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초황이묘갈명(聖樵黃頤墓碣銘)=== \_**聖樵黃頥墓碣銘**\\ 公姓黃諱頤字有中號聖樵平海人在高麗忠烈朝有諱𤨭大匡輔國\_諡忠敬歷 八世諱天祥門下贊成事高祖諱之碩官資憲大夫漢城判尹刑曹判書曾祖諱旱 雨通訓大夫軍資監正祖諱岐通政大夫忠勳府都正考諱道漢城判尹妣貞夫人 全州李氏亨俊之女有女士行以\_成化十四年戊戌生公于梧谷里第幼有異質 十三通論孟詩書及長明解時務備諳典故而處事寬厚持行廉勤士林以淸白稱 之至有實蹟之載在郡誌孝友以治家敦睦以處族鄉黨州里間每先人而後已謙 順和悅無非潛德中出來以篤行除將仕郎庚午考終享年九十三追\_贈嘉善大 夫同知中樞府事葬于郡北梧谷里未坐原配貞夫人月城李氏寶明之女益齋先 生之后有一男仲壽禮賓主簿主簿生六男長百齡通德郎次千齡三萬齡四億齡 五德齡通政六福齡孫曾以下多不盡錄嗚呼公以孝友之性廉謹之行視事周祥 接人寬厚可以有爲於世而不幸値立賢有方之日雖不能展布所蘊一生事爲每 從忠厚邊做去盖多功效之及人觀其雲仍之蕃衍世傳孝友間有科慶始驗潛德 之受報不爽矣舊碼爲風雨所頹今將改竪後孫一河景運甫求記於寅錫謹摭其 實行如右云\_銘曰家傳孝友郡載清白濟之以才實根於德雲仍昌熾乃文乃科 此理之昭報施不差百世貞珉賢孫無替\\ \_\_漢陽趙寅錫撰 \\ \_**성초 황이 묘갈명(聖樵黃頤墓碣銘)**\\ \_\_\_\_※제12세조(第十二世祖) 오곡리 배나무골 갈명(碣銘)\\ \_공(公)의 성(姓)은 황(黃)이요 휘(諱)는 이(頤) 자(字)는 유중(有中) 호(號)는 성초(聖樵)라 평해인(平海人)이니 고려(高麗)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휘(諱) 용(𤨭)이라는 분이 계셔 벼슬이 대광보국(大匡輔國)이요 시(諡)는 충경공(忠敬公)이라。그후(後) 4세(四世)를 지나서 휘(諱) 천상(天祥)이니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요 고조(高祖)는 휘(諱) 지석(之碩)이니 관(官)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한우(旱雨)니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이요 조(祖)의 휘(諱)는 기(岐)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충훈부(忠勳府) 도정(都正)이요 고(考)의 휘(諱)는 도(道)니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형준(亨俊)의 여(女)로 품행(品行)이 방정(方正)하고 절도(節度)가 있었다。 성화(成化) 14년(十四年) 무술년(戊戌年)에 오곡리(梧谷里) 저(邸)에서 공(公)을 생(生)하시다。 유시(幼時)로부터 공(公)의 자질(資質)이 특이(特異)하여 13세(十三歲)에 논맹시서(論孟詩書)를 통달(通達)하고 장성(長成)함에 시무(時務)를 밝게 알고 고전(古典)을 널리 기억(記憶)하며 처사(處事)에 관후(寬厚)하고 행신(行身)이 염근(廉勤)하야 사림(士林)들이 청백(淸白)하다 칭찬(稱贊)이 자자(籍籍)하였다。 고로 그의 사적(事蹟)이 군지(郡誌)에까지 실려 있으며 부모(父母)에게는 효도(孝道)하고 형제(兄弟)에게는 우애(友愛)하며 집안은 사랑으로 다스렸고 족친(族親)에게는 돈목(敦睦)으로 접(接)하여 원근향당(遠近鄕黨) 간에는 매사(每事)에 남을 먼저하고 자기(自己)를 뒤로 하는 겸양화열(謙讓和悅)의 처사(處事)가 숨은 덕성(德性) 중(中)에서 나타났다 하더라。\\ \_독행지사(篤行之士)로 장사랑(將仕郞)에 제수(除受)되고 경오(庚午)에 고종(考終)하니 향년(享年)이 93세(九十三歲)라。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으로 군북(郡北) 오곡리(梧谷里) 미좌원(未坐原)에 안장(安葬)하였다。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월성이씨(月城李氏)요 보명(寶明)의 여(女)로 익재선생(益齋先生)의 후손(後孫)이다。 1남(一男)을 두었으니 명(名)은 중수(仲壽)요 예빈주부(禮賓主簿)라。주부(主簿)는 6남(六男)을 생(生)하니 장왈(長曰) 백령(百齡)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차왈(次曰) 천령(千齡)이요 3왈(三曰) 만령(萬齡)이요 4왈(四曰) 억령(億齡)이요 5왈(五曰) 덕령(德齡)이니 통정(通政)이요 6왈(六曰) 복령(福齡)이라。이하(以下)는 자손(子孫)이 번연(繁衍)하여 다 기록(記錄)하지 못하노라。\\ \_오호(鳴呼)라。공(公)이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하며 지성(至誠)과 염근(廉勤)한 행실(行實)로 매사(每事)에 치밀(致密)하고 소상(昭詳)하여 사람을 대(對)하는데 관후(寬厚)하니 사회(社會)에 큰일을 할 수 있는 인재(人才)였음에는 틀림이 없었거늘 평생(平生)이 불우(不遇)하여 입현유방(立賢有方)치 못하였음은 한사(恨事)였다。 그러나 일생(一生)에 행(行)한 일이 항상 충실(忠實)하고 후덕(厚德)하여 사람에게 미친 바 공해(功劾)가 컷더라。 그후 자손(子孫)의 번연(繁衍)함과 대대(代代)로 효우승전(孝友承傳)하였으며 과환(科宦)이 간혹(間或) 있었음을 볼 때 은덕(隱德)의 보답(報答)을 받은 증험이 틀리지 않도다。 구갈(舊碣)이 오랜 풍우(風雨)에 퇴패(頹敗)되어 이제 다시 개립(改立)코자 일하(一河) 경운(景雲)씨(氏)가 나 인석(寅錫)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함으로 그 실행사적(實行事蹟)을 간추렸노라。명왈(銘曰)\\ \\ 家傳孝友 가전효우 부모(父母)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도리(道理)를 후손(後孫)에게 전(傳)하였고\\ 郡載淸白 군재청백 맑고 깨끗한 행실은 군지(郡誌)에도 기록(記錄)되었다。\\ 濟之以才 제지이재 치밀하고 소상하며 관후함이 빈틈없는 처사에 능란한 제질은\\ 實根於德 실근어덕 타고난 천품과 평생을 닦은 덕행에 연유한다。\\ 雲仍昌熾 운잉창치 후손(後孫)이 번성함이 요원의 불길 같고\\ 乃文乃科 내문내과 희세의 문장과 연면한 과거가 끊이지 않으니。\\ 此理之昭 차리지소 이는 평생을 두고 사람의 도리와 남에게 끼친 사랑의 보답이며\\ 報施不差 보시불차 그 행적에 하느님의 돌보심에 차착이 없음이로다。\\ 百世貞珉 백세정민 백년 천년을 두고 이 비석에 기록(記錄)된 실적이 더욱 빛날 것이며\\ 賢孫無替 현손무체 어진 후손들이 계속 나서 이런 좋은 일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 \_\_한양(漢陽) 조인석(趙寅錫)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