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황공(棲巖黃公)의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장운(章運)이요 자(字)는 성중(成中)이며 호는
서암(棲巖)이요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상세(上世)의 조상(祖上)은 한(漢)나라 때에
벼슬이 학사(學士)였던 휘(諱) 낙(洛)이 바다를 건너 월송리(越松里)에 도착해
살았기 때문에 평해(平海)를 관향(貫鄕)으로 받은 시조(始祖)가 되었다.
고려 때에 있었던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니 이 어른이 분파조(分派祖)이다.
이씨조선(李氏朝鮮)에 들어와서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요
3대(三代)를 전해 내려 휘(諱) 연(璉)은 벼슬이 훈도(訓導)이고 아들 휘(諱)
응벽(應辟)을 낳으니 호(號)는 벽계(碧溪)이라.
고조(高祖)의 휘(諱)는 세청(世淸)이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경(璟)이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치후(致厚)이고 아버지의 휘(諱)는 치구(治九)이니 모두
덕행(德行)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춘천박씨(春川朴氏)이니 ○의 따님이며 생부(生父)의 휘(諱)는
원구(元九)요 생모(生母)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니 가행(街行)의 따님으로서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公)이 철종(哲宗) 3(三)년(1852(一八五二)) 임자(壬子)에 출생하시니 어릴 때부터
재능과 도량(度量)이 특출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이윽고 자라서 배움에 나아가서는
가르치고 보살피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아도 보고 이해(理解)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일찍이 세상의 학자(學者)들이 다만 글을 잘한다는 명성(名聲)을 숭상하고
실행(實行)하는 학문이 없는 것을 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드디어 자기의
학문세계를 넓히는 학문(學問)을 하여 스스로 터득하는 취미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으며 먼저 효도(孝道)하고 공경함으로써 가정을 다스려서 어버이를 섬김에는
뜻과 몸을 봉양함에 극진하여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퍼하는 마음을 다하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며 종친(宗親)들을 화목하게 이끌면서
신의(信義)로서 사람을 사귀었기 때문에 날마다 볼 수 있는 행위에 한 가지 일도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세업(世業)이 보잘 것 없게 됨을 한(恨)스럽게 여겨 중년(中年)에
단구(丹邱)의 미곡(美谷)에 이르러 전원(田園)을 다스려 나감에 성실하고
근검(勤儉)한 것을 일상생활(日常生活)의 신조(信條)로 삼아 전원(田園)을 넓혀 나감에
있어서 재산을 늘리는 데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생각하여 헤아림이 여유(餘裕)가
있어서 문호(門戶)를 열어 통하게 하니 원근(遠近)에 사는 선비와 벗들이 모두
그를 추대(推戴)하여 더불어 교분(交分)을 맺으려 했으며 마음으로 사귀고자
방문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정(情)을 다해 너그럽고 흡족하게 대접했다.
향중(鄕中)에서 마침 원님놀이가 있었는데 공에게 그 원님 가장행렬(假裝行列)의
원님이 되게하니 공이 상하(上下)의 아전들을 정렬(整列)하고 옥사(獄事)와
소송(訴訟)을 처결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의 명석(明晳)한 처리에 탄복하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만약 참 고을 원님이면 반드시 명관(明官)이 되었으리라 했으니
본시 타고난 경륜(經綸)의 재주가 모두 이와 같았다.
산촌(山村)에 살면서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비록 유감(遺憾)이 되지만 그러나
행의(行義)로서 자신을 수양(修養)하고 가정에는 교화(敎化)를 이루어
자질(子姪)들을 배우도록 권하여 명사(名士)들을 배출(輩出)하고 남혼여가(男婚女嫁)를
실기(失期)하지 않아 내외(內外)의 후손이 번성해 뜰에 가득하고 80(八十)수(壽)를
넘겨 청복(淸福)을 고루 누렸으며 만년(晩年)에 고향에 돌아가서 종친들과 집을
나란히 살면서 돈목(敦睦)의 풍(風)을 흡족히 보였으니 말세(末世)에 살면서
덕(德)을 온전히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병인년(서기 1926(一九二六_) 3(三)월 24(二十四)일에 졸(卒)하니 묘는 말방(末方)
갑좌(甲坐)이며 배위(配位)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니 홍인(弘仁)의 따님이며 묘는
영해(寧海)의 봉정(鳳頂) 진좌(辰坐)에 있다. 또 배위(配位)인 안성이씨(安城李氏)는
인수(仁秀)의 따님이며 묘는 미곡(美谷)의 신평(新坪) 자좌(子坐)이고
또 배위(配位)인 무안박씨(務安朴氏)는 찬(燦)의 따님이니 창주(滄州)의 후예로서
부덕(婦德)을 잘 갖추고 있었으며 묘는 말방(末方)의 자좌(子坐)에 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맏이는 상룡(相龍)이요 다음은 상린(相麟)이며 다음은
상봉(相鳳)이요 딸은 이현하(李鉉河)와 이능만(李能萬)과 정우영(鄭佑永)과
이병인(李秉仁)에게 출가(出嫁)했다.
상룡(相龍)의 아들은 맏이는 요(曜)이고 다음은 성(晟)인데 출계(出系)했고
다음은 승(昇)이며 딸은 이익래(李翊來)에게 출가했다.
상린(相麟)의 아들은 성(晟)이요 상봉(相鳳)의 아들은 보(普)요 둘째는
영(映)이며 이현하(李鉉河)의 아들은 의호(義浩)요
요(曜)의 아들에 맏이는 영곤(英坤)이요 다음은 신곤(愼坤)과 량곤(亮坤)과
일곤(逸坤)이며 승(昇)의 아들은
배곤(培坤)이요 성(晟의 아들은 오곤(五坤)과 문곤(文坤)과 용곤(龍坤)이며
보(普)의 아들은 정곤(靖坤)과 익곤(謚坤)이요 영(映)의 아들은 완곤(完坤)이며
남은 후손이 많으나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어느날 황군(黃君) 성(晟)이 서암공(棲巖公)의 유사(遺事)를 나에게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조부(祖父)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60(六十)년이 넘어서 무덤 가에 서
있는 나무가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지만 아직도 행적(行蹟)을 새긴 비(碑)를
세우지 못하여 당일의 사행(事行)이 없어져서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우니
원하옵건대 당신께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주십시요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대의 선조(先祖) 덕행(德行)을 밝힘에 있어서 나와 같이 늙고 옹졸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고 고집스레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아서 행적의
전말(顚末)을 간략히 기록하고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海山毓精에 바다와 산의 정기를 받아
篤生遺逸이라 독실한 유일(遺逸)의 선비를 나게 하였다.
文節名裔오 문절공(文節公)의 이름난 후예이고
兩海薰烈이라 대해(大海) 해월(海月) 두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也播淸芬에 대대(代代)로 맑고 향기로운 덕행(德行)을 뿌렸으니
公襲其閥이라 공(公)이 그 세습(世襲)을 받은 문벌(門閥)이다.
三省之本이요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반성하라는 가르침을 근본으로 했고
五敎之目이라 오륜(五倫)의 덕목을 지켜나갔다.
是服是踏이니 이렇게 복종하고 이렇게 실천(實踐)하며
詔後涵沐이라 후생들에게 적셔지도록 가르치었다.
積厚而發에 덕(德)을 두텁게 쌓아
餘蔭薄馥이라 후손들에게 발복되게 하니 남기신 그늘에 향기가 가득하다.
新碣矻然에 새롭게 비석(碑石)을 높이 세우니
末方之麓이라 말방(末方)이 있는 산록(山麓)이로다.
君子攸歲에 군자(君子)를 거기에 안장(安葬)했으니
過者必式이라 지나는 사람들아 반드시 본받아라.
광주(廣州) 이복래(李福來)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