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전참봉증호조참판모와황공묘갈명(璿源殿參奉贈戶曹參判慕窩黃公墓碣銘)=== \_**璿源殿參奉贈戶曹參判慕窩黃公墓碣銘**\\ 公諱德淵字景臨號慕窩姓黃氏平海人也黃之先出自中國唐龍朔間學士 公諱洛東桴居平海子孫仍貫而麗朝文節公諱瑞其中祖也李祖宣廟時有 諱應淸逸顯監世稱大海先生享明溪院生諱居一贈工議號明溪生諱中信 生員號魯庵以東峯權公克立之婿遂落南爲永人生諱𨬔文司諫丙子亂父 子擧義赴暘溪鄭公好仁陣以功贈吏判號竹覽俱遊旅軒張先生門諱永河 文縣令諱壽吉淸州牧使曾祖曰運東祖曰致寬考曰鯤海皆隱德不仕妣順 天朴氏錫三女公生于正廟丁巳兄弟三第居二自幼天姿明敏孝性特異甫 就學便曉解事親之義而左右就養承無違及有大疾湯鑪不撤夜禱北辰露 伏達曙割服和藥病乃得差神明之感固如是也聯床共被友于尤篤宗黨有 事必禀決於公甞就玄隱趙公基永講經問禮特蒙奬詡魯竹二公文籍散佚 公收拾泰毫精寫以藏累世先塋在於竹林而香火沒樣公興闔族鳩資拮据 買置祭田又以明魯竹三公立祠之意孜孜不倦遭內外艱廬墓三年致哀盡 禮雖當衷餘一如袒括扁其居曰慕窩盖取終身孺慕之義也庚申孝行入鏽 啓除璿源殿參奉高宗己卯十月二十五日以疾終于慕窩壽八十三葬于自 浦谷負兑原後以孝贈戶曹參判配羅州林氏漢伯女先公卒贈貞夫人墓合 堋生三男相春出爲伯父后壽通政大夫相鎬相燮壽通政大夫相鎬男炳斗 炳權女李云卜相燮男炳根炳聖炳賢女曹奎煥鄭奉憲姜大俊相春男炳杓 炳基炳斗男載圭載奭載好出爲炳權后炳根男載鶴女李壽熙趙鏞沄炳聖 男載榮載吉女李水華曹奎煥男喜日鄭奉憲男璟杓姜男泰中炳杓男載駿 載達出載圭男造錫以下幼不盡錄於乎公以資質之美兼孝友之行處畝畝 而安分隐巖穴而好義敦宗以睦交隣以恤不興人爭競不言人過失豈無所 本而然乎名祖之家學難誣也大賢之模範不泯也可不敬歟載圭甫請余銘 其墓乃爲之銘曰行由孝友業專耕讀裕俊必昌反省無怍而仕而贈天褒感 祝千秋堪語孝子之宅\\ \_\_戊辰上元節聞韶金獻周撰 \\ \_**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모와(慕窩) 황공(黃公) 묘갈명(墓碣銘)**\\ \_공(公)의 휘(諱)는 덕연(德淵)이고 자(字)는 경림(景臨)이며 호(號)는 모와(慕窩)이다. 성(姓)은 평해황씨(平海黃氏)인데 황씨(黃氏)의 선조(先祖)는 중국(中國)에서 왔으니 당(唐)나라 용삭(龍削)년간에 학사공(學士公) 낙(洛)께서 동쪽으로 건너와 평해에서 살게 되었고 자손(子孫)들이 이어 살아 본관(本貫)을 평해황씨(平海黃氏)로하여 살게 되었다. 고려(高麗) 시대(時代)의 문절공(文節公) 서(瑞)는 중조(中祖)이시다.\\ \_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현감(縣監)을 지낸 응청(應淸)은 세상에서 대해선생(大해先生)이라 알려졌는데 명계서원(明溪書院)에서 제향(祭享)을 받들고 있다. 그의 아들 거일(居一)은 추증(追贈) 공조참의(工曹參議)로서 호(號)는 명계(明溪)이다. 그의 아들 중신(中信)은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호(號)는 노암(魯庵)인데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공의 사위가 되어 남쪽으로 옮겨와 마침내 영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아들 연(𨬔)은 문사간(文司諫)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부자가 함께 의병으로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공의 진영에 들어갔다. 이때의 공적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호(號)는 죽람(竹覽)이라 하였고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의 문하(門下)에서 교유하였다.\\ \_그의 아들 영하(永河)는 문의현령(文義縣令)이었고 그의 아들 수길(壽吉)은 청주목사(淸州牧使)이었다. 공(公)의 증조부(曾祖父)는 운동(運東)이고 조부(祖父)는 치관(致寬)이며 아버지는 곤해(鯤海)이다. 이분들은 덕망을 갖추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인데 석(錫)의 셋째 따님이다. 공(公)은 정조(正祖) 시대 정사년(丁巳年)(1797(一七九七))에 태어났는데 삼형제(三兄弟) 중(中) 둘째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질이 영민한데다 효성(孝誠)이 남달랐다. 겨우 배움 길에 들게 되자 문득 어버이 섬기는 의리를 깨달아 좌우에서 봉양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부모님이 병환에 들자 약탕관을 치운 적이 없었고 밤에는 북극성(北極星)에 기도 드리며 새벽이 될 때까지 노천에서 엎드려 새웠다. 또 허벅지 살을 베어 약에 섞어 올리자 이에 병의 차도를 보게되었으니, 신명(神明)이 감동함이 실로 이와 같았다. 밥상을 나란히 하고 이불을 함께 덮는데 형제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종중(宗中)에 일이 생길 때면 꼭 공(公)에게 여쭙고 난 다음 허락을 얻어 처리하였다. 공은 현은(玄隱) 조기영(趙基永)공에게 나아가 경전의 강론을 듣고 예(禮)를 문의하는 가운데 각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_노암(魯庵) 죽람(竹覽) 두 분의 문집(文集)이 흩어지고 없어 감에 공은 이를 수습하여 알뜰이 베껴서 간수하였다. 여러대 이어온 선영(先塋)이 죽림(竹林)에 있었으나 그 제향(祭享)이 잘 이어지지 않자, 공은 일족과 더불어 힘써 자금을 모아 제전(祭田)을 사 두게 되었다. 또 명로죽(明魯竹)(명계(明溪), 노암(魯庵), 죽람(竹覽)) 세 분의 사당을 건립할 뜻을 세워 힘을 기울임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삼년동안 지극한 애도로서 그 예를 다하였으며, 상을 지난 다음에도 상복을 입고 지냈다. 거처하는 집의 현판을 모와(慕窩)라 하였으니 이는 종신(終身)토록 깊이 사모한다는 의리에서 취한 것이다. 경신(庚申)년에 효행(孝行)으로 천거되니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공(公)은 고종(高宗) 기묘(己卯)년(1880(一八八〇) 10월(十月) 25일(二十五日)에 질환으로 모와(慕窩)에서 돌아가시니 수(壽) 83(八十三)세였다. 장지는 자포곡(自浦谷) 부태원(負兑原)이다. 그 후 효행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_그의 아내는 나주임씨(羅州林氏) 한백(漢伯)의 따님으로 공(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고 정부인(貞夫人)에 추증(追贈)되었는데 묘(墓)는 나중에 합폄(合窆)되었다. 아들이 셋인데 상춘(相春)은 백부의 후사로 들어갔고 벼슬은 수(壽)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상호(相鎬) 상섭(相燮)도 수(壽)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_상호(相鎬)의 아들은 병두(炳斗)와 병권(炳權)이고 사위는 이운복(李云ト)이다. 상섭(相燮)의 아들은 병근(炳根) 병성(炳成) 병현(炳賢)이고 사위는 조규환(曺奎煥) 정봉헌(鄭奉憲) 강대준(姜大俊)이다. 상춘(相春)의 아들은 병표(炳杓) 병기(炳基)이다. 병두(炳斗)의 아들은 재규(載圭) 재섭(載奭) 재호(載好)인데 재호(載好)는 병권(炳權)의 양자로 들어갔다. 병근(炳根)의 아들은 재학(載鶴)이고 사위는 이수희(李壽熙) 조용운(趙鏞沄)이다. 병성(炳星)의 아들은 재영(載榮) 재길(載吉)이고 사위는 이수환(李水華)이다. 조규환(曺奎煥)의 아들은 희일(喜日)이고 정봉헌(鄭奉憲)의 아들은 경표(璟杓)이며 강대준(姜大俊)의 아들은 태준(泰中)이다. 병표(炳杓)의 아들은 재준(載駿) 재달(載達)인데 재달은 양자로 나갔다. 재규(載圭)의 아들은 조석(造錫)이다. 그 이하는 아직 어려서 다 적지 못한다. \\ \_아아! 공(公)은 아름다운 자질에다 효행과 우애를 함께 행하였으며, 시골에 살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켰고, 산속에 은거하면서도 의리를 좋아하였다. 화목(和睦)으로 중중간(宗中間)의 돈독함을 다졌고 규율로서 이웃과 사귀었다.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고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찌 그 근본이 없고서야 이러할 수가 있겠는가. 이름있는 조상(祖上)을 가진 집안의 가르침에 속임이 어찌 있을 것이며 대현(大賢)의 모범이 민멸(泯滅)될리 있으랴고 한다면 오히려 분쟁스러운 짓이 되지나 않은지. 재규(載圭)가 비로소 나에게 묘비문(墓碑文)을 부탁함에 나는 다음과 같이 갈명(碣銘)을 붙이고자 한다.\\ \\ 行由孝友 효와 우애를 행하는데 \\ 業專耕讀 오로지 글읽기를 밭 가는 것과 같아야 \\ 裕俊必昌 후일에 반듯이 창성함이니 \\ 反省無怍 돌이켜보건데 부끄럼이 없도록 반성함이 \\ 而仕而贈 하늘이 나에게 줄 것이니 \\ 天褒感祝 감사하게 여기면서 \\ 千秋堪語 오래도록 말을 함으로서 \\ 孝子之宅 그로인하여 효자의 집이 되느니라\\ \\ \_무진(戊辰) 상원절(上元節) 문소(聞韶) 김헌주(金獻周) 찬(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