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당 묘갈략
선군의 휘는 창(琩)이요, 자는 군옥(君玉)이며, 호는 양한당이라.
개국공신 숭록대부 증 우의정 양무공 휘 희석(希碩)이라는 분의
6세손이며, 5대조의 휘는 상(象)이신데 태종(太宗)의 부마로
병조판서요, 고조의 휘는 계조(繼祖)이니 통훈대부 음 사직이요,
조의 휘는 전(詮)이시니 보공장군 선전관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요,
선고의 휘는 세통(世通)이니 어모장군 충좌위 대호군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요,
비는 정부인 파평 윤씨니 부정 증 영의정 구(昫)의 여이며,
삼척부사 증 좌찬성 계흥(繼興)의 손녀라.
가정 정해(丁亥)(1527) 5월 16일에 서울 이현에서 출생하사
그 웅장한 모습이 범인같지 않고, 자라나며 기이한 재질이
논·맹·시·서를 통달하고, 장성하여서는 팔의 힘이 뛰어나
활을 잘 쏘고 무예가 놀라우며, 또 천성이 근후하고 효심이
지극하여 친우 간의 신의가 매우 두터웠다.
규문에 있어서는 태화한 동작을 순리와 바른 일을 행하고
개재옹목 즉 감동적이고 애정이 흐르며 화합하고 관용하여
틈 있는 말을 들을 수 없으며,
친척 간 찬양은 물론 향당에 있어서도 준엄하며 관용하는
모습에 모두 존경하고 신뢰함이 컸었다.
또 환과 고독과 빈약한 자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온후한 마음이 있었고,
학교가 퇴락하자 민 부담없이 단독 판출로 누차 수리하였다.
백형 휘 서(瑞)는 대사관 부제학인 바 형님 따라 조정에 이르러
중국 조정 인사들에게 까지 널리 그 재질과 인품이 알려져
많은 존경을 받으셨다.
선조(宣祖) 임진(壬辰)에 이르러 왜구가 침입하니 국왕 행차가
서순 함에,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대소 신민이 살길을 찾아
새나 쥐처럼 숨고 굴복하기에 바쁜 지라, 선군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영성군
신경행(辛景行)1)과 더불어
의병을 규합, 스스로 유진장으로 군량을 책임져 조금도
부족을 느끼지 않게 하시니, 그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한나라
소하(蕭何) 같은 이라 하였다. 조정에서 논공하여 시상을 하사하되
사양하고 받지 않은 고로, 국왕이 듣고 칭찬하여
양한당의 사호를 내리시고, 선략장군 충좌위 부사과 상주목사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선군께서는 가산을 일삼지 아니 하시고 산수를 즐겨 등산과 낚시를
잘 다니셨으며 또 집에 있을 때에는 친구들과 시서의 강론과
시회로 항상 즐겨 세월을 보내셨다.
만력 정유(丁酉) 12월 정사(丁巳) 삭(朔) 초7일 계해에
천명으로 침류정에서 향년 71로 임종하심이라.
고자 수신(守身)은 계수통곡 명(銘) 왈
於呼我先 不顯其德 오! 우리 선고님이시여, 높으신 그 덕을 나타내지 아님이시여
克開厥後 以介景福 후손들의 나아갈 길을 가르치고, 큰 복을 받고 누리게 하시니
萬祀千歲 其敢有負 천년이고 만년이고, 어찌 감히 그 큰 은혜를 잊으리오까!
琢石記事 用圖不朽 그 사적을 돌 비석에 새겨둠은, 오래오래 잊지 않으려 함이오이다.
여타는 다 기록치 못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