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처사(雲樹處士) 평해황공(平海黃公) 상필(相弼)의 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상필(相弼)이요 자(字)는 몽필(夢弼)이며 호(號)는
운수(雲樹)이니 관향(貫鄕)은 평해(平海)이다.
고려(高麗) 때에 벼슬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던 휘(諱)는
온인(溫仁)이 시조(始祖)이며 2(二)대(代)를 전해 내려와 휘(諱) 유중(裕中)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徙中)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 大夫) 평리문하시중(平理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다.
휘(諱) 응정(應挺)은 호(號)가 괴정(槐亭)이니 덕(德)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아들은 휘(諱)가 도일(道一)이요 호(號)가 소곡(蘇谷)이니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선교랑(宣敎郞)이 제수(除授)되었으며 3(三)대(代)를 전해
내려와 휘(諱) 명하(命河)는 호(號)를 해헌(懈軒)이라 했으며 유행(儒行)과
덕망(德望)이 해변(海邊) 일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는데 공(公)에게는
7세(七世)의 사이가 된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로(璐)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치향(致香)이며
조부(祖父)의 휘(諱)는 순구(錞九)이고 아버지의 휘(諱)는 오운(五運)이며 어머니는
신안주씨(新案朱氏)이니 부덕(婦德)이 있어서 남편을 섬김에 어김이 없었으며
재린(載麟)이 그의 외조부(外祖父)이다.
고종(高宗) 을축년(서기 1865(一八六五))에 공이 소태리(蘇台里)의 집에서 출생하시니
기품(氣禀)이 준수(俊秀)하고 타고난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넓었으며 나이가
점점 많아지면서 지혜가 점점 열렸으며 예법(禮法)을 숭상하는 곳을 두루 다니고
인의(仁義)를 지키는 마을을 출입하면서 문절공(文節公)의 빛나는 가훈(家訓)을
높이 앙모(仰慕)하고 해헌조(懈軒祖)의 고상한 품격과 남기신 덕화(德化)를
가정을 다스리는 기본으로 하여 한결같이 화평(和平)하게 하였으며 종족(宗族)을
이끌어 나감에는 친목(親睦)이 돈독하게 했고 향중(鄕中)에 처신(處身)함에도
반드시 신의(信義)를 지켰으며 일상생활에도 법도와 절도의 사이를 넘지 않게
행동하니 향중(鄕中)에서는 그런 행검(行檢)을 공경히 복종했으며
후생(後生)들도 그 처신(處身)을 모범으로 삼았다.
편안히 73(七十三)세의 수(壽)를 누리다가 정축년(서기 1949(一九四九))에 노환(老患)으로
침방(寢房)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송릉곡(松陵谷)의 유좌(西坐)의 둔덕에 묘를
썼다.
배위(配位)는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니 붕연(鵬淵)의 따님이며 묘는 공과 같은
둔덕 곤좌(坤坐)에 있다.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으니 아들은 흔(昕)과 위(暐)와 섬(暹)이며 딸은
남영직(南永稷)에게 출가했다.
흔(昕)의 아들은 응곤(應坤)이며 사위는 김상국(金相國)과 이정탁(李正鐸)과
김해영(金海榮)이며 위(暐)의 아들은 명곤(命坤)과 중곤(重坤)이며 사위는
권원달(權元達)과 안명원(安命源)과 장기호(張基浩)와 정기정(鄭基政)이다.
섬(暹)의 아들은 복곤(福坤)과 진곤(震坤)이며 사위는 김성규(金性圭)와
안재원(安在源)과 김인수(金麟秀)와 이우세(李禹世)와 백상렬(白相烈)이다.
응곤(應坤)의 아들은 진환(鎭煥)과 진기(鎭琪)와 진호(鎭浩)이며 사위는
박해식(朴海植)이고 명곤(命坤)의 아들은 진덕(鎭德)과 진업(鎭業)과 진삼(鎭三)과
진광(鎭洸)이며 사위는 권영복(權寧福)이고 중곤(重坤)의 아들은 진윤(鎭潤)과
진달(鎭達)과 진식(鎭軾)이며 사위는 이종욱(李鐘旭)이요 복곤(福坤)의 아들은
진탁(鎭鐸)과 진범(鎭範)과 진섭(鎭燮)과 진산(鎭山)이며 진곤(震坤)의 아들은
현석(鉉奭)이요 진환(鎭煥)의 아들은 세윤(世潤)과 찬연(燦淵)과 명윤(命潤)이며
진기(鎭琪)의 아들은 병윤(炳潤)이요 진호(鎭浩)의 아들은 준연(俊淵)과
성연(聖淵)과 상연(相淵)이요 진덕(鎭德)의 아들은 성수(性洙)와 성윤(性潤)이며
남은 사람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명(銘)을 말하노니
祖宗厚蔭 조종(祖宗)이 남기신 두터운 음덕(蔭德)을
有開紹承 계승(繼承)하는 극진한 뜻이 있었다.
風采軒昻 의기(意氣)가 양양한 풍채였으며
德性況重 침착하고 무증한 덕성(德性)이었다.
謹飭自持 몸가짐은 항상 삼가고 공경하며
無怨無仵 남을 원망도 아니하고 거슬림도 없었다.
逾稀 고희(古稀)를 넘은 높은 연세에
陞靈穩保 수(壽)를 하는 건강을 온전히 보전했다.
菀茲松陵 무성한 이 송릉(松陵)의 언덕 위에는
冠屢攸藏 공(公)의 몸을 감춘 무덤이 있다.
劇辭揭阡 갈명(喝銘)의 말을 새겨 무덤에 세워
用諗千霜 천추(千秋)의 후세까지 고(告)하노라.
광복(光復)한 뒤 무오년 월 일 안동(安東) 권병철(權炳哲)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