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단(先壇)을 증축(增築)한 기사(記事)
고인(古人)의 언행(言行)과 행적을 논(論)함에 있었서는 나라의 전적(典籍)이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보다 더 성(盛)한 나라가 없지만 우리
동국(東國)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주(周)
나라의 문풍(文風)을 따라 점점 훌륭하고 명백해졌으나 한 집안의 계보(系譜)와
나라의 사기(史記)에 있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의심스러운 것도 있고 믿을 만한
것도 있으나 그 귀결(歸結)을 궁구(窮究)해 보면 실로 공자님의 필삭(筆削)주1을
거치지 못한 소치이라.
삼가 만성씨족고(萬姓氏族考)와 청구보실록(靑邱譜實錄)을 상고해 보면
황제헌원(黃帝軒轅)주2씨(氏) 이하로 황씨(黃氏)의 관적(貫籍)이
284관(二百八十四貫)이며 중국(中國)의 강하(江夏)에서 세계(世系)가 나왔다
하고 또 일설(一說)에는 전욱고양(顓頊高陽)주3씨(氏)의 후예인 육종(陸終)이 황씨(黃氏)를 봉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씨족(氏族)이 되었다고 한다.
휘(諱) 락(洛)은 벼슬이 학사(學士)였는데 한(漢)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와
건무(建武) 때에 한(漢)나라의 상서(尙書)벼슬에 있던 구대림(丘大林)과
더불어 처음 우리나라의 월송리(越松里)에 도착했으니 그 때가 신라(新羅)
남해왕(南海王) BC4~23 때라 하니 비록 선대(先代)에서는 밝혀 내지 못한
사실이지만 후일(後日)에 더욱 상고(詳考)하여 판단해야 될 문적(文籍)이 아닐 수
없다.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니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의
문헌이 없기 때문에 징신(微信)할 수 없다는 탄식이 없지 않다는 말이 이것이다.
아! 역사의 사적(事蹟)이 명백하지 않고 묘소(墓所)도 전하지 않으니
풍천(風泉)의 절통한 마음을 더욱 참아내기 어렵다.
일찍이 여기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향화(香火)를 받들어 왔으나 또한
연대(年代)가 오래되니 담장은 무너지고 단비(壇碑)에는 이끼가 끼어서 후손들이
하여야 할 도리로 보면 송구한 마음이 막심한지라. 지금 을묘년(乙卯年)에
종중(宗中)의 의논이 동일(同一)하여 단비(壇碑)를 다시 다듬고 새겼으며
기성군(箕城君)이신 휘 갑고(甲古)와 태자검교공(大子檢校公)이신 휘(諱)
온인(溫仁)과 군기소윤공(軍器少尹公)이신 휘 우정(佑精)과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이신 휘(諱) 유중(裕中)의 위차(位次)도
단비(壇碑)를 세워 배봉(配奉)하여 차례로 봉향(奉香)하며 재사(齋舍)를 지어
설단(設壇)을 보호토록 했으니 이곳이
월송단(月松壇)이다.
옛날 유적(遺蹟)이 빛을 더하고 향기가 세로우니 산악(山嶽)의 정화(精華)가
엄연히 혼령(魂靈)이 오르내림이라 송백(松柏)이 우거져 늘어서니 멀리 세 갈래의
길이 비쳐오고 창해(滄海)의 달이 밝게 비치어 오니 숲속의 팔각(八角)의 옛터를
조명(照明)한다. 주위의 도로(道路)가 숫돌같이 평평하니 그 공기가 화살 같으며
예(禮)로서 행동의 규칙을 세우고 음악(音樂)으로 인간성정(人間性情)의
조화(調和)를 이룩하나니 영세(永世)토록 다시 한 발 나아가 자신을 수양(修養)하는
정성으로 백세(百世)토록 조선(祖先)의 은덕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전말(顚末)을 기재(記載)하는 바이다.
단기(檀紀) 4309(四三〇九)년 병진 10(十)월에
후손 윤범(潤範)은 손을 씻고 삼가 짓다.
주1. 필삭(筆削): 가필(加筆)과 삭제(削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필삭(筆削)한 사실을 말함.
주2. 황제헌원(黃帝軒轅): 중국(中國) 전설시대(傳設時代)의 제왕(帝王). 역산(曆算)과 문자(文字), 율려(律呂)와 의약(醫藥) 등을 처음으로 백성(百姓)에게 가르쳤다 함.
주3. 전욱고양(顓頊高陽): 중국(中國) 고대(古代)의 제왕(帝王). 황제(黃帝)의 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