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검교공파보서(壬午檢校公派譜序) (2002년)

 壬午譜序文
 나무라면 뿌리가 있고 물이라면 그 연원(淵源)이 있다.
인간(人間)은 더욱 그 근원(根源)이 명백(明白)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근원(根源)과 계통(系統)을 밝히기 위(爲)하여 보첩(譜牒)을 만들어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나타내어 종친간(宗視間)의 우의(友意)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족보(族譜)는 가문(家門)의 역사(歷史)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그 나라의 국사(國史)를 알아야 하고 소중히 해야 하듯이 그 가문(家門)의 역사를 상세히 알고 또한 소중히 여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나라는 서구문물이 들어와 가족애(家族愛)가 약해지고 개인주의 팽배로 인해 족보는 하나의 유물(遺物)로만 여기고 차츰 숭조목종(崇祖睦宗)의 정신이 희박해진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의 뿌리를 찾는 운동이 뜻있는 지식층에서 일어나고 있음은 실로 다행한 일이다.
 정자(程子)도 말하기를 세상(世上)의 인심(人心)을 바로 잡으려면 먼저 동족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순화(醇化)시키려면 계보(系譜)를 밝히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성씨(姓氏)들이 보첩(譜牒)에 대한 관심(關心)이 차츰 높아져가는 이때 우리 황씨도 이에 발맞주어 보첩(譜牒)을 만들게 되었다.
 먼저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 족보의 간행(刊行)을 살펴보면 1770년(一七七○年) 경인대동보(庚寅大同譜)를 시작으로 1976(一九七六)년 병진(丙辰)대동보까지 14(十四)차례 간행되었다. 그 중 검교공파세보(檢校公派世譜)는 1922(一九二二)년 임오보(壬戌譜)가 있었고 1959(一九五九)년 기해보(己亥譜)가 있었으니 지금에 40(四十)년이 흘렀다.
 26(二十六)년전 병진년(丙辰年)대동보(大同譜)가 있은 이후 사회는 급진적으로 산업화되어 종친들이 널리 전국 각지의 산업현장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니 지금이야 말로 반드시 종족을 모으고 세계(世系)를 매지 않으면 안될 때이다.
 그리하여 뜻있는 우리 종친(宗視) 어른들이 선조를 위하는 정성과 우리 파계(派系)의 실전(失傳)을 염려하고 종친들의 돈목(敦睦)을 위하여 족보를 간행하기로 의논하고 영주(榮州)에 보소(譜所)를 설치하여 2년전부터 부지런히 진행해왔다. 이는 우리 종문(宗門)의 크나큰 경사로운 일의 시작인 것이다.
 이 족보 간행사업을 추진(推進)하여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종친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원근(遠近)의 여러 종친들이 모두 수보(修譜)에 찬동하고 단자(單子)를 신속히 보내오고 또 정해진 수단(修單)대금도 즉시 송금하는 등 이 역사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니 이는 우리 종문(宗門)의 저력(底力)이요, 앞으로 숭조목종(崇租睦宗)의 정신을 계속 이어줄 아름다운 쾌사(快事)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초(不肖)인 제가 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황씨 역대 족보의 서문(序文)의 번역을 맡아 수행하던 중 이번 세보 편찬사업에 처음부터 수단, 편집, 교열까지 전념으로 수고하고 있는 영봉(永鳳), 무섭(武燮), 재호(在鎬)씨와 여러분으로부터 서문(序文)을 쓰라는 부탁과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역사(役事)의 전말(顚末)을 소상히 알지 못하거니와 또한 우리 문중에 웃어른들이 많으므로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요구가 그치지 않아 외람됨을 무릅쓰고 내가 본 바와 들은 바를 간략하게 적게 된 것이다. 이번 세보(世譜)의 편집은 과거 어느 때보다 후손들이 조상에 대해 소상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권두에 선조님들의 봉분(封墳), 재사(齋舍), 누정(樓亭), 책문(策文), 교지(敎旨), 유묵(遺墨) 등도 실어 선조님들의 정취(情趣)를 체감으로 느끼게 해주었으며, 또한 후손들이 잘 알아 볼 수 있는 연호(年號)를 서기(西紀)로 표기했으며 역대 한문(漢文) 서발류(序跋類)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실었으니 이는 실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색인부(索引簿)을 첨부하여 자손들이 세보를 편리하게 찾을 수 있게 한 점 또한 특기(特記)할 만하다. 앞으로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하여 정보화해서 시대에 걸맞게 CD-ROM을 제작했다고 하니 앞으로도 편리하게 사용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북한 땅에 살고 있을 종친들이 입록(入錄)되지 못한 것으로 다음번 수보(修譜) 때에는 통일된 국가로서 함께 동참하여 한 핏줄 한 줄기 동족(同族)의 정(情)을 엮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제 세보(世譜)가 출간됨에 이 세보가 우리 종친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세보를 펴보는 종친마다 세계(世系)가 일목요연하게 펼쳐져 선조에 대한 존중과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와 종친간의 화목의 정이 더욱 새로워지리라 믿는다. 경서(經書)에 충신(忠臣)은 효자지문(孝子之門)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족보가 효성(孝誠)을 진작(振作)시키고 나아가 나라에 크게 공헌하는 종친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제 여러 대학과 주요 도서관을 열람할 때 족보 자료실에 평해황씨검교공파세보(平海黃氏檢校公派世譜)가 진열되어 우리 종친 외에도 유지자(有志者)들이 수시로 열람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다. 끝으로, 이번 세보가 발간될 때까지 처음으로 발의(發議)하고 착수(著手)하여 수단(修單)을 작성하고 영주와 서울에 보소를 옮겨 내왕하면서 편집과 수고하신 여러분 종친과 한문(漢紋) 회장님 그리고 여러 어른들께 경의(敬意)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분들의 노고(勞苦)가 다음 세대 수보하는 데에 귀감(龜鑑)이 되어질 것을 믿는다.
 이 족보 간행을 맡은 출판사 「가승(家乘)」의 협조도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아무쪼록 새로운 천년(千年)을 맞으면서 만들어지는 이 족보로 인해 앞으로 우리 가문(家門)의 혁혁(赫赫)함과 자손만대의 번영(繁榮)이 국가 발전과 함께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원(祈願)하는 바이다.
  2002(二○○二)년 6(六)월 일
 국립강원대학교(國立江原大學校)교수(敎授) 후예손(後裔孫) 재국(在國) 삼가 짓다.

※ 한글을 한자에 병기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