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촌기(正明村記)=== \_**正明村記**\\ \_\_\_\_李山海\\ 村在月松亭北十五里無奇峯峻嶺之峙無平原大野之豁地勢下而隘土脈 磽确不宜禾麻菽粟麥吾友黃君淸之居焉余問之曰子其人也箕雖曰瘴鄉 而郡之四多幽勝子所知也何不擇山明水麗地寬且沃而居之顧徘徊眷戀 於是歟曰吾姓素迁僻佳山勝水人所共好而吾不知好高樓廣榭人所共樂 而吾不知樂梁肉美饌衆嗜而吾不嗜錦衣抓裘衆欲而吾不欲豈吾之好樂 嗜欲有異於人哉惟其所處所有而安吾心故吾不欲捨此而趨彼去舊而就 新也况吾生於斯長於斯老於斯溪雖不清而吾童子時所釣也山雖不奇而 吾童子時所遊也屋雖陋而藤可容田雖薄而耕可食菜根蔬葉之甘吾口弊 衣短葛之侵吾體無求於人而吾自足止此而終吾年可矣他又何適余聞而 歎日善哉言乎其知爲己之學者乎其能安分聽天者乎傳曰素富貴行乎富 貴素貧賤行乎貧賤素夷狄行乎夷狄素患難行乎患難此言素其位而行也 然其必有涵養操守之力然後雖或處夷狄患難之中而隨遇而安無入而不 自得也今子從事於斯必有平日用功而獨得於心者請子畢其說黃君曰惡 吾無異於衆何隱乎哉吾非樂天而知命者亦非從事於爲己之學者也但吾 粗知動靜之得失試以日用之間人所共之者言之今夫盛夏苦熱雖處過室 而瞑目堅坐則身不汗折綿嚴寒雖處凍地而縮頸褁足則肌不裂如或不自耐\\ 忍狂奔妄走必求其風亭煖室而托焉則亭室未易得而吾身己病矣且譬如 掃塵隨掃而塵益生不如不掃而塵自熄且譬如治井撓之則水益濁不如不 撓而水自淸皆莫非靜之力有而制動也推而類之則天下之事不如此者鮮 矣苟或不達此理而汲汲焉惟圖侵利於己則吾心之嗜欲無窮而逐物妄動 將無所不至其可乎哉此吾所以隨其見在而安吾心不欲妄動於無益之地 者也余起而劔秹曰子之言誠可以警余者矣微子幾乎不自覺矣噫余知動而\\ 不知靜者也學未優而早仕動之妄也才不敏而謀國動之妄也言語空疎無力\\ 上不能啓沃聖聽下不能取信朝廷非動之妄乎辭氣輕率不密接人而圭角太\\ 露臨事而罅漏百出非動之妄乎自今惕然改圖收歛涵養庶不至於狂奔妄走\\ 倀倀素道之歸則皆子之賜也余旣服其言恐或久而妄也綠其問答之說爲正\\ 明村記自覧省云黃君名某壬子上舍以孝命旋閭屢除官皆不赴\\ \\ \_**정명촌기(正明村記)**\\ \_\_\_\_이산해(李山海)주1\\ \_정명촌(正明村)은 월송정(月松亭)의 북쪽으로 15리(十五里)되는 곳에 있는데 기이(奇異)한 산봉우리나 높고 험한 고개도 없고 큰 평야(平野)도 없으며 지세(地勢)가 낮으면서 좁고 토질(土質)이 돌이 많고 메말라서 벼와 삼(麻) 그리고 콩과 조(票)와 보리 등을 경작(耕作)하기가 적당치 않은데 나의 벗 황군(黃君) 청지(淸之)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 \_내가 그에게 묻기를 “자네는 기성(箕城)사람이라 기성(箕城)은 비록 풍토병(風土病)이 있는 고장이라고 말하지만 군(郡)의 서쪽에는 그윽한 경치가 있음은 자네도 아는 바이라, 어찌하여 산도 밝고 물도 맑으며 땅도 넓고 기름진 곳을 택(擇)하여 살지 않고 이 곳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며 배회(徘徊)하고 있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의 성품(性品)이 본시 괴벽하여 아름다운 산과 좋은 물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곳이지만 나는 좋아할 줄 모르고, 높은 누각(樓閣)과 넓은 정자(亭子)는 사람들이 모두 즐기는 곳이지만 나는 즐길 줄 모르며, 좋은 쌀밥과 고기와 맛있는 반찬을 대중 모두 즐겨 먹지만 나는 즐길 줄 모르며, 비단옷과 여우털 갓옷을 대중들은 가지려 하지만 나는 가질 줄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좋아하고 즐기고 먹으려하고 입으려하는 마음이야 어찌 남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그 처지(處地)와 형편에 의하여 내 마음을 편안히 하기 때문에 이곳을 버리고 저곳으로 달려가지 않으며 옛 것을 버리고 새 곳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음이라. 하물며 내가 나기도 여기에서 나고 자라기도 여기에서 자라고 늙기도 여기에서 늙었으니, 개울이 비록 맑지 않아도 내가 어린 시절 고기 낚던 곳이요, 산은 비록 기이(奇異)하지 않으나 내가 어린 시절 놀던 산이며, 집은 비록 누추하지만 무릎을 펴고 살 수 있는 집이요, 전답(田沓)은 비록 박토(薄土)이지만 경작(耕作)해 먹고 살았으며 나물 뿌리와 채소 이파리를 내 달게 먹었고, 해진 옷 짧은 베잠방이도 내 몸을 편케하여 모든 것을 남에게서 구하지 않고 내 스스로 만족하였으니, 이런대로 나의 여생(餘生)을 마침이 옳을 것인데 다시 더 어디를 가겠는가” 하므로 내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착하도다, 그대의 말씀이여. 그대는 자신의 수양(修養)을 위한 학문(學問)을 아는 사람인가 또 그대는 능히 하늘이 정한 분수에 안주(安住)하는 사람인가? 경전(經傳)에 말하기를 본시 부귀(富貴)했으면 부귀(富貴)한대로 행세(行世)하고, 본시 빈천(貧賤)했으면 빈천(貧賤)한대로 행세(行世)하며, 본시 오랑캐였으면 오랑캐대로 행세하며, 본시 환난(患難) 속에 살았으면 환난 속에 사는 사람으로 행세하라고 했으니 이것은 그가 위치(位置)한 형편대로 행세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지조(志操)를 지키는 힘을 함양(涵養)한 뒤에라야 비록 어떤 때엔 오랑캐와 환난(患難) 속에 처(處)하더라도 당한 형편에 따라 안주(安住)하며 어떤 위치(位置)에 들어가도 스스로 만족해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_지금 자네가 이러한 형편에 종사(從事)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평상시의 노력으로 자네만이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있기 때문이니 청(請)하건대 그대는 그것을 모두 말하여 주시게” 하니 황군(黃君)이 말하기를 “그러지 않네. 나도 뭇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니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도 낙천적(樂天的)으로 운명(運命)을 아는 사람이 아니며, 또 자신(自身)을 수양(修養)하는 학문에 종사(從事)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동(動)과 정(靜)의 득실(得失)을 대강 알고서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사이에서 시험한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대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대저 한여름 열기(熱氣)가 괴로울 때에 비록 달팽이 집 같은 작은 집에 살아도 눈을 감고 꼿꼿하게 않았으면 몸에 땀이 흐르지 않을 것이며, 솜(綿)을 자르는 듯한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비록 얼어붙은 땅에 거처해도 목을 움추리고 발을 싸매고 있으면 살이 얼어 터지지 않을 것이나,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참아내지 못하고 망녕스럽게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광분(狂奔)하며 반드시 그 시원한 정자와 따뜻한 방을 구하여 의탁(依託)하려 한다면 정자(亭子)와 방은 얻지 못하고 내몸만 먼저 지칠 것이다.\\ \_또 비유하건대 먼지를 쓸어 내는 것과 같아서 쓸면 쓸수록 먼지만 점점 더 많이 날게 되는 것이니 쓸지 말고 먼지가 스스로 가라앉기를 기다림만 못하며, 또 비유하건대 샘을 다스림과 같아서 샘물을 자꾸 휘저어 버리면 물은 점점 흐려지니 물을 휘젓지 말고 스스로 맑아지기를 기다림만 못한 것이니 이것은 모두 정(靜)의 힘이 동(動)을 억제하는 이치인 것이다.\\ \_이런 사례(事例)로 다른 사물(事物)을 미루어 생각하면 천하(天下)의 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드물 것이니 진실로 어떤 사람이 이 이치(理致)를 이해(理解)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기에 급급(汲汲)한다면 내 마음의 기욕(嗜欲)은 끝이 없는 것이니 장차 그 목적을 위해 못할 일이 없으리 그것이 되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 눈에 보이고 몸이 있는데 따라서 내 마음을 편안히 가지며 무익(無益)한 땅에는 망녕되게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므로 내가 일어나서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자네의 말이 참으로 나를 깨우치게 했도다. 자네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스스로 깨닫지 못할 뻔 했구나. 아! 나는 동(動)만 알고 정(靜)은 알지 못한 사람이다. 배움이 넉넉하지 못하면서 일찍이 벼슬한 것은 망녕된 행동이었고 재주가 민첩하지 못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한 것도 망녕된 행동이었으며 언어(言語)가 빈약하고 결점이 많으며 무력(無力)하여 위로는 임금의 귀를 일깨워 드리지 못하고 아래로는 조정(朝廷)에서 신임을 받지 못한 것은 망녕된 행동이 아니겠는가?\\ \_말씨가 경솔하여 사람들을 민첩하게 사귀지 못하고 말과 행동이 모(角)가 크게 나타나서 사물(事物)에 임(臨)할 때에 잘못이 백방(百方)에서 나오니 행동의 망녕이 아닌가?\\ \_지금부터 단연코 의도(意圖)를 고쳐서 마음을 수양(修養)하는 정신을 수렴하여 거의 광분(狂奔)하고 망주(妄走)하는 행동에 이르지 않고 갈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바른 길을 찾아 돌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모두 자네가 가르쳐 준 것이다.”\\ \_내가 이윽고 그의 말에 감복(感服)하여 그의 말이 혹시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잊어질까 두려워서 그와 문답(問答)한 말을 기록하여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지어 때때로 내 스스로 살펴 보려고 한다. 황군(黃君)의 이름은 아모(某)이고 임자(壬子)년에 진사(進士)를 했으며 효행(孝行) 때문에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으며 여러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모두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 주1. 이산해(李山海): 자(字)는 여수(汝受). 호(號)는 아계(鵝溪). 명종(明宗) 때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응교(應敎)를 비롯하여 이조좌랑(吏曹左郞)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르고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뒤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그후 북인(北人)의 영수(領首)로서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이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사임했다. 선조(宣祖)가 죽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國政)을 맡아보았다. 문장(文章)과 서화(書畫)에 뛰어났고 선조조(宣祖朝)의 문장8대가(文章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