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행성균관대사성황공현지제단비명(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黃公鉉之祭壇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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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黃公鉉之祭壇碑銘
惟我 莊憲王時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黃公謝世之五百有年所矣而羨南之顯 石尙不擧其亦有待於後耶鳴乎由五百載之後溯五百載之前固已邈矣然後孫等採 摭於奎章閣史乘公之資歷始得其槪何其晩也百歲之下可即是而考證矣今箕城氏 諸彦發其幽光將鑱辭以詔來後蓋公與我先祖判書公有蘇黃之義石上之文謬及於 無似者顧玆晩生識蔑人輕其何能稱述而徵諸久遠哉其請不以人而以吾祖自出之 義則有不可終已者謹依其來錄不敢妄加一字而敍之曰公諱鉉其先平海人資憲大 夫工曹典書有定之子高麗文科直提學諱瑾之孫府使諱原老之曾孫門下侍中諱裕 中其遠祖也妣貞夫人奉化鄭氏刑部尙書云敬其外祖也洪武己酉生公少治博士業 弱冠中生員試太宗乙亥親試登乙科第一等權知成均直講乙未拜藝文館應敎世宗 乙巳拜成均館大司成戊申出爲仁壽府尹己酉又拜大司成公再居是職長疏短劄戇 言直論可見其愛君憂國之誠而遺文始出於今日將欲剞劂以壽其傳慈孫之誠勤矣 公之幽潛將自此而公顯於世歟公享六十六春秋而甲寅歿葬于榮川豆田里東盤芝 山西坐之原配貞夫人全州崔氏判書丙禮其考也墓合封無育以兄子仲夏爲嗣生員 孫曰震孫繕工監正曰艮孫生員曰兌孫建功將軍曾孫男曰啓沃應敎有文集號草谷 女適趙琮縣監震孫出也曰碩儒以族家子系艮孫後曰琨女適滄溪文敬仝郡守兌孫 出也以下繁不盡錄惜其遺事遺蹟不盡傳於世無由得其全然古人尙質記人善不妄 下一字而譜牒載經明行修爲世師儒八字非高文盛德而能如是乎實公一部寫眞而 可以證嚮於來世者據是而銘公之堂可庶幾乎銘曰剞歟黃公典書肖子以裘以箕趾 厥先美掌學澤宮是公終始細行雖泯美績在此經明行修前人有誦我述前聞用表斯 壟
  屠維協洽淸明節 外裔孫宣城 金卨 謹撰
  一九九三年癸酉重陽節後裔孫 武燮 謹書


 가선대부 행성균관대사성 황공 현 제단비명
 우리 장헌왕(莊憲王)때 가선대부 행 성균관대사성 황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오백여년이나 되었다. 연도(墓道) 남쪽에 뚜렷한 비갈을 아직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그 또한 후세에 행하라고 기다려 주었음인가? 오호라! 오백년 뒤에 오백년 이전을 거슬러 올라 갈려고 하니 진실로 막연하다. 그러나 후손 등이 규장각(奎章閣)에 있는 역사 서적을 찾아 공의 자력(資歷)과 그 개요를 비로소 얻게 되었으니 어찌 그다지도 늦었다고 하겠는가? 오래된 고증도 역시 여기 이 자료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평해 황씨 여러 선비들이 그 숨겨진 광채를 발굴하여 그 글을 돌에 새겨서 후세에 알리려고 한다. 대개 공(公)은 우리 선조 판서공과는 소동파와 황산곡의 의리처럼 세의(世誼)가 두터웠다. 돌 위에 새길 문장을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지으라고 하니 돌아보건대 나는 못나서 식견은 없고 사람은 경박하니 어떻게 이것을 능히 다 서술을 하여 먼 후일에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분들의 요청이 나의 이러한 사람됨을 보지 않고 계속 지어 달라고 부탁하고 또 우리 조상들과 서로 세교(世交)가 있었으니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삼가 그가 가지고 온 기록에 의거하여 감히 경솔히 한 글자도 가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서술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현(鉉)이니 본관은 평해요, 자헌대부 공조전서 유정(有定)의 아들이다. 고려때 문과에 올라 직제학이던 휘 근(瑾)의 손자이고 부사(府使)였던 원로(原老)의 증손이고 문하시중 휘 유중(裕中)은 그 먼 조상이 된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봉화 정씨니 형부상서(刑部上書)를 지낸 운경(云敬)은 그의 외할아버지다. 홍무(洪武) 기유(己酉) 1369(一三六九)년에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 문과 수업을 닦아서 약관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태종 을해년(참고: 태종조에는 을해년(乙亥年)이 없으므로 태조인 것으로 사료됨, 즉 태조(4(四)년 1395(一三九五))에 임금이 친히 보인 과거에서 을과 제1(一)등으로 합격하여 권지성균직강(權知成均直講)이 되었고. 을미년(1415(一四一五))에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에 배수(拜授)되었고 세종(世宗) 을사(1425(一四二五))년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배수(拜授)되었고 무신년(1428(一四二八))에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다. 기유년(1429(一四二九))에 또 대사성에 배수되어 재차 대사성직에 있게 되었다. 공의 긴 소장(疏狀)과 짤막한 차자(箚子)(: 신하가 임금께 올리는 문서의 한 체)는 강직한 말과 바른 논리에 가히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남긴 글은 처음으로 오늘날에 나타나 장차 인쇄에 맡겨 오래 전해지도록 했다.
 공역(工役)을 맡은 사랑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부지런하다.
 공의 숨겨지고 잠복된 사행(事行)들이 거의 이로부터 공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은 향년 66(六六)세로 갑인년(1434(一四三四))에 서거하니 영천(지금 영주) 두전리(豆田里) 동쪽 반지산(盤芝山)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례지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전주 최씨인데 판서인 병례(丙禮)는 그의 아버지이다.
 묘는 내외분이 합장을 했고, 슬하에 자손이 없어 형의 아들 중하(仲夏)로서 후사(後嗣)를 삼았으니 그는 생원(生員)이었고, 손자로는 맏손자 진손(震孫)이니 선공감정(繕工監正)이었고, 둘째 손자는 간손(艮孫)이니 생원이었고, 셋째 손자는 태손(兌孫)이니 건공장군(建功將軍)이었고, 증손에는 계옥(啓沃)인데 응교(應敎)를 지내고 호는 초곡(草谷)이며 문집(文集)이 있다.
 증손녀는 조종(趙琮)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현감(縣監)인데 이는 진손의 자녀이다. 또 증손 석유(碩儒)는 일가집 아들로서 간손(艮孫)의 뒤를 이었고, 또 증손으로 곤(琨)이 있었고, 증손녀는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군수(郡守)이다. 이 둘은 태손(兌孫)의 자녀이다. 이하는 너무 번다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깝게도 그 유사(遺事)와 유적(遺蹟)들이 세상에 다 전하지 못하게 되어서 그 온전한 것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질박한 것을 숭상하여 남의 선(善)한 것을 기록할 적에 한자도 함부로 쓰지 않았으니 보첩(譜牒)에 [經明行修爲世師儒: 경서에 밝고 행실이 잘 닦아져서 세상에 스승이 되는 유학자]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으니 그 분이 높은 문장과 큰 덕이 아니었다면 능히 이와 같이 기재되었겠는가?
 이 여덟 글자야말로 실로 공(公)의 진실을 묘사한 한 장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가히 후세에 증명을 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공의 묘소에 명(銘)을 쓰면 거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에 명(銘)하노니,
剞歟黃公 아름답도다 황공은
典書肖子 전서(典書)공의 훌륭한 아들이도다.
以裘以箕 선대의 업을 계승하여
趾厥先美 그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이뤘도다.
掌學澤宮 성균관(澤宮)에서 학문을 관장하는 대사성이 되었으니
是公終始 이는 공의 시종(始終)일세
細行雖泯 자질구레한 행실의 기록은 비록 없어졌으나
美績在此 아름다운 업적은 여기에 있도다.
經明行修 명경행수(明經行修)라고
前人有誦 앞사람들이 외운 것이 있으니,
我述前聞 나는 전에 들은 바를 서술하여
用表斯壟 이 묘소에 표하노라.
  기미(1979(一九七九))년 3(三)월 외손 선성(宣城) 김설(金卨)은 삼가 짓고,   1993(一九九三)년 계유년 9(九)월 후손 무섭(武燮)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