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병진보서문(丙辰譜序文)**\\ \_원래 뿌리없는 나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며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 뒤가 존속할 수 없음은 천지생성의 이치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류의 역사도 오늘이 있음은 과거에 뿌리가 있었던 탓인 것이나 자고로 사람은 오늘이 있는 줄은 알되 오랜 옛 뿌리가 금일을 형성하게 된 것을 자성하고 자기를 닦기는 힘드는 바이다.\\ \_대저 국가가 있음은 생민이 있는 바를 뿌리로 한 것이요, 생민은 과거 조상이 있음으로써 금일의 뿌리가 이루어진 바이라 하여 크게는 영원히 생성하는 인류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우리들이 선조를 스스로 상고하고 금일을 닦아 나감이 생성의 도리에 합치되는 바이라고 생각한다.\\ \_이에 본가의 계통과 내력을 고금에 밝게하며 친애의 정을 유구히 존케하며 선조의 의덕현벌(懿德顯閥)과 후승(後承)의 분류파계(分流派系)를 후래에 전하고 1인(一人_의 덕화를 1(一)가에 추진함은 물론 가이족족이국(家而族族而國)에서 천하를 화성(化成)하는데 사족지가(私族之家)의 수보하는 참뜻이 있다 할 것이다.\\ \_우리 평해황씨는 동한(東漢)의 건무년대(建武年代)로부터 현재까지 1950(一千九百五十) 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조이신 휘(諱) 낙(洛)이 한(漢)나라에서 배를 타시고 우리나라 동해안의 평해(平海) 월성포(月松浦)에 상륙하셨다는 말과 황장군(黃將軍)께서 그곳에 산성(山城)을 쌓고 사시다가 후에 삼형제를 두신 바 이분들이 큰 공을 세워 국가로부터 봉작(封爵)을 받았는데 장자 갑고(甲古)는 기성군(箕城君), 차자 을고(乙古)는 장수군(長水君), 삼자 병고(丙古)는 창원백(昌原伯)이었으며 그 후에 봉작에 따라 관향을 정하게 되어 금일의 평해황씨(平海黃氏)[기성(箕城)은 평해의 구읍호(舊邑號)] 장수황씨(長水黃氏) 창원황씨(昌原黃氏)로 갈리게 되었다는 말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인데 금일에 와서는 이 삼파가 한 조상의 후손이면서도 거의 동근의 의(誼)가 없다시피 되어버렸다.\\ \_소식(蘇軾)의 보인(譜引)에 말했드시 한 사람의 몸이 가치를 쳐서 마침내 길가는 사람들처럼 서로가 무관심하게 된 것이니 이는 세대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친애함이 없어져가는 것을 탄식한 말이다. 참으로 우리 황씨(黃氏)들의 금일의 심정을 잘 나타낸 말이라 하겠다.\\ \_자랑스러운 우리의 조상들은 저멀리 신라시대(新羅時代)로부터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높은 벼슬과 귀한 소임을 받으신 어른과 학문과 덕망이 높으신 어른들이 대대로 연면(連綿)히 이어 끊이지 않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누차의 병란으로 기간의 문적이 없어진데다가 또 보첩마저 소화(燒火)되어 지금 이를 소상하게 고증할 길이 없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_평해(平海)에 본관을 둔 자로 파계를 이은 근원을 찾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금오공(金吾公)으로 중조(中祖)를 삼으셨는데 이조(李朝) 중엽(中葉)에 와서 금계선생 (錦溪先生)께서 처음으로 널리 보첩(譜牒)을 수집하여 초보(草譜)를 만드셨고 그 후 해월선생(海月先生)과 남당선생(南塘先生)께서 수보를 내셨던 것이다. 그 조상을 추모하고 종족을 수합한 거룩한 뜻을 우리 후대들은 마음 깊이 새겨 감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중에는 상심(詳審)치 못한 데가 없지 않아서 후인들이 모르던 것들을 애써 찾아내어 믿을만한 것은 추리고 의심나는 것은 버려서 더욱 신중하게 정리하여 경인(庚寅)년에 이르러 인판(印版)하니 비로소 평해황씨세보(平海黃氏世譜)가 성취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처음 보사(譜事)가 이루어진 이래 그간 5(五)차나 대동보(大同譜)를 수보하였는데 그 중 종인(宗人)의 참가범위가 전국적이며 또 가장 많은 문중이 망라된 것은 갑술보(甲戌譜)였다.\\ \_생각컨대 이것은 갑술(甲戌)당시는 전 4(四)차 때보다 교통과 통신사정이 비교적 좋았던 관계도 있었겠지만 무었보다도 그 당시 보사(譜事)를 맡으신 분들이 학식과 덕망이 높은 3(三)파 종군(宗君)들이었고 또한 한결같이 합심협력하였으며 아울러 그 휘하에서 실무에 종사한 여러 집사들의 지극한 열성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경인보(庚寅譜) 이후의 신묘(辛卯) 경술(庚戌) 경진(庚辰) 신축(辛丑) 등 4차례의 대동보는 여러 지파간(支派間)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분쟁이 계속되었으나 이를 전혀 조정치 못했었다.\\ \_그러나 오직 갑술보(甲戌譜)에서는 수보의 큰 목적의 하나가 동종간의 친목인데 계속 그대로 분쟁의 요소를 남겨둔다는 것은 화목을 저해할 뿐더러 나아가서는 자손대대로 서로 원수를 맺게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없지 않다는 생각에서 분쟁을 해결할만한 고증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고 신중하게 검토하여 이를 해결지워 질서정연한 세계도(世系圖)를 작성하여 보책권두(譜冊卷頭)에 붙임으로서 수백년간의 지파문중(支派門中) 분쟁을 종결시켰으니 보사(譜事)를 계속 발전시키고 동종간의 친목을 도모하는데 큰 장애를 제거한 일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_지난 을묘(乙卯) 9월 중정(中丁)에 학사공(學士公) 전사(奠祀)와 아울러 기성군(箕城君) 금오공(金吾公) 소윤공(少尹公) 시중공(侍中公)의 제단고유제(祭壇告由祭)를 모시는 자리에 참석했던 3(三)파 제손(諸孫)들이 갑술대동보(甲戌大同譜) 후 벌써 40(四十) 여년의 세월이 흘러 그 때 일을 아는 사람은 지금 몇 분 없고 또 출생한 사람은 나날이 번성해가니 후인들에게 보계(譜系)를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다시 대동보를 수보키로 결의하고 각 문중에 통고하였던 바 다음해 병진(丙辰) 8(八)월 15(十五)일 각 문중 수단유사들이 평해(平海) 월송(月松) 추원재(追遠齋)에 모여서 병진수보규약(丙辰修譜規約)을 제정하고 그 규약에 따라서 대동보청을 평해 월송 추원재에 설치키로 했으며 모든 임원을 선정하여 그 소임을 맡겼는데 이들 임원이 각파명단을 수합하고 차서편질(次序編帙)을 동년 11(十一)월 일에 끝냈으니 그 초인적 능률을 감탄하며 애족하는 정성에 고마움을 금치 못한다.\\ \_또 병진수보(丙辰修譜)에 특기치 못할 점은 과거 이의를 가졌던 지파문중에서 보청 책임자들의 성의있는 권유와 문중 대표들의 넓은 화동정신(和同精神) 발휘로 흔연합보(欣然合譜)함이라 이 또한 종중(宗中)의 일대쾌사로 보사(譜史)에 큰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이 보책에 함께 열기된 모든 종인들은 각자가 모두 효제충신지도(孝弟忠信之道)를 면려하고 성(姓)이 사람을 귀하게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이 귀하게 되는 것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존조경종(尊祖敬宗)의 본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_만약 조상의 근원을 상고하고 파계(派系)를 분변하는 것이 없다면 금일의 수보가 어찌 그 뜻이 있겠으며 또 어찌 1인(一人)의 덕화가 온 종족에 추진되고 나아가서 온 천하가 덕화함에 이른다 말할 수 있겠는가. 보책의 원고를 인(印)판에 붙이려할 때 종인들이 나에게 서문을 위촉함으로 사피치 못하여 신보속간(新譜續刊)의 전말을 약술하여 구서(舊序)아래에 붙이는 바이다.\\ \_\_서기(西紀) 1976년(一九七六年) 병진(丙辰) 11월(十一月) 일(日)\\ \_\_예손(裔孫) 내무부(内務部) 차관(次官) 내무부(内務部) 장관서리(長官署理) 제헌(制憲) 4대(四代) 6대(六代) 국회의원(國會議員) 감리교(監理敎)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 장로(長老) 호현(虎鉉) 근서(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