통하여 족보를 수소문 하던 중 조카인 병식(炳植)씨가 일가에 보관된 “평해황씨세보(平海黃氏世譜)”를 발견, 5권(五卷) 전질을 복사하여 들여오게 된 것이다. 뜻밖의 일이라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족보가 중국 연길에서 나오다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원수(源秀)씨께서 애쓰신 덕에 족보를 찾게 되었다. 세보를 접하는 순간 오래전에 떠나가신 조상을 만나 뵙는 것 같아서 여간 기쁘지 않았다. \\ \_세보는 1918년(一九一八年)에 작성하여, 그 다음 해에 용정에 있는간도시보사( 間島時報社)에서 인쇄한 것으로 되어있다. 1918년(一九一八年)이면 3.1운동(三․一運動)이 일어나기 직전,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이들이 뜻을 모아 족보를 만들고, 그 자손들이 시련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소중하게 간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현대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선조(先祖)들은 해낸 것이다.\\ \_“평해황씨세보(平海黃氏世譜)”가 발간되고 86년(八十六年)의 긴 세월이 흘렀다. 삼십년에 한번씩 족보를 다시 만든다고 해도 세 번을 고쳐 쓸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대개 족보는 삼십년을 한 주기로 개정본을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주기가 다가오면 전대(前代)의 기록을 재정리하고, 새로 수단한 기록을 보첨(補添)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의 아니게 두 번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한 세기가 다 되어 가는 지금, 세보(世譜)의 발견을 계기로 새롭게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_조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청룡황씨(靑龍黃氏)의 후손들은 남훈(南燻)씨가 만든 파보가 있어서 바로 연결이 되었으나 다른 종친들은 호적과 대조하면서 항렬자를 따지고 연대를 추적하여 조상과의 만남을 이루어 냈다. 비록 족보상의 만남이지만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이 컸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신 조상과의 만남이 이러한데 남북으로 갈린 이산가족의 상봉은 오죽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족보를 통하여 조손간에 만났으니 남은 일은 북에 두고 온 혈육들을 만나는 일이다. 정녕 남북통일의 그날이 온다면 새로 만든 족보를 펼치고 지난 세월을 말하고 싶다. 오늘따라 두고 온 고향산하가 더욱 그리워진다.\\ \_끝으로 이 족보가 나오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마음으로 애쓰시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신 남훈(南燻)씨와 원수(源秀)씨 두 분께 감사하며 연변의 용정보(龍井譜)를 찾는데 기여한 병식(炳植)씨와 편집과 교정에 수고한 병혁(炳赫)씨의 노고가 있었다.\\ \_\_을유(乙酉)(2005(二○○五)) 1월(一月) 10일(十日) 명천(明川) 입북조(入北祖) 원생공(遠生公) 15세손(十五世孫) 성록(成祿) 근서(謹書) </typo> </WRAP>
c9-01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5 10:47 저자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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