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진사노암황공묘갈명(成均進士魯庵黃公墓碣銘)=== \_**成均進士魯庵黃公墓碣銘**\\ 公諱中信字子貞號魯庵黃氏平海人高麗太子檢校諱溫仁之賢裔也至三 世諱瑞門下侍中諡文節公子曰宗亮户部典書子曰世英禮賓同正子曰龍 起禮賓正子曰吉甫兵使子曰得載縣監子曰玉崇入\_本朝漢城判尹子曰 輔坤生員於公爲高祖父曾祖曰諱瑀星州牧使曰應淸壬子司馬道學高明 \_行特異\_除眞賓縣監\_命旌閭享明溪院世稱大海先生考曰居一號明 溪\_贈工曹參議妣贈淑夫人盈德鄭氏成均司成自成曾孫澄女有女士行 以大明萬曆丙戌生公生有異質聰穎絶人年至舜句好學行義賢聲大噪己 酉陞上庠居洋時士論乖張公獨守正不撓人莫不韙之仁廟丙子亂率子𨬔 倡義事載永陽四亂錄遊旅軒張先生門孜孜劬學克家奬許一生偉蹟載永 川郡誌戊寅卒享年五十三葬永川郡華北丹湖洞魯柯谷中峯子坐配宜人 安東權氏\_贈參判東峯克立女有壺儀克配君子墓合封育五男一女男長 𨬔成均進士順陵參奉次鏸丁卯适亂倡義討賊鋌鎰鎭通政女金宏在𨬔系 男永河鏸男永河出弼河治河女南胄明南道佰鋌男聖河仲河鎰男時頔鎭 男垃永河男壽吉弼河男世東治河男載欽聖河男元吉貞吉仲河男永淑 永善時頔男聖澄聖宗垃男世浩男世龍曾玄以下不錄於乎公壽不滿德 未展其所蘊而沒世詎不爲後人之傷惜哉今去公之世遠矣文獻蕩佚且獲 碣即從兄東溟公中久所撰次而石笞塡漫患不能讀後承懼懿跡之況泯 將伐石改壁羨門責銘於不佞累辭不獲畧叔世系詳錄其子孫俾列諸貞珉 以詔于來世與天柏終始系之以銘曰聿追大祖之諸業克蒙賢師之奬詡 可以徵典刑之紆餘惟其龜頭蝺足垂千萬世而過者必式\\ \_\_朝鮮開國九丁未三月宗後人承文院副正字[土憲]撰 \\ \_**성균진사(成均進士)인 노암황공(魯庵黃公)의 묘갈명(墓碣銘)**\\ \_공(公)의 휘(諱)는 중신(中信)이요 자(字)는 자정(子貞)이며 호(號)는 노암(魯庵)이고 성(姓)은 황씨(黃氏)로서 고려 때에 벼슬이 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 온인(溫仁)의 어진 후예이다. 3(三)대를 내려서 휘(諱) 서(瑞)는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요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었으며 아들 종량(宗 亮)은 호부상서(戶部尙書)였고 그 아들 세영(世英)은 벼슬이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이며 그 아들 용기(龍起)는 벼슬이 예빈정(禮賓正)이고 그 아들 길보(吉甫)는 벼슬이 병사(兵使)였으며 그 아들 득재(得載)는 벼슬이 현감(縣監)이요 그 아들 옥숭(玉崇)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벼슬이 한성판윤(漢城판尹)이며 그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니 공(公)에게는 고조부(高祖父)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는 우(瑀)이며 벼슬은 성주목사(星州牧使)이고 조(祖)의 휘는 응청(應淸)이니 임자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고 효행(孝行)이 특이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이 제수되고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으며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있으니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칭한다.\\ \_아버지의 휘는 거일(居一)이니 호(號)는 명계(明溪)이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贈職)된 영덕정씨(盈德鄭氏)로서 성균사성(成均司成)을 지낸 자성(自成)의 증손녀이며 징(澄)의 따님으로서 여사(女士)의 행의(行義)가 있었다.\\ \_조선시대(朝鮮時代)의 선조(宣祖) 19(十九)년 병술(1586(一五八六))에 공(公)을 낳으니 나면서부터 재질(才質)이 특이하고 총명과 영특함이 뛰어나서 나이 15~6(十五、六)세가 되어서는 배움을 좋아하는 행의(行義)와 어질다는 명성(名聲)이 크게 떠들석했으며 기유년(己酉年)에 태학(太學)에 올라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에 사림(士林)의 의논이 괴리(乖離)된 방향으로 퍼져나갔으나 공(公)이 홀로 바르게 지키며 흔들리지 않으니 모두 그를 대단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조(仁祖) 14년(1636(一六三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아들 연(𨬔)을 데리고 의병(義兵)을 일으켰으니 그 사실이 영양사란록(永陽四亂錄)에 실려 있으며 장여헌(張旅軒) 선생(先生)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여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서 선생의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으며 일생(一生)의 큰 업적이 영천지(永川郡誌)에 실려있다.\\ \_인조(仁祖) 16년 무인(戊寅)(1638(一六三八))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53세였으며 영천군(永川郡) 화북(華北)의 단호동(丹湖洞) 노가곡(魯柯谷) 중봉(中峯)의 자좌(子坐)에 장사 지냈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인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된 호가 동봉(東峯)이며 이름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서 부덕(婦德)이 있어서 군자(君子)의 배필 역할을 잘했으며 묘(墓)는 합봉(合封)이다.\\ \_5남1녀(五男一女)를 길렀으니 맏아들 연(𨬔)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고 다음은 혜(鏸)이니 정묘년의 이괄(李适)의 난(亂)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賊)을 토벌(討伐)했다.\\ \_다음은 정(鋌)이요 다음은 일(鎰)이며 다음은 진(鎭)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딸은 김굉좌(金宏佐)에게 출가했다.\\ \_윤(𨬔)의 계자(系子)는 영하(永河)이고 혜(鏸)의 아들 영하(永河)는 백부(伯父)에게 출계(出系)했고 다음은 필하(弼河)와 치하(治河)이며 딸은 남주명(南胄明)과 남도상(南道(怕))에게 출가했다.\\ \_정(鋌)의 아들은 성하(聖河)와 중하(仲河)이며 일(鎰)의 아들은 시적(時頔)이고 진(鎭)의 아들은 립(垃)과 길([土吉])이요 영하(永河)의 아들은 수길(壽吉)이며 필하(弼河)의 아들은 세동(世東)이요 치하(治河)의 아들은 재흠(載欽)이며 성하(聖河)의 아들은 원길(元吉)과 정길(貞吉)이다.\\ \_중하(仲河)의 아들은 영숙(永淑)과 영선(永善)이요 시적(時頔)의 아들은 성징(聖澄)과 성종(聖宗)이며 립(垃)의 아들은 세호(世浩)이고 길([土吉])의 아들은 세룡(世龍)이며 증손(曾孫)과 현손(玄孫)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_아! 공(公)이 그 덕행에 만족한 수(壽)를 누리지 못하여 그 쌓은 포부(抱負)를 펼치지 못하고 죽었으니 세상에 누구인들 후세 사람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요. 지금 공의 살던 세상과는 멀어졌고 문헌(文獻)도 모두 없어졌으며 또 옛날에 세운 비문(碑文)은 곧 공의 종형(從兄)인 동명공(東溟公) 중윤(中允)이 지은 것이었는데 비(碑)가 갈라지고 이끼가 메워져서 분명하지 않아 읽을 수 없게 되니 후손들이 떳떳하시던 행적(行蹟)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서 장차 돌을 다듬어 묘도(墓道)의 비석을 개갈(改碣)할 계획으로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의 글을 책임지으므로 여러번 사양해도 되지 않아 세계(世系)는 간력히 서술하고 그 자손록(子孫錄)은 자세히 써서 후세(後世)에 천지무궁(天地無窮)토록 전하게 했다.\\ \_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 聿追大祖之諸業 대조(大祖)의 서업(緖業)을 잘 계승하며 \\ 克蒙賢師之奬詡 어진 스승의 칭찬과 격려를 크게 받았으니 \\ 可以徵典刑之紆 재능(才能)이 넉넉한 전형(典型)을 징험할 수 있다.\\ 餘惟其龜頭蝺足 오직 그 거북 두겁과 용트림 바탕의 비석(碑石)은 \\ 垂千萬世而過者 족히 천만(千萬)년 내려가리니 지나는 사람들아 \\ 必式 반드시 본받으라. \\ \_\_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지 아홉 번째의 정미(丁未)년(1907(一九○七)) 3월(三月) 초하루 날 종후인(宗後人)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벼슬을 한 헌([土憲])이 짓다.\\ \\ 주1.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縣光)의 호(號)가 여헌(旅軒)이다. 선조(宣祖) 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報恩縣監)을 시작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辭退)하고 학향(學向)에 전념했다. 인동(仁同)의 동락서원(東洛書院)에 제향(祭享)되며 여헌문집(旅軒文集)이 전(傳)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