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봉황정묘갈략(花峯黃珽墓碣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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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花峯黃珽墓碣略
余官臨瀛之翼年黃生之璿抱狀示余曰此吾先祖花峰公行錄也昔年故監司任 公舜元知本府時請墓誌未刻而失之回祿後有李叅判悔軒公庭綽以吾宗黨牒 中錄敍爲狀略而多闕故縣監崔公宇泰以花峰公外玄孫始蒐集爲行錄此是也 以吾世貧墓無顯刻久爲後裔齎恨今幸伐石將記不可泯之實蹟以賁墓道子其 圖之余曰余是後生世多秉筆者我何有焉屢辭累懇强而後盥手讀其狀志操之 剛方論議之峻正世罕其儔至於餘事文章可以壓倒一代於是乎自不覺歛膝敬 服此文之屬於余者豈不與有榮乎按其狀曰平海之黃肇自高麗侍中諱裕中入 我朝以開國功官贊成封平海君 諡襄武諱希碩即公六代祖也五代祖諱象以 太宗駙馬罷尉官兵曹判書高祖諱繼祖蔭修義副尉佐軍協司直曾祖諱自中司 僕寺正祖諱謙司果考諱世達經歷妣咸陽呂氏監察世平之女也公諱珽字玉汝 因所居地鄕人稱花峰丈公以嘉靖壬戌七月十五日生于蓮洞京第已自髫齕儼 若成人從兄吏議公稱吾家惠連而奇愛之皇考早世叔父水使公嚴有法度敎以 義方及長從崔汾厓諸先進遊以文學記識見推於士友壬辰遭倭亂奉母夫人避 寓于江陵而已還京中 萬曆乙巳增廣生員己酉筮仕時當光海世爾瞻掌文衡 以科第私餂士流公獨與泮儒鄭澤雷申起漢扶綱激濁毅然特立爾瞻婿尙恒說 之曰婦翁聞公名行擬除洗馬欲擇柑製盍一往見公正色曰我將種也安敢望士 族淸選且有素善從友如文學醞藉之姜鶴年吳允諧氣節激仰之趙慶起嚴者 足矣何苦懷刺朱門乎及彦滉書輔吉疏出公歎曰三綱滅矣九法斁矣君子見幾 而作不俟終日遂與二弟奉母夫人復向江陵歷謁奇相自獻奇乃愕然曰吾因申 起漢聞令名而不得見今乃遠存於廢居危蹙之地始知君高士也義士也到府南 蓮花峰下名其水曰濂川取周茂叔遷南康而不忘道州也甞言不治農則無以爲 契活不講學則不以達事理以二民扁其齋日晨起候北堂退與二弟經傳從事怡 愉湛樂而閨門肅雍若無人聲開墠於花峰之巔每月朔西向瞻拜曰先廟先塋在 彼白雲下庚申公年五十九丁母夫人憂尙蔬食哀毀後四年甲子七月一日考終 于第享年六十三以禮葬于府西下濟民院戌坐之原嗚呼公志高義峻與世相忤 避于鄕十年怡然自樂未甞以坎坷有所欲然也家居罕出門足不到於府城交不 妄於鄕人同鄕之識公面者小矣至於朝廷得失鄕黨毀譽耳有聞而口不言日但 以讀經著書爲事有士禮冠婚喪祭四篇名曰一家曲禮有家訓十二篇皆修齊言 行之爲己事也至於律曆算數百家之書無不旁通其他詩文二十餘編幷因家人 失火凡公所著手書無一存者以公文行德性足爲國器竟不得需于世其心得於 聖賢緖論家庭聞見者亦無留於家豈不爲後孫至恨乎公孫生員公七歲能屬文 公歎曰德行本也文藝末也古今姦凶孰無文章乎盖指爾瞻而可以驗公之修己 敎人爲法於後世也公配三陟沈氏祔而直長添籌女也生一子曰有身進士女適 叅判崔具瞻次叅議李尙馦次崔克建有身四男曰埴生員墺叅奉採校尉垓曾玄 孫二十餘人不可悉錄今有七代孫之璿主碑事後孫繩繩天之報施善人於斯可 見矣
  輔德任鼎常撰


 화봉 황정 묘갈략
 내가 강릉에 부임한 이듬해 황(黃)생 지선(之璿)이 장록을 안고 와 나에게 보여 가로되, 이것이 나의 선조 화봉공의 행장록인 바, 옛날 감사 임(任)공 순원(舜元)이 지본부로 있을 때 묘지를 청해 원고를 정돈한 바 있었으나, 각본을 하지 못한 채 불행히도 화재로 소실 당하고, 그후 이(李) 참판 회헌공 정작(庭綽)이 우리 종중과 척당 관계로서 가첩 중에서 행장을 녹출해 보았으나 흩어져 잃어버린 것이 많은 고로 완결하지 못하였다. 그후 현감 최(崔)공 우태(宇泰)는 화봉(花峰)공의 외현손인 고로, 이에 관심을 가져 다방면으로 수집, 겨우 완성이 이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이 빈한하여 선영 묘에 비갈을 세우지 못해 오랫동안 후예들의 한이 되어 왔더니, 이제 다행히 치석이 완료되었음으로 민멸하지 않을 실적을 기록하여 묘도에 어그러지지 않고저 함이라 하며 조력해주기를 청하는 바라, 이에 본인이 아뢰되 나는 후생이오, 지금 문필이 빛나는 문장들이 많은데 어찌 나 같은 미흡한 자가 중책을 감당하리오, 누차 사퇴나 굳이 간청함으로 마지못하여 세수정제하고 장록을 읽어보니, 지조가 굳어 두각이 드러나며 의논이 엄준정직하야 세상에서 그 짝이 드물고, 또 문장과 기타 여러 점이 가히 일대를 압도할만한 지라. 어시호 무릎을 꿇고 경복하여 이 글을 쓰는 나로써는 무한한 영광됨을 느꼈다.
 평해의 황씨(黃氏)는 고려 시중 휘 유중(裕中)을 중조로 아조에 들어 개국공신으로 찬성사 봉 평해군 시호 양무(襄武) 휘 희석(希碩)인즉 공의 6대조시라, 5대조의 휘는 상(象)이니 태종 부마로서 신숙(信淑)옹주 조세로 계취 전주 이(李)씨니 국체파위요, 관은 병조판서요, 고조의 휘는 계조(繼祖)이니 수의부위 좌군협 음 사직, 증조의 휘는 자중(自中)이니 사복시정, 조의 휘는 겸(謙)이니 사과요, 선고의 휘는 세달(世達)이니 경력이라. 선비는 함양 여(呂)씨니 감찰 세평(世平)의 여라.
 공의 휘는 정(珽)이요, 자는 옥여(玉汝)라. 소거 지지 향인들이 화봉(花峰)장이라 일컬었도다. 공이 가정 임술(壬戌)(1562) 7월 15일에 연동 경제에서 생하사, 어릴 때부터 용모와 자질이 비범하여 보는 사람들이 다 놀라 장래를 촉망하더라. 그 종형 이조참의 휘 서(瑞)께서 우리 집안에 있어서는 진나라 문장 혜련(惠連)같은 분인데 항상 공을 기특이 보아 사랑하였다.
 부친께서 조세하심에 숙부 수사공이 법도로서 의방지훈(義方之訓)을 엄히 가르치니 문장과 덕행이 일취월장터라. 장성하여 최분애(崔汾厓)같은 선배들과 교유, 문학과 저술이 출중하여 사우지간에 추앙을 받았다.
 임진(壬辰)왜란을 당하여 모 부인을 모시고 강릉으로 일시 피거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와 만력 을사(乙巳) 증광시에 생원에 입격, 기유(己酉)에 벼슬을 제수, 때마침 광해조라 이(李)이첨이 문형을 장악하고 선비들의 과거를 편당과 사리로 함에, 공이 성균관 학사 정택뢰(鄭澤雷) 신기한(申起漢)등과 더불어 혼탁한 중에도 기강을 바로 잡고자 의연히 일어서니, 이첨의 사위인 상항(尙恒)이 설득하기를 부옹이 공의 명망과 행신을 잘듣고 세마 벼슬을 제수코저하여 감제로 택하려하니 한번 응시함이 어떠하오 한대, 이에 공이 정색 왈 나는 장종이라 어찌 사족들의 청환에 임하기를 바라리요.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이 온화한 강학년(姜鶴年) 오윤해(吳允諧) 등, 또 기질이 격앙하고 의리가 굳센 조경기(趙慶起) 엄돈(嚴) 같은 분들과 평소의 교분이 두터움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의리를 숭상하는 것으로 족하거늘 어찌 고관대작들의 문전에 명함을 드리겠는가? 급기야 언황(彦滉)의 서와 보길(輔吉)의 소장이 제출되니 공이 기뻐하여 왈 3강이 없어지고 9법이 무너졌다. 군자가 기미를 보아 동작하되 종일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하고, 곧 두 아우로 더불어 모 부인을 모시고 다시 강릉으로 향할새, 역노에 기(奇)정승 자헌(自獻)을 배알하니 기(奇)정승이 놀라며 왈, 내가 신기한(申起漢)으로부터 존함을 듣고도 만나지 못한 채 폐거해서 위축한 이곳을 찾아주니 비로소 그대가 지조있는 선비요 의사인 줄을 알고 느끼겠도다.
 강릉 부남 연화봉 아래에 이르러 그곳 냇물을 염천이라 하니 주무숙(周茂叔) 염계 선생이 남당에 천거함에 도주(道州)를 잊지 않음을 취의함일러라. 일찍이 말하되 농사를 짓지 않으면 생활을 기약할 수 없고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사리를 통달할 수 없다 하여 서재에 이미(二民)이라는 편액을 걸고, 새벽에 모친의 거실에 나아가 문후한 후 두 아우로 더불어 경전을 강론하는 것으로 기쁨에 가득, 형제간에 우애하고 화평하며 각열함으로 낙을 삼았다.
 또 규문의 화락하고 정숙하여 언성이 밖에 들리지 않으며 화봉산정에 단을 모으고 매월 초삭에 서향하여 첨배하여 말하기를 선묘 선영이 저 백운 하에 있다 하더니, 공이 59세에 모 부인상을 당하여 소식에 애훼로 몸이 몹시 쇠하여 4년후인 갑자(甲子) 7월 1일에 본집에서 고종하니, 향년이 63이더라. 예로써 안장하니 묘소는 강릉 부서하 제민원이라.
 오호라 공의 뜻이 높고 의가 장하여 세속과 상위되고 향토에 피하기를 십여년이 넘었거늘, 그동안 아연히 화락하게 살며 일찍이 불우한 처지를 유감으로 여기는 빛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교유를 함부로 하지 아니하고 부내의 출입도 잦지 않음으로 거가에 출입객도 적어 고명한 이름은 컸어도 얼굴을 잘 아는 이는 비교적 적은 편이더라. 또 조정의 정론 시비나 향당의 비판은 듣기는 하여도 말하지 않고, 일상사는 다만 경전을 읽고 문장을 저술하는데 있었다. 4례의 관혼상제 4편을 편술하여 그 명을 일가곡례라 하고, 가훈 12편이 있으니 모두 수신제가와 언행에 관한 것으로 덕행을 닦는 것 뿐이었다. 또 음률 역서 산수 등 백가지의 서에 능통치 않은 것이 없으며, 시문 수십편과 많은 저술 수서 등은 가인의 실화로 몽땅 소진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공의 문행 덕성으로 족히 국가의 큰 그릇이 됨직 하였는데 세상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또 성현의 가르침을 심중에 간직하고 가정 견문을 이어 기술한 것 마저 잃고 말았으니, 어찌 후손의 한사가 아니리오.
 공의 손 생원공이 7세에 능히 글을 지으니, 공이 탄식하기를 사람은 덕행이 근본이 되고 문예는 말이 되는 법이며, 고인에 간흉한 자라도 글을 못하는 자 있었든가? 이는 이이첨(李爾瞻)을 비유하는 것이니 가히 공의 수기(修己)는 교인함이 후세의 법이 될만한 것을 짐작할 수 있겠더라.
 공의 배위는 삼척 심씨(沈氏) 직장 첨주(添籌)의 여로 합봉하였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남의 이름은 유신(有身)이니 진사라, 장녀는 참판 최구첨(崔具瞻)의 아내요, 차녀는 참의 이상혐(李尙馦)의 아내요, 삼녀는 최극건(崔克建)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유신(有身)이 4남을 두었으니, 장은 식(埴)이니 생원이오, 차는 오(墺)이니 참봉이요, 3은 채(埰)이니 교위요, 4는 해(垓)이니라.
 증현손 모두 수십여명이 있어 다 기록치 못하노라. 지금 7세손의 지선(之璿)이 이 입비하는 일을 맡아 후예에게 전하니, 천리가 선인에게 보시하는 것임을 이제 보겠노라.
  보덕 임정상(任鼎常)1)

1)
본관(本貫)은 풍천(豊川)이며, 경기 출신으로 1807년 순조 7년 정묘알성시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자(字)는 응서(凝敍)이며, 부친은 임희효(任希孝)이며, 외조부는 하동(河東)인 정태영(鄭台榮)이며, 장인은 풍산(豊山)인 심우(沈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