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암공 중신 행장(魯庵公中信行狀)

노암공 중신 행장(魯庵公中信行狀)
 공(公)의 휘(諱)는 중신(中信)이고 자(字)는 자정(子貞)이며 호(號)는 노암(魯庵)이다.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께서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6년(六年)(기원전 52(五二))에 동국(東國) 월송(越松)에 제일 먼저 오시어 살게 되었다. 그후 고려(高麗) 때에 벼슬이 태자검교 금오장군(太子檢校金吾將軍) 휘(諱) 온인(溫仁)으로부터 1세(一世)로 하여 평해황씨(平海黃氏)라 했다.
 3세(三世) 휘(諱) 유중(裕中)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그 아들 서(瑞)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인데 시호(諡號)가 문절공(文節公)이었으며 그 아들 종량(宗亮)은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그 아들 세영(世英)은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이고 그 아들 용기(龍起)는 예빈(禮賓) 정(正)이며 그 아들 길보(吉甫)는 병사(兵使)였다. 그 아들 득재(得載)는 현감(縣監)이며 그 아들 옥숭(玉崇)은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그 아들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며 공(公)의 고조부(高祖父)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우(瑀)이며 성주목사(星州牧使)였다. 조(祖)의 휘(諱)는 응청(應淸)이니 임자년(壬子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고 효행(孝行)이 특이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져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세상(世上)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 부른다. 아버지의 휘(諱)는 거일(居一)인대 호(號)는 명계(明溪)이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에 증직(贈職)된 영덕정씨(盈德鄭氏)로서 성균사성(成均司成)을 지낸 자성(自成)의 증손녀(曾孫女)이며 징(澄)의 따님으로서 여사(女史)의 행의(行義)가 있었다. 선조(宣祖) 19년(十九年) 병술(丙戌)(1586(一五八六))에 공(公)이 탄생(誕生)하면서 비범(非凡)하면서 명특하였으며 학문(學文)을 좋아함에 장여헌(張旅軒) 정한강(鄭寒崗) 손묘당(孫墓堂) 문하(門下)에서 부지런히 배워 13~4(十三、四) 나이에 삼경(三經)을 통달(通達)하고 17~8(十七、八) 나이에는 심경근사록(心經近思錄)을 연구(硏究)하여 여러권 창간(創刊)하여 세상(世上)에 전(傳)하고 재 선생과 같이 나라를 근심할 정도로 학문(學文)이 경지(境地)에 이르렀다. 학당(學堂)을 세워 동방이학(東方理學)을 배워 알았기에 원근(遠近) 선배들이 추앙(推仰)하였다. 광해(光海) 11년(十一年) 무오(戊午)(1619(一六一九))에 성균생원(成均生員) 진사과(進士科)에 합격(合格)하니 유림(儒林)의 선비들이 모두 흠모(欽慕)하였다. 당시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영양사림(永陽士林) 수십여명(數十餘名)이 공(公)을 찾아와 영양(永陽)의 도유사(都有司)를 맡아달라하는 간청(懇請)에 사양(辭讓)치 못하여 관제(館齊)에 나아가 직무수행(職務隨行)할 때 사림(士林)의 논쟁(論爭)이 많았지만 공(公)의 투철(透徹)한 집념(集念)과 성품(性品)으로 좌절(挫折)치 않고 공사(工事)의 강행(强行)을 목표(目標)에 두고 인조(仁祖) 3년 을축(乙丑) (1625(一六二五))에 명륜당(明倫堂) 창건(創建)을 시발(始發)하여 만고(萬苦) 끝에 인조(仁祖) 6년(六年) 무진(戊辰)(1628(一六二八)) 8월 초1일(八月初一日)에 역사(歷事)를 마치고 주자(朱子)가 쓴 글자를 사본하여 현판(懸板)을 올릴 때 후면(後面)에 숭정 원년 팔월 초일일(崇禎元年八月初一日) 도유사 황중신(都有事黃中信)이 조작(造作)하였다는 각자(刻字)가 후학(後學)에 전하여 왔다.
 공(公)은 정포은(鄭甫隱) 선생(先生)의 서원원장(書院院長)으로 있을 시 의전(儀典)을 펴 후학(後學)들에게 전하니 의전선구자(儀典先驅者)라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그 후 인조(仁祖) 14년(十四年)(1636(一六三六))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아들 연(𨬔) 혜(鏸) 정(鋌)을 데리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큰 공(功)을 세운 업적(業跡)이 영양사난록(永陽四亂錄)과 창의록(倡義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공(功)은 인조(仁祖) 16년(十六年) 무인(戊寅)(1638(一六三八))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53세(五十三世)였으며 묘(墓)는 영천(永川) 단호동(丹湖洞) 노가곡(魯柯谷) 중봉(中峯) 자좌(子坐)에 배위(配位)와 합폄(合窆)이다.
 배(配) 의인(宜仁)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동봉(東峯) 극립(克立)의 따님으로서 의방(義方)의 교훈(敎訓)과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덕행(德行)이 돈독(敦篤)하여 원근(遠近) 고을에서 칭송(稱訟)이 자자했다. 공(功)의 빛난 문헌(文獻)은 난시(亂時)에 소실(消失)되었으나 동봉공(東峯公) 장여헌공(張旅軒公)의 문집(文集)에 기록(記錄)되어 있으며 영양(永陽) 구읍지(舊邑誌)에도 기록(記錄)되어 있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있던 초휘(初諱) 흠(欽) 개명(改名) 연(𨬔)은 공(公)의 병자호란(丙子胡亂) 시(時)의 공훈(功勳)으로 숙종(肅宗) 6년(六年) 경신(庚申)(1680(一六八〇))에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며 배위(配位)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공(公)의 손자(孫子) 계하(啓河) 개명(改名) 영하(永河)는 숙종(肅宗) 15년(十五年) 기사(己巳)(1689)(一六八九)) 과시(科試)에 합격(合格)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공(公)의 증손(曾孫) 일(鎰) 개명(改名) 수길(壽吉)은 영조(英祖) 7년(七年) 신해(辛亥)(1731(一七三一))에 급제(及第)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으며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오! 공(公)의 효(孝)와 학문(學文)은 하늘에 이르렀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선비의 성품(性品)과 고귀(高貴)한 업적(業跡)을 볼 때 아쉬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음을 누대앙모(累代仰慕)코져 후손(後孫) 화석(和錫) 무석(武錫) 씨(氏)가 교지(敎旨)와 호적(戶籍)을 갖고 와 공(公)의 행장(行狀)을 수차 간청(懇請)하기에 공(公)의 행장(行狀)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사양(辭讓)하였지만 공(公)의 행적(行跡)은 하늘에 닿는 것과 같아 향내(鄕內)살면서 간혹 죽람정(竹覽亭)에 올라 공(公)의 옛날 자취를 엄상(儼想)함에 화풍(和風)은 순응(順應)하고 일기(日氣)는 청명(淸明)하며 산천(山川)은 고금(古今)과 다를 바 없이 유유(流流)하옵고 일월(日月)은 빛을 더하는 듯 하와 곳곳에 흩어있는 문헌(文獻)을 종합(綜合)하여 우(右)와 갖추니 후일 재 채택키를 바라노라.
  문소(文韶) 김헌주(金獻周)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