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사간(司諫) 벼슬에 행직(行職)된
죽람(竹覽) 황공(黃公)의 묘표(墓表)
영천군(永川郡)의 북쪽 노가곡(魯柯谷)에 오향(午向)의 봉분(封墳)이 있는
것은 고인(故人)이 된 사간(司諫) 벼슬을 하고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된
평해황공(平海黃公)의 묘(墓)이며 정부인(貞夫人)인 전주최씨(全州崔氏)와
합봉(合封)한 둔덕이다.
옛날에 작은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비바람에 깎이고 이끼의 흔적과 새의
발자국으로 거의 비석의 면목(面目)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는 후손(後孫)인
이구(履龜)와 상섭(相燮)과 이철(履喆)씨가 그것을 두려워 하여 장차 개갈(改碣)할
계획으로 그 묘도(墓道)에 맑게 표시할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하는지라 내가
향중(鄕中)의 이웃 마을에 사는 정의(情誼)로서 어떻게 글이 안된다고
사양하겠는가. 삼가 상고(詳考)해 보니 공(公)의 휘(諱)는 흠(欽)이었는데 연(𨬔)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민중(敏中)이요 죽람(竹覽)이 그의 호(號)이다.
선조(宣祖) 36(三十六)년 계묘(癸卯)(1603(一六〇三))에 출생하여 인조(仁祖) 14(十四)년
병자(丙子)(1636(一六三六))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순능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인조(仁祖) 18(十八)년 경진(庚辰)(1640(一六四○))에 별시(別試)의
문과(文科)에 발탁(拔濯)되어 성균관(成均館)을 비록하여 사간(司諫)을 역임(歷任)하였으나
그 시대의 사세(事勢)가 많이 어렵게 됨을 보고 벼슬에 나아감을 즐기지
않고 죽곡(竹谷)에 물러나 살면서 문득 늙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살 계획이었는데
숙종(肅宗) 1(一)년 을묘(乙卯)(1675(一六七五))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73(七十三)세의 수(壽)를 누렸는데 숙종(肅宗) 경신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니 대체로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공(公)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의 이력(履歷)은 국사(國史)를 상고해 보면 학식(學識)이
특별히 뛰어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성었다는 '學識超倫誠孝出天(학식초륜효성출천)'
여덟 글자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으니 비록 그 병란(兵亂)을
겪은 나머지 문헌(文獻)이 없어져서 증거로 내세우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으로도
공(公)의 평생 이력의 대략은 볼 수 있다.
대체로 평해황씨(平海黃氏)는 동방(東方)에 드러난 성씨(姓氏)이니 모두
학사공(學士公)인 휘(諱) 낙(洛)이 시조가 되며 고려 때에 벼슬이 금오장군(金吾
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 온인(溫仁)의 후예이다.
중세(中世)의 조상(祖上)으로는 휘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이며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져서 평해현(平海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9대(九代)를 내려서 휘 우(瑀)는 성주목사(星州牧使)였으며 휘 응청(應淸)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학행(學行)이 순수(純粹)하고
독실하여 세상에서 대해선생(大海先生)이라고 칭하며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휘(諱)는 거일(居一)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학문(學問)과 행
의(行義)가 있어서 종형(從兄)인 해월선생(海月先生)이
삼주제(三珠弟)주11)라고 칭찬했으니
이 세 어른이 공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와 조부(祖父)가 되신다.
아버지의 휘(諱)는 중신(中信)이니 생원(生員)으로서 일찍이 장여헌(張旅軒)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하여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들을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號)가 양계(暘溪)인 정공(鄭公)
호인(好仁)의 진지(陣地)에 들어가 사난창의(四難倡義)에 참가하여 실적(實蹟)이
영천군지(永川郡誌)와 참가했던 여러 사람들의 기록에 실려있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니 참찬(參贊)에 증직(贈職)되고 호는
동봉(東峯)이며 휘는 극립(克立)의 따님이니 대체로 선공(先公)께서 처향(妻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드디어 영천(永川)사람이 되었다.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연(𨬔)은 곧 공(公)이요 다음은 혜(鏸)요 다음은 정(鋌)
이며 다음은 일(鎰)이요 다음은 진(鎭)이다.
공(公)은 후사(後嗣)가 없어서 다음 동생(鏸)의 아들 영하(永河)를
입후(入後)했는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의현령(文義縣令)을 지냈으며 영하(永河)의
아들 수길(壽吉)은 진사(進士)가 되고 음사(蔭仕)로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다. 차례로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여 묘비(墓碑)의 뒷 면(面)에 쓰다.
오천(烏川) 정치연(鄭致珽) 삼가 짓다.
주1. 삼주제(三珠弟): 당(唐)나라의 왕발(王勃)과 왕거(王勮)과 왕면(王勔) 3형제(三兄弟)의 재주가 모두 특출(特出)했다는 데서 온 말
주2. 음사(蔭仕): 부(父), 조(祖)의 공덕(功德)으로 얻은 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