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공(謙齋公) 묘갈명(墓碣銘)=== \_**겸재공(謙齋公) 묘갈명(墓碣銘)**\\ \_공의 휘는 찬구(燦九)며, 초휘는 점술(點述)이고 관명(官名)은 찬희(燦熙)다. 자는 치삼(致三)이오, 호는 겸재(謙齋)며, 관(官)은 종사랑(從仕郞) 분충의(分忠義)이다. 성(姓)은 황씨(黃氏)니 중국 강하(江夏)에서 출계(出系)했다. 시조(始祖) 학사공(學士公) 휘 낙(洛)은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평해(平海)에 자리잡으니 자손들이 인하여 관(貫)으로 삼았다.\\ \_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휘 온인(溫仁)은 관(官)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에 이르렀고, 증손(曾孫) 휘 용(𤨭)은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이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증손 휘 천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며 문과에 급제하여 삼도관찰사(三都觀察使)를 지내고 태조(太祖)를 도와 창업 공신이 되었다.\\ \_포천(抱川)에서 관직을 버리고 남(南)으로 안동(安東)의 풍산(豊山)에 이사하여 살았다. 9(九)세손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니 타고난 성품이 돈후(敦厚)하였고, 인품이 강직(剛直) 온화(溫和)하였다.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문(詩文)을 잘하였고 경전(經傳)에도 심오하였다.\\ \_백씨공(伯氏公) 만휴당(晩休堂) 휘 귀성(貴成)과 난(亂)이 평정되고 귀향하여 서로 더불어 산수간(山水間)에 노니는 것으로 일생의 업(業)으로 삼아 항상 정당하고 바름이 있었기에 인하여 호로 하였다.\\ \_6(六)세손 휘 흥세(興世)에 이르러 비로소 나무재[목현(木峴)]에 살았다. 현손(玄孫) 휘 구석(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며, 관은 증 형조참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되었다. 휘 태진(泰鎭)을 낳으니 호는 낙서(洛西)며, 휘 오원(五源)을 낳으니 호는 운파(雲坡)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으며 함께 문학과 행의가 있었으니 조(祖) 이상 3(三)세이다.\\ \_고(考)의 휘는 종철(宗哲)이며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관은 참봉(參奉)이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고 지극하였다. 비(妣) 유인(孺人)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흥록(興祿)의 여로 부녀자의 행의가 심히 갖추어졌다.\\ \_철종(哲宗) 신유(辛酉)(: 1861(一八六一)) 9(九)월 13(十三)일에 나무재[木峴] 집에서 공을 낳으니 성품이 강직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에 여유와 편안함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미 효우(孝友)의 행실을 알아 백형(伯兄)과 화락(和樂)·담락(湛樂)하여 일생동안 즐거워하며 기뻐했다. 독서를 즐겨 문사(文詞)가 넓어 당시 선비들이 그와 더불어 사귀어 추증하지 않음이 없었다.\\ \_신사(辛巳)(: 1941(一九四一)) 7(七)월 17(十七)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1(八十一)이라. 만운동(晩雲洞) 대추월산(大秋月山) 중곡(中谷) 정좌(丁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_배(配) 단인(端人)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용준(龍俊)의 여로 경신(庚申)(: 1860(一八六〇))년 2(二)월 11(十一)일생이며, 임술(壬戌)(: 1922(一九二二)) 정월 21(二十一일)에 졸하니 묘는 같은 둔덕 사좌(巳坐)이다. 배(配) 단인(端人) 영월정씨(寧越鄭氏)는 무진(戊辰)(: 1868(一八六八))년 생으로 기축(己丑)(: 1949(一九四九)) 10(十)월 7(七)일에 졸하니 묘는 같은 둔덕 손좌(巽坐)이다.\\ \_2(二)남 3(三)녀를 생하니 남에 병극(昞極)·병성(昞星)은 계부(季父) 영구(英九)의 후로 출계했고, 여는 파평(坡平) 윤수필(尹守弼), 단양(丹陽) 우찬원(禹燦源), 진주(晋州) 하대섬(河大燮)이다. 병극(昞極)은 4(四)남 2(二)녀를 생하니 남은 봉기(鳳起)·해기(海起)·인기(麟起)·영기(領起)며, 여는 예천(醴泉) 임상수(林相守), 경주(慶州) 최상준(崔相準)이다. 사위 윤(尹)의 남은 종석(鍾石)이며, 우(禹)의 남은 두석(斗錫)이며, 하(河)의 남은 재호(載鎬)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_아! 공께서는 강계(薑桂)한 성품과 효우의 행실이 있었고, 해박(該博)한 문(文)으로 시험을 보지 않아도 행하는 지위가 있었으니 품계는 낭관(郎官)에 그쳤고 산림에 은거하였도다.\\ \_평온하게 자연의 즐거움을 누려 연세와 덕이 높았네. 정력(精力)은 쇠하지 않아 정원과 자연의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읊조리며 사물에 초월하였네.\\ \_그 자연을 알고 천명을 앎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지은 바의 시문(詩文)이 탕일(蕩逸)되고 불에 타 없어졌으니 더욱 한스럽다.\\ \_어느날 공의 출계손(出系孫) 응기(應起)군이 맏집 증손 태영(泰泳)과 함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비석에 새길 글을 지기(知己)의 청으로 부탁하니, 글을 못한다고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 명(銘)하기를.\\ \\ 기성(箕城)의 세족으로 증원(中源)에서 비롯되었네.\\ 대대로 높은 벼슬 끊어지지 않았고, 인재 많이 나는 근원이 되었네.\\ 오직 충성과 공경으로 고려조에 명현(名賢)이었고 잠재(潛齋)공이 이어 일으켜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네.\\ 관직을 버리고 남하하여 풍산(豊山)에 자리잡으시니 선생의 참뜻은 문단(文壇)에서 노님이었네。\\ 공께서 이 가정에서 태어나 충효(忠孝)와 학문(學問)을 계승하였고, 서재(署齋)공께서는 겸손(謙遜)함으로 종신토록 허물이 없었네.\\ 대인의 넉넉함을 실어 자연을 즐김이여, 검은 상자의 명언 일실(逸失)되어 전하지 않음이 통한(痛恨)이네.\\ 추월산(秋月山) 중곡(中谷)의 둔덕은 공의 무덤이니 어진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좋은 돌을 세우고자 하네\\ 음덕(陰德)을 쌓음이 오래되어 넉넉한 경사(慶事) 대대로 이어지리라.\\ 나의 명(銘)은 아첨이 아니라 많은 선비들이 평하는 말이라네.\\ \\ \_\_정묘(丁卯)(: 1987(一九八七)) 8(八)월 경주 이재길(李宰吉) 삼가 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