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때 조선 승사랑 의릉 참봉 황공 묘지명 병서
공(公)의 휘(諱)는 치(觶)요 자는 덕기(德器)요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시중(侍中) 벼슬을 한 휘(諱) 유중(裕中)은 고려조에 출사(出仕)하여 현달했고, 6(六)대조 휘(諱)는 원로(原老)이니 영주(寧州)의 목사(牧使)요 현조(玄祖)의 휘는 근(瑾)이니 공민왕 때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인데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뜻에 거스른 바 되어 좌천되었다. 사가(史家)들이 그를 충직하고 굳센 인물이라고 찬양하였다.
고조 휘(諱)는 유정(有定)이니 조선조 때 한성판윤(漢城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일찍이 논어(論語)를 읽고 말하기를 논어는 온통 나의 선생(一部吾師)이라고 하였다.
정삼봉(鄭三峰)1)이 자주 그를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증조의 휘(諱)는 연(鋋)인데 진사 시험에 낙방되었고 전(銓)과 현(鉉) 두 형은 합격하였다.
이리하여 서로 경술(經術)을 밝혀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게 중요시함을 얻었고 선비들
중에 가풍의 칭찬을 받았으니 이는 대동여지승람(大東輿地勝覽)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말손(末孫)이니 교수(敎授)와 사온주부(司醞主簿)로 30(三十)세에 작고하고 아버지는 순릉(順陵)의 참봉(叅奉)으로 휘(諱)가 효동(孝仝)이니 풍모와 회포가
자연스러워서 구속을 받지 않고 서화 작품을 모으고 화초를 길러 스스로 즐겼다.
어머니는 영정진씨(永定秦氏)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호(浩)의 손녀이고 태조전승
(太造殿丞)의 벼슬을 한 승조(承祖)의 딸인데, 덕이 부드럽고 아름답게 나타났고 능히
안사람들이 할 일들을 잘 이행하였고 임자(壬子)년 사월 을묘(乙卯)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특하였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두루 읽어 섭렵했으니 남들이
말하기를 공이 가문의 명성을 다시 떨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약관의 나이에 중풍의 병을 얻어 과거(科擧)에 나아가지 않았다. 성질이 본래
차분하고 단정해서 말하고 웃고 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고 천부적으로 정직하고 성실과
효가 극진했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과 친속들과 잘 지냈고 친구 간에 신의를 지켰으며
하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언제나 대소변을 볼 때는 해와
달의 밝음을 피했다. 가지고 주는 것을 의(義)와 이익의 합당함을 살피고 분명했다.
맛있는 음식은 먼저 부모에게 드리고 병이 있을 때는 극진히 보살폈고 풍족할 때는
구차하게나마 완전하다고 하였다. 선한 것을 들으면 자기가 그렇게 할 것 같이 하고 악한
것을 보면 더럽힐까 염려했다. 평소에 몸에 누(累)가 된 것은 거행하지 않았다.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사십 세에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평생토록 영원히 사모해서
지성으로 음식을 올려 제사를 드리며 계모에게 효도를 옮겨 자기를 낳아준 어머님처럼 모셨다.
일찍이 자제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의 몸가짐을 경건히 하고 너의 관직관리를 삼가서
청렴과 효행으로 그 덕을 대를 잇고 학문으로 그 아름다움을 이어서 선인들이 후손들에게
그 아름다운 지혜를 주신 것을 훼손시키지 말라고 했다.
만년에는 집에 대나무를 심고 못에는 연꽃을 심어서 그 전아한 회포를 표현했다.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즐김이 여유가 있었다. 의릉참봉(義陵叅奉)이
되었는데 역시 기꺼이 취임하지 않았다. 몸 다스리는 것을 잘하고 의약을 잘 이해하여
자기의 건강을 조정하고 보호하고 또 나머지로는 남을 구제하는 것이 많았다.
지난해(丁未年) 가을 옛날 묵은 병의 증세에다가 겸하여서 점(痁)병이 든 것으로 인하여
기도를 하고 약을 썼으나 효력이 없어 금년 초하루에 사랑방으로 옮겨 모셔서 돌아갔으니
향년이 57(五七)세였다. 부고를 듣던 날에 향인 들이 슬퍼 애통하게 여겨 다투어 제사와
부의(賻儀)를 했으며 마을의 노인과 산에 있는 중들이 많이 달려와서 조문하면서 말하기를
다시는 남의 급한 일을 도와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다.
유언(遺言)으로 상과(床果)를 하지 말고 사치한 것을 하지 말고, 제(齊)를 올리는 중을
통하여 명복을 구하지 말며 초상을 치르는 의식과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한결같이
주자가례(家禮)에 따르라고 했다.
11(十一)월 임신일에 군(郡) 동쪽의 6(六)리쯤 되는 산악의 감좌(坎坐)의 언덕에 임시 장사를 지냈으니 그 흐름은 태방(兌方)이었다.
부인은 회산황씨(檜山黃氏)인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따님이었다. 교수공은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 제자들 중에는 성공한 사람이 많았다. 공 역시 장인인 그에게 수업을
듣고 비로소 살아가는 정도의 방향을 알았다. 언제나 장인을 섬기기를 아버지나 스승처럼
섬겼다. 2(二)남 2(二)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충순위(忠順衛) 김지석(金砥石)에게 시집을 가서 부모님 상(喪)에 애도하며 슬피 울다가 달(月)을 넘기고 죽었다. 남겨둔 자녀가 있는데 어리다.
장남은 준량(俊良)인데 정유(丁酉) 1537(一五三七)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경자(庚子) 1540(一五四○)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공조좌랑(工曹左郞)이 되었다.
참봉인 이문량(李文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그녀가 곧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녀이다.
둘째 아들은 수량(秀良)인데 바야흐로 유학을 공부하고 있다.
수량은 충의위(忠義衛) 정사주(鄭師周)의 딸이며 즉 동평군(東平君) 종(種)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다. 또 아들이 있으나 어리다. 밑으로 딸 둘이 있는데 모두 나이가 어려서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
이에 명(銘)을 짓노니
生稱善人 살아서는 선인(善人)이라고 일컬어졌고,
卒表處士之墓 죽어서는 처사(處士)의 무덤이라고 표기 되었도다.
種德旣深 덕을 심기를 이미 깊게 했거늘,
竟未豐於食祿 마침내 녹(祿)을 먹음은 풍족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吾誰尤乎 내가 누구를 허물하랴
彼茫茫之蒼昊 저 아득하고 아득한 푸른 하늘이로다(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무릉(武陵) 주세붕(周世鵬)은 찬(撰)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봉화현감(奉化懸監) 밀양 박필(密陽朴苾)이 쓰다.
명나라 때인 가정무신(嘉靖戊申)(1548(一五四八)년 11(十一)월 임신일(壬申日)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