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通德郞) 희구재(喜懼齋) 황공(黃公) 행략(行略)
공(公)의 휘(諱)는 침(琛)이요 자(字)는 군옥(君玉)이라 성(姓)은 황씨(黃氏)니 황씨(黃氏)가 기성(箕城)에서 제일(第一)가는 성(姓)이라.
고려(高麗) 시중(侍中) 시(諡)는 문절공(文節公)이요 휘(諱)는 서(瑞)니 그 원조(遠祖)라. 중세(中世)에 휘(諱)는 여일(汝一)이요 호(號)는
해월(海月)이 있었으니 선조(宣祖) 때 활을 쏴서 과거(科擧)하였고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으로서 이름을 나타냈으니
당세(當世)에 전란(戰亂)으로 인(因)하여 조정(朝庭)에 글을 올려 벼슬이 백사(白沙)와 월사(月沙)에 따랐고
상부개변(上副价卞) 정(丁) 주사(主事) 응태(應泰)1)의 무(誣)와 떠돌아 다니는 벼슬로서 산주군(散州郡) 솔(卛)에 빠져 공조참의(工曹參議)를 하였으니 후(後)에 거룩한 공(功)으로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하셨고 사림(士林)들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중부(仲父) 대해(大海) 선생(先生)과 같이 병향(並享)하시니 공(公)의 6대조(六代祖)라. 5대조(五代祖)에 휘(諱)는 중헌(中憲)이니
선교랑(宣敎卽)이라, 고조(高祖)의 휘(諱)는 석평(石平)이니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숙(塾)이니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이라. 효행(孝行)이 출천(出天)하였고 학식(學識)이 뛰어나서
띠집을 오봉산(五峯山) 아래 짓고 개미와 돌을 사랑하며 호(號)를 귀대(龜臺)라 하니 당시에 교유(交遊)하는
안참판(安參判)과 황해헌(黃懈軒) 모든 분(分)들이 그 실행(實行)을 기록(記錄) 포상(褒賞)하고、아름다움을 칭찬(稱贊)하더라.
조(祖)의 휘(諱)는 세원(世元)이니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이시고, 고(考)의
휘(諱)는 수하(受夏)니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만제(萬濟)의
여(女)라 무후(無后)하고, 계비(繼妣)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징삼(徵三)의 여(女)라. 공(公)은 영묘(英廟) 정묘(丁卯) 8월(八月) 2일(二日) 사동(沙銅)에서 출생(出生)하셨다.
유시(幼時)부터 모든 행동(行動)이 남에게 뛰어나서 무릇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恭敬)하며 벗을 친(親)하는 방법(方法)이 가르치지 아니해도 그 규모(規模)가
달랐고 또 배움을 좋아하고 근면(勤勉)함을 기탕(飢湯)과 같이하여 나이 20(二十) 미만(未滿)에 재능(才能)이
영특(穎特)해서 그 민첩(敏捷)한 행동(行動)이 소관(所關)이 자자(籍籍)하여 향인(鄕人)들이 그 원대(遠大)한 포부(抱負)를 말하지 않은 자(者) 없었으며 치하(致賀)하지 않은 자(者) 없더라. 김판서(金判書) 이빈(履彬)이 여러 번 그 근면(勤勉)함을
칭찬(稱贊)하더라. 계묘(癸卯)년 봄에 양구(楊口)의 향성(鄕誠)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인(先人)의 부음(訃音)을 받고
밤에 달려와 피눈물로 슬피 우매 지극(至極)한 정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결한 날이 없었고
3년(三年)이 지난 후(後)에도 외세(外勢)가 비록 변(變)해도 어버이를 사모(思慕)한 것이 조금도 변(變)함이
없이 뜻을 밖에 두어도 자식(子息) 사랑 하는데 두지 않고 오로지 편모(偏母)에게 지성(至誠)을 다하여
한가한 날이 없더라. 가세(家勢)가 점점(漸漸) 빈한(貧寒)해지자 먹고 살 일을 근심하여 누에를 치고
갈고 심으며 양돈(養豚)과 양계(養鷄)를 하여 몸에 편의(便宜)하도록 옷을 해 입고 입에 맞추어 음식(飮食)을
하여 건강(健康)을 보존(保存)하고 노인(老人)들의 배 고프고 추운 것을 감안하여 반찬을 진공(進供)하며
추울 때에는 반드시 손수 나무를 하여 자제(子弟)나 노비(奴婢)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고 그
음식(飮食)과 육(肉)과 생선(生鮮)을 다루는 방법(方法)이 또한 직접(直接) 자기(自己)의 손으로 하고 그 뜨시고、찬
절차(節次)와 그 더러운 것을 무려 60년(六十年)을 하루같이 하여, 매양(每樣) 휘(諱)2) 전(前)날 밤에는 슬퍼하고
공경(恭敬)하기를 생존(生存)해 계실 때와 같이하며 선부인(先夫人) 묘소(墓所)가 10리(十里)밖에 있어도 매일(每日) 반드시
주과(酒果)를 갖추어 묘소(墓所)를 정결히 쓸고 항상 춥고 덥고 한 것을 늘 염려하여 정성을
다 하며, 나이 많을수록 소거(所居)한 재(齋)를 갈 때 희구(喜懼)라 하니 대개 눈에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종신(終身)토록 추모(追慕)하는 뜻이 지극(至極)함이라 평시(平時) 옆에서 모실 때 평안(平安)하게
해드리고 화순(和順)한 얼굴을 하여 백세하(百世下)에 다시 노자(老子)께서 70(七十)에 희채(戲彩)의 상(像)을
보게 하였다. 슬프고 슬프다. 처음에 증왕고(曾王考)께서 증(贈) 승지(丞旨)하시고 귀대공(龜臺公)이 동년(童年)에
철천지효(徹天之孝)로서 여러 번 향천(鄕薦)을 올렸으나 한번도 도계(棹禊)외 전(典)을 입지 못하여 향인(鄕人)들이
슬퍼하고 아쉬워 한지 우금(于今) 백년(百年)이라. 뒤에 탁월(卓越)한 기위(奇偉)의 행(行)이 현증손(玄曾孫)에게 울리니
그 적루(積累)한 점이 멀리 와 비춘 것이다. 이것이 어찌 우연(偶然)한 일일 것인가. 권학사(權學士) 준(晙)이
사림(士林) 중망(重望)이 본군(本郡)에 재(宰)하실 때에 여러번 그 집을 고치고 깊이 근귀(勤貴)을 가(加)하여 그 재(齋)를
기(記)하고 아름답게 권장(勸奬)하고 약(略)해 가로대 모(某)를 보고 효자(孝子)라 아니할 자(者) 있으랴, 또
군(郡) 중(中)의 인사(人士)들이 장(狀)이 이어갈 때 모효(某孝)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로 군옥(君玉) 대인(大人)을
위한 것이다. 당소(倘所)에 운(云)하되 영지(靈芝)는 근본(根本)이 있고 예천(醴泉)은 근원(根源)이 있다는 것은 믿어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은 깊이 심복(心服)한 말이다. 해가 무진(戊辰)에 선부군(先府君)의 춘추(春秋)가 이미
만90(滿九十)이나 군(君)이 7년(七年) 전(前)부터 조석(朝夕)으로 시봉(侍奉)하여 잠깐도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노병(老病)이 점점 더하여 멀리 떠나려 했으나 선부군(先府君)의 노병(老病)이 많이 위독(危篤)하지 아니함으로
마음에 항상(恒常) 개한(慨恨)하고 있다가 모(暮) 춘월(春月)에 병(病)이 조금 낳은 기색(氣色)이 있기로 서울에
갔다가 수일(數日) 후(後)에 배알(拜竭)하니 서전(西銓) 김공(金公) 이익(履翼)의 말이 선부군(先府君)은 수직사(壽職事)라 김공(金公)이 공(公)을 보고
단아(端雅)하고 사정(辭情)하여 정신(精神)이 산연(傘然)하더니 즉석(即夕)에 머리가 옆으로 삐끗하더니 조반(朝飯)을
점(點)한 후(後)에 또 수일(數日)만에 3세(三世)를 추영(追榮)하시고 마침내 허덕이고 흐느낌으로서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슬프다 이 어찌 하늘이 준 순귀(順歸)가 아닐까보다. 복제(服制)를 하던 날에 동남(東南)
인사(人士)들이 다 크게 소리 지르며 기이(奇異)해 말하기를 아름답다 귀신(鬼神)에 그 정성(精誠)을 보이라
하더니 공(公)이 손수 은교(恩敎)를 받으러 돌아가신 것을 제종(諸宗)들과 더불어 평안(平安)히 계시는
곳을 마련하고 달이 넘지 않게하여 좋은 날을 택(擇)하여 이성(利成)을 하였으니 무슨 낙(樂)이
이 생(生)과 비(悲)와 길(吉)이 이에 더 할 수 있으랴. 석인(碩人)이 5월(五月) 22일(二十二日)에 안장(安葬)하고 공(公)이
명계서원(明溪書院) 움막집에서 침식(寢食)을 같이하시다가 윤5월(閏五月) 12일(十二日)에 마침내 돌아가시니
겨우 나이 62(六十二)라. 이날 저녁에 마주 들어 본댁(本宅)으로 운시(運尸)하여 염빈(殮殯)을 마치고 또
선부군(先府君)께서 음식(食飮)을 전폐(全閉)하고 침연(沈然)히 병(病)을 얻어 이달 25일(二十五日)에 계부(繼父)를 이어
돌아가시니 슬프고 슬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이것이 무슨 정계(情界)야 세상이 영광(榮光)이
없고 또 화(禍)가 끝이 없이 참착(慘錯)한 일이 1(一)개월 내(內)에 자부효자(慈婦孝子)의 혼(魂)이 슬픔을 머금고
원병(冤病)함을 구천(九泉)앞에 끝나니 이 어찌 창창(蒼蒼)히 귀신(鬼神)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나.
슬프고 아프다. 이날 9월(九月) 즉(即) 7월(七月) 경오(庚午)에 선부군(先府君)을 군북(郡北) 30리(三十里) 이전동(梨田洞) 부해(負亥)의 원(原)에
양례(襄禮)를 지내고 20일(二十日) 계미(癸未)에 공(公)을 같은 동간일록(洞間一麓) 사이 사(巳)의 원(原)에 합폄(合窆)을 하니
거리(距里)가 선부군(先府君) 유택(幽宅)과 겨우 수백보(數百步) 서로 망견(望見)한 땅이다. 천당(泉堂)에서 시봉(侍奉)한 낙(樂)이 사람이 사는 세상(世上)과 같음이 없는 즉 공(公)은 장차(將次) 효도(孝道)를 땅에 입지(入地)한 날까지 유명간(幽明間)에
가(可)히 위로(慰勞)한 자(者)이라. 공(公)의 전배(前配)는 행주전씨(幸州田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홍옥(弘玉)의 여(女)니 선공(先公) 27년(二十七年)에 돌아가셔서 은장(恩墻)에 ○향(向)의 원(原)에 장(葬)하고, 후배(後配) 울진장씨(蔚珍張氏)니 사인(士人) 휘(諱)는 동옥(東玉)의 여(女)니
선공(先公) 1월(一月)에 몰(歿)하여 공(公)과 더불어 동혈내(同穴內)에 같이 합장(合葬)을 하여 정량(貞亮)의 자태(姿態)가 서로
순비(純備)하고 곤의(𠆊儀)가 무감(無憾)하나 불행(不幸)히 무자(無子)하여 본생(本生) 재종형(再從兄) 상(瑺)의 제2자(第二子) 치홍(致弘)으로 사(嗣)하고 여(女)로 사인(士人) 이귀소(李龜熽) 사인(士人) 장천익(張天翼)의 처(妻)로 전씨(田氏)의 소생이다. 사인(士人) 이상기(李相箕) 처(妻)로 장씨(張氏)의 소생이다. 치홍(致弘)은 무안(務安) 박진표(朴鎭標)의 여(女)에게 장가가서 1남(一男)인데 아직 어리고 이귀소(李龜熽)는
무육(無育)하고 장천익(張天翼)은 3남(三男)이 있으나 다 어리다.
슬프다 공(公)의 전(傳)하고 받는 일이 다 연원(淵源)이 있다. 어려서는 복재(復齋) 이공(李公) 춘룡(春龍)의 가르침을 받았고 성장(成長)해서는 백부(伯父) 천서옹(川西翁) 사하(師夏)공(公)의 도움을 받아 필경(畢境)에 이와 같이
뜻을 양계(襄季)에 수립(樹立)하였으니 부자(夫子)가 이른바 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없다는 것이 곧 이것이며
이를 취(取)한 자(者) 정(政)이라 하셨으니 이는 공(公)을 두고 말한 것이다. 풍체(風体)가 수위(秀偉)하고
기력(氣力)이 건장(健壯)하며 또 성행(性行)이 고결(高潔)하여 향당(鄕黨)에서 논의(論議)하실 적에 남에게 질타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선(善)을 들으면 모(慕)에 추허(推許)한 것 같아서 도리어 오직 두려워하고 남의
악(惡)을 본 즉, 도리어 부끄러워하여 엄연(嚴然)히 이를 멀리 물리치고 조금도 이를 가차(假借)하지
아니함으로 향인(鄕人)이 선자(善者)를 모(慕)하고 선(善)치 않은 자(者)를 기(忌)하여, 그 지기(知己)의 근엄(勤嚴)을
제제(制除)하니 공(公)이 평소(平素)에 어지고, 어지지 않은 것을 탄복(嘆服)한 고(故)로 능(能)히 탁세(濁世)에 처(處)해도
원(怨)과 화(禍)가 몸에 미치지 못한 것은 가(可)히 숭상(崇尙)할 바다. 이제 더구나 혼탁(渾濁)한 시대(時代)에
특(特)히 독행(獨行)한 선비가 우리 국가(國家)의 사람들을 취(取)하고 모든 과목(科目)과 모든 법전(法典)을 수일(蒐逸)한
것이 멀리 보지 못함으로 선비들의 포부와 지행(志行)과 명예(名譽)가 매몰(埋沒)해서 무칭자(無稱者)가 손을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에 가(可)히 탄식(嘆息)할 일이라 옛날에 천서공(川西公)의 효우(孝友)와 교행(交行)에 염근(廉謹)하고 순아(醇雅)한 것이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으로서 졸연(卒然)히 이에 황괵(黃䤋)의 명(命)을 봉호(蓬蒿)아래이다
하였으니 공(公)의 출천지효성(出天之孝誠)과 고세(高世)의 행(行)과 회보(懷寶)와 은덕(隱德)을 매몰(埋沒)에 나타내지 아니하여
초목(草木)을 더불어 같이 썩으니 가(可)히 아프고 가(可)히 아프다.
이제 치홍(致弘)의 소매에 감춘
가장(家狀) 1통(一通)이 나에게 실기문자(實記文字)를 부탁(付託)함으로 나의 역량(力量)으로서는 감(敢)히 얻지 못하고
원장(原狀)을 생각(生覺)하여 중략(中略) 그대로 적고 다음 세(世)에 지행(志行)을 위와 같이 당세(當世) 병필지사(秉筆之士)가
겸비(兼備)할 것을 찬(撰)하고 물러가노라.
상지(上之) 8년(八年) 무진(戊辰) 9월(九月) 일(日) 척기(戚記)3) 윤동헌(尹東憲) 근장(謹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