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에 있었던 징사(徵士) 대해(大海) 황선생(黃先生)의 신도비명(神道碑) 서문과 함께
대해선생(大海先生) 황공(黃公)이 돌아가신 것은 선조(宣祖)
38(三十八)(서기 1605(一六○五)) 을사였다. 기성(箕城)의 호전(虎田)에 있는 임좌(壬坐)의 둔덕에 장사를
지냈으며 학사(鶴沙) 김선생(金先生)이 그 행장(行狀)을 짓고 대산(大山)
이선생(李先生)이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선생이 벼슬 길에서 청렴(淸廉)하게
물러난 일과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은 족히 천추에 없어지지 않고
전해질 것이리니 어찌 남겨진 말을 거듭 말하겠는가.
주사손(主嗣孫)인 재우(載宇)형이 곧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못한 일 때문에
여러 종중(宗中) 사람들과 합의(合議)하여 비석(碑石)을 다듬게 하고 그의 족인(族人)인
세명(世明)과 종제(從弟)인 윤곤(允坤)군으로 하여금 행적(行蹟)을
적은 글을 가지고 와서 나 건덕(建德)에게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지라.
오직 나와 같은 만생(晩生)도 공(公)이 후세에 남긴 교화(敎化)와 멀리
전해오는 덕업(德業)을 들을 수 있어서 높이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식견(識見)이 얕은 내가 감히 높고 큰 묘소에 용두(龍頭)와
구질(龜跌)이 빛나는 비명(碑銘)의 글로 부응(副應)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곧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삼가 손을 씻고 서술하노니 선생(先生)의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이며 스스로 호(號)를 대해(大海)라 했다.
평해황씨(平海黃氏)로서 시조(始祖)의 휘(諱)는 낙(洛)이며 휘(諱) 온인(溫仁)은
벼슬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고 휘(諱) 우정(佑精)은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이었으며 휘(諱) 유중(裕中)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고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첨의평리(知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세자(世子)를 위하여 원(元)나라 조정에 세 번 들어갔다.
휘(諱) 종량(宗亮)은 벼슬이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휘(諱) 세명(世英)은
진사(進士)로서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벼슬을 했고 휘(諱) 용기(龍起)는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었으며 휘(諱) 길보(吉甫)는 벼슬이 병사(兵使)였고
휘(諱) 득재(得載)는 벼슬이 함풍현감(咸豊縣監)이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옥숭(玉崇)이니 벼슬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고
조부(祖父)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으며 아버지의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진주김씨(眞珠金氏)는 참봉(參奉)을 지낸 빈(賓)의 따님이다.
선생이 선조(宣祖) 17(十七)년(서기 1584(一五八四)) 갑신에 출생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지극한 생실과 특이한 재질(才質)을 타고나서 사람의 도리를 익힌 다음 학문을
배워 광해(光海) 사년(서기 1612) 임자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광해(光海)
12(十二)년(서기 1620(一六二○)) 경신에 별시과거(別試科擧)에 응시(應試)하려고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책문(策問)의 제목을 보고 좋은 말이 아니라고 하여
대책(對策)을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문을 닫고 행적을 감추었으며 더욱 학문에 힘쓰고 마음을
길러 고명(高明)한 덕행(德行)이 조정에 알려져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부름을
받아 예빈시(禮賓寺)의 봉사(奉事)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또
연은전(延ㅇ恩殿)의 참봉(參奉)이 제수되어 배명(拜命)받고 얼마 안되어 사직했다.
갑오년에 장악원(掌樂院)의 별좌(別坐) 벼슬이 제수되었는데 그 때에 상감(上監)이
의주(義州)로부터 환궁(還宮)하였다.
선생이 신하의 직분(職分)으로서 상감의 심기(心氣)가 불안하실 듯하여 예궐(詣闕)을
미루어 오다가 네가지 폐단(弊端)을 진술한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상소의 말이 대단히 적절하여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발탁(拔擢)하여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제수하니 난리에서 살아남은 백성을 어루만져주는 등 고을을
다스리는 공적(功績)이 크게 나타났으나 2(二)년도 못 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천성(天性)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정성과 공경을 다했는데
부모상(父母喪)을 당해서는 예법에 의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죽을 먹고 살았으며
묘 옆에 여막(廬幕)을 치고 호곡(號哭)하니 슬퍼하는 효성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지방장관(地方長官)이 그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旌閭)가 내리도록
청원(請願)하여 벼슬을 내려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 안정을 찾았으며 가난한 농촌생활을 싫어하지 않고
후학(後學)들의 진학(進學)을 권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 유학(儒學)에 정성을
다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정명(精明)하게 궁구(窮究)하고 경(敬)의 도리를
말마다 깊게했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단전(單傳)과 지결(旨訣)의
연구를 굳세게 하면서 관혼상제(冠婚喪祭)에도 근엄(謹嚴)하여 가문과 향중(鄕中)의
풍속순화(風俗淳化)에 앞장서 나간 것은 더욱 빛난 일이니 선생의 교화(敎化)는
자못 백세(百世)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伯)의 손녀로서 선생보다 19(十九)년 먼저 졸(卒)했다.
묘(墓)는 선생과 같은 둔덕에 있으며 아들 다섯과 딸 하나가 있는데 맏아들은
거일(居一)이니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음은 유일(有一)이니
호(號)는 호곡(虎谷)이며 성균정자(成均正字) 벼슬을 했고 김학봉(金鶴峯)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했다. 다음은 경일(慶一)이요 다음은 천일(千一)이며
다음은 억일(億一)이고 딸은 백인경(白仁鏡)에게 출가했다.
거일(居一)은 아들 셋이 있으니 중건(中健)과 중신(中信)과 중숙(中俶)이며
유일(有一)에게는 2남(二男)이 있으니 중길(中吉)과 중미(中美)이고
경일(慶一)은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하였으며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다.
천일(千一)의 두 아들은 중재(中載)와 중석(中碩)이며 억일(億一)의 세 아들은
중익(中益)과 중상(中尙)과 중실(中實)이며 딸은 박문빈(朴文彬)에게 출가했고
중건(中健)은 현(鉉)을 후사(後嗣)로 하고 두 딸은 남숙(南俶)과 박지복(朴智復)에게
출가했다.
중신(中信)의 다섯 아들은 연(𨬔)과 혜(鏸)와 정(鋌)과 일(鎰)과 진(鎭)이며
딸은 김굉좌(金宏佐)에게 출가했으며 중숙(中俶)의 한 아들은 빈(鑌)이요
중길(中吉)의 한 아들은 선(銑)이며 중미(中美)의 네 아들은 심(鉍)과 현(鉉)과
집(鏶)과 영(𨥭)이고 딸은 남황(南徨)과 남두원(南斗遠)과 남상인(南尙仁)과
금삼소(琴尙素)에게 출가했으며 중재(中載)의 네 아들은 섬(暹)과 경(景)과 담(曇)과
성(晟)이고 중석(中碩)의 아들은 호(鎬)이며 중익(中益)은 성(晟)으로
후사(後嗣)를 하였고 중상(中尙)의 한 아들은 경(暻)이요 중실(中實)은 담(曇)을
후사(後嗣)로 하였다.
선생이 학문(學文)을 넓힘에 있어서는 항상 춘추(春秋)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큰 뜻에 힘을 기울였으며 조월천(趙月川) 박대암(朴大庵) 두 선생과
더불어 서로 좋은 교우(交友)관계였고 집이 가난하고 노친(老親)이 계시는 때문에
곁을 떠나서 멀리 유학(遊學)할 수 없어서 일찍이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하(門下)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평상시의 거처(居處)와 일상생활의 행동을 제약(制約)함에는 옛사람의
법도(法度)를 따랐으며 좌우(左右)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내려다 보며 읽고 우러러
생각하는 가운데 침식(寢食)을 잊어버리며 자신(自身)을 바로잡는 일에 스스로
엄(嚴)하였으며 문장(文章)이 바르고 무게가 있는 것은 그의
동해무조석(東海無潮汐)이란 부(賦)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 있는 한 절구시(絶句詩)에 말하기를
'명아주 국과 조밥으로 쇠잔(衰殘)한 몸을 기르며 성향(城鄕)에서 새벽에 일어나
서이(序而)를 본받는다' 했고 또 의관(衣冠)을 갖추어 전모(典謨)를 읽으면서
시에서 서생(書生)이 쓰일 곳 없다. 말하지 말라 한 몸이 온통 이게
요순세계(堯舜世界)이다고 했으니 대체로 덕(德)을 길러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만족해
하는 낙(樂)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아계(鵝溪) 이(李)정승이 일찍이 귀양살이로 평해(平海)에 머물고 있을 때에
공의 덕행(德行)을 즐겨 앙모(仰慕)하여 평일에 공부를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학문(學問)에 종사하지 않고 다만 내가 마음을
다스려 온 소치(所致)로 동정(動靜)의 득실(得失)을 대강 얻었으나 그러나
비유(譬喻)하건대 닥치는 대로 흩어 없애 버려서 더욱 자신이 공허(空虛)하니
정(靜)의 힘이 동(動)을 억제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하니 아계(鵝溪)
이(李) 정승이 탄복하고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지어 자신(自身)을 경계했다고 한다.
해월(海月)과 호곡(虎谷) 두 선생은 당내(堂內)의 지친(至親) 사이로서 함께
화려한 문장이었으니 선생이 공훈과 덕행(德行)에 깊이 관계되지 않음이 없은
즉 가정교육(家庭敎育)에서 주고 받은 비결(秘訣)이 어찌 아니겠는가.
선생이 별세한 뒤에 향중(鄕中) 사람들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東海箕城 동해(東海)가에 자리한 기성(箕城) 땅에
淑氣磅礴 숙기(淑氣)가 서리어 가득하구나.
種靈毓秀 영기(靈氣)가 싹트고 빼어나게 걸리지니
哲人迺作 철인(哲人)이 여기에 나시었도다.
不自師承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得于天性 특출한 재주는 천성(天性)으로 얻었다.
善言善行 말씀이 착하고 행의(行義)가 바른 것은
莫非主靜 주정(主靜)으로 수양(修養)함이 아님이 없네.
解紱歸來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潜心經籍 마음을 가다듬어 경적(經籍)을 읽었네.
莊敬日强 엄숙하고 공경함이 날로 더하니
進修宋篤 학문(學問)의 나아감이 더욱 깊었다.
富貴嬉嬉 부(富)과 귀(貴)를 실없게 생각하여서
潤槃適軸 시골에서 벼슬 않고 숨어 살았네.
棹楔煒煌 효자로 내린 정려(旌閭) 세상에 빛나고
俎豆靜庸 서원(書院)의 제향은 정숙(靜肅)하도다.
遺風不洙 후세에 남긴 교회(敎化) 끊임이 없어
仰止彌屹 우러러 사모하니 산처럼 높이네.
惟虎之厓 오직 호전(虎田)에 있는 묘소(墓所) 언덕에
松杉蒼鬱 소나무 삼(杉) 나무 울창하구나.
樂石嵯峨 비갈(碑碣)을 높게 높게 세워 놓으니
有崒其宮 그 봉분(封墳) 드높게 우뚝하구나.
敬作銘詩 비명(碑銘)의 시(詩) 공경히 지어 새겨서
用告無窮 무궁(無窮)토록 후세 사람에 고(告)하노라.
인동후인(仁同後人) 장건덕(張建德) 삼가 짓다.
주1. 책문(策問): 과거(科擧) 시험에서 시무(時務)에 관하여 시문(詩問)하는 일
주2. 대책(對策): 책문(策問)에 대한 대답서(對答書)(과거에 응시함)
주3. 유일(遺逸): 세상을 숨어 살며 학덕(學德)이 높은 사람
주4.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호(號). 자(字)는 여수(汝受).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명종(明宗) 때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응교(應敎)를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뒤 1588(一五八八)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아계부원군(鵝溪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문장(文章)과 서화(書畫)에 뛰어났고 특히 문장(文章)에 능하여 선조(宣朝) 때의 문장팔대가(文章八大家)의 한 사람.
주5. 주정(主靜): 안상(安想)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가짐
주6. 징사(徵士):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높아 임금이 부르나 나아가 벼슬하지 않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