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공유사(『』=추기(追記))
공의 휘는 희석(希碩)이니 개국공신인데 봉 평해군(平海君)하고
증 우의정(右議政)하며 시호를 양무(襄武)라 하다.
황씨(黃氏)가 동국에 나타남은 학사(學士)공
휘 낙(洛)으로 부터인데 중세에 와서 시중 휘 유중(裕中)이라 하는 분이
아들 삼형제를 두셔, 장에는 휘 진(璡)이니 태자검교요, 다음은 휘
서(瑞)이니 평리로 시호가 충절(忠節)이오, 그 다음은 휘 용(𤨭)이니
삼중대광으로 시호를 충경(忠敬)이라, 이 3분이 3파로 나뉘인 조상님들인데,
충경공이 휘 태백(太白)을 낳으시니 형조전서로 본조에서 증 우의정하고,
전서공이 휘 우(祐)을 낳으시니 병조전서로 역시 증 좌의정하고,
의정공이 휘 천록(天祿)을 낳으시니 판도판서로 역시 증 영의정이요,
이 어른들은 즉 공의 고조 증조 조 및 고위시라.
본조에 들어와 공이 추충협찬하여 개국원훈에 책록이니,
그 위 3대를 모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추증되셨다.
공이 생하심에 몸이 크고 울음소리가 웅장하여 보고 듣는 이들이 범상치 않다더니,
자람에 기골이 장대하고 미목이 수려하며
안광이 불빛같고 인물이 준수한데, 또 재주가 뛰어나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해득하니, 불과 십여에 4서를 통달하고
3경을 외우니, 그 앉은 자세와 걷는 태도가 의젓하고 무게 있어
뭇 사람들이 공을 만나면 부지불각에 머리가 숙여짐을 깨닫지 못하였다하더라.
그리고 장대한 기골에 여력이 뛰어나 백근철퇴를 휘두르며 말을 타고 활을 쏘며
칼을 쓰는 무예를 숭상하니, 6척 쌍검을 번개같이 휘두루고,
활솜씨는 백발백중 선궁 특기를 가져, 문자 그대로 문무겸전한 어른으로
그 용맹과 지혜가 나라를 위하여 방패가 되고 성벽이 됨이 충분하다고들 칭하였다하더라.
일찍이 이태조(李太祖)와는 학문도 함께하고 병서도
토론하며 시국과 국정도 서로 근심걱정하던 뜻 맞는 친구간이였더니,
하루는 두 어른이 안변 석왕사를 유람할새 절에 중들이 떡치는 큰 돌판을 옮기려 하오나,
움직이지 않는지라 이것을 보신 공께서 벌떡 일어나 번쩍들어 원하는 제자리에 놓아주니
중들이 놀라 어안이 벙벙, 말을 못하고 태조(太祖)께서는 그 광경을 보고
황(黃)공은 진실로 큰 장사라 내 이제야 사람을 얻었노라 하며
더욱 가까이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공이 북청주 상만호시 북방의 여진족들이 승승장구하여 국경을 침범,
많은 무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며 약탈하더니, 우왕 9년(1383) 계해(癸亥) 8월에는
여진족 괴수 호발도(胡拔都)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들어와 양민을 약탈하니, 단주 상만호 육려(陸麗)와 규합하여
단주의 용산 동해선 등지에서 괴수 호발도(胡拔都)와 격전을
계속하더니 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와 협력 대파하고』
우왕 11년(1385) 을축(乙丑) 『4월에는 왜구 150여척의 배로 육해군을
무수히 싣고 들어와 함부로 살략 함에 동북면 상원수 심덕부(沈德符)며
부원수 홍징(洪徵)이며 대호군 정승하(鄭承可) 등과 협력하여 홀면 평야 등지에서
일대격전으로 격파하였으나 또다시 그해』
9월에는 역시 왜구가 100여척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니 『신임 동북면
도원수 이성계(李成桂) 군 퉁두란(佟豆蘭) 이하 100여명과
공의 군사 500여명이 규합』 홍원군 대문령에서 왜구들과 싸워 격멸하니
적의 시체가 계곡에 첩첩뿐 아니라 피가 흘러 강물을 더하였다하며
100여척의 대적이 겨우 10여 수(首)만이 근근히 살아 천불산으로
도주하였다 하더라.
이외에도 빈번한 왜구침략에 전전 승첩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안돈시켰고,
나라의 안도에 방패가 되었다 한다. 그 후 왕(王)이 명(明)나라를 치고 원(元)나라를
섬기고자 하여, 우왕 14년(1388) 무진(戊辰) 5월에는 요동을 치고자,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요동 출정 우군 도통사를 삼고 대군을 인솔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 진둔하였던 바니,
때마침 여름 장마 비가 연일 계속,
개일 줄을 모르며 군량은 뒤를 따르지 못함으로 군사들의 마음이 많이 동요되고 있었다.
이때 공은 후군을 거느리고 있다가 천기를 보니 비는 좀처럼 개일 것 같지 않고,
지리적으로 위화도는 수중에 잠길 우려가 있는 곳이라 진지를 육지로 옮길 것을 건의하고,
곧 대군을 이동시켜 강을 건너 진을 옮기자 그날 밤 더욱 큰 비가 내려
위화도는 완전 폭몰되니 이에 모든 군사들이 공의 신기묘산을 칭찬하며
공의 건의가 없었던들 수만의 대군이 수중고혼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라 하며
우리들이 살게됨은 오직 황(黃)공의 힘이라 하였다 한다.
『또 공은 모든 참모와 도통수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진군할 것을 의논할 때,
공이 말하기를 우왕은 유약하고 국정에 어두우며 또 수시중 최영(崔瑩)은 늙어도
기혼이 좋으나 인심과 근심을 상세히 살피지
못하고 또 군사에 뒷받침할 국력은 헤아리지 않고, 다만 원(元)나라와 고려 왕조 간에
맺어진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여 대 원나라 자체도 국운이 쇠하여
신흥 명태조(明太祖)의 세력에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 고려(高麗)에게 원군을 청하는 처지인데,
작은 우리나라 입장으로 원나라도 당치 못하는 명태조(明太祖) 세력을 맞아서
막는 것도 이이요, 하물며 멀리 대군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그를 쳐 항복 받는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회군함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모든 참모들이 이구동성으로 황(黃)공의 의견이 국가를 바로잡는
올바른 생각이라 하여 모두 회군을 찬성하였다. 이에 이성계(李成桂)는
왕명은 진군이요 군심(軍心)은 회군이니, 진군하자니 많은 군사를 죽이게 되고
싸움은 패할 것이 명약관화하며, 또 회군이면 왕명 거역으로 역모에 몰릴 것이
십상팔구인지라 침식을 잃고 심사숙고 거듭 참모회의를 열었으나, 회군 이외에 진군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고로 부득이 굳은 각오로 회군을 명령하였다.
이에 군사들은 이성계(李成桂)의 위덕을 크게 흠모하여 만약에
조정에서 무리하게 이성계(李成桂)를 회군의 역모로 역이용하여 제거하려 할 때는
힘을 합하여 항거키로 모두 각자의 속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전부터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이 너무 비대하여 짐을 보고
그 반대자들이 은연중 이를 제거하여 국가의 위태로움을 면하여야 된다고 생각하던
수시중 최영(崔瑩)과 정몽주(鄭夢周) 일파가 좋은 기회라 하였다 하여,
곧 회군을 멈추게 하고
이성계(李成桂)를 도통수에서 파직하려 하였다. 이 기미를 안 이성계의 세째아들
방원(芳遠)이 분개하여 장사들을 뽑아 최영(崔瑩)과 정포은(鄭圃隱)
등을 제거하는 묘책을 세우고, 부친에게 문의하니 부친이 꾸짖고 말리며
황희석(黃希碩) 공은 항상 옳고 좋은 일을 잘 정책하는
분이니 의견을 들어보아라 하였다. 방원(芳遠)은 곧 공에게 그 뜻을 고하니
정포은(鄭圃隱) 같은 분은 민망(民望)이 높고 학자인데 그와 같은
무모한 짓을 함은 옳치 못하다 하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방원(芳遠)은 듣지 않고 결행하고 말았다 한다. 공은 임의 동지 밀직사를
거쳐 도진무로써 정예 5천군으로 수도 개경을 지키고 있었다.
공양왕 4년(1392) 임신(壬申) 4월 이성계(李成桂) 낙마상을 계기로 수시중 등이
이씨 배척운동을 전개함에 공은 완벽한 방비로 협찬이였든 바,
임의로써 이방원(李芳遠)의 반격으로 4월 4일 선죽교 사건이 터짐에
정국은 완전 전복되었다. 공은 다시 1만 정예군으로 이성계(李成桂)를 호위하니
좌시중 배극렴 등 민심과 군심이 왕조에서 떠나 이성계(李成桂)에게로 돌아오니,
곧 군심이 추대되어 동년 즉 임신(壬申) 7월 16일 병신(丙申) 수창궁 정전에
새 왕조 즉 이태조(李太祖)가 등극, 보위를 성취하였었다.
국조실록에는 양무(襄武)공이 개국공신에 추봉이라 되어있으나,
일각에서는 동년 즉 임신(壬申) 7월 28일 제1착 개국공신 봉 15인 중 1인이시라 한다.』
고로 공은 상의중추원사 도평의사 가정대부 문하시랑(商議中樞院事 都評議使 嘉靖大夫 門下侍郞)을
거쳐 숭록대부 찬성사(崇祿大夫 贊成事)로 추충 협찬 순충분의 좌명 개국공신(推忠協贊 純忠奮義 佐命 開國功臣)에 책록과 함께 봉 평해군(平海君)하다.
태조(太祖)께서 늘 가라사대 과궁(寡躬)이 오늘날 나라를 얻게 됨은
오직 경의 정책과 공이 크다 하여 공신녹권과 훈장을 내리며 서명 즉 임금이 신하에게
하는 맹서에 자손음직 유급후세(蔭職宥及後世)에게까지 너그럽게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또 그 공을 논할진데 정상(不遷之廟位)이 의존할지니라 하였다 한다.
이어 대(帶)와 여(礪)를 하사함이었다 한다. 나라를 세움에 임금과 모든 신하가 함께
모여 천지신명과 종묘사직에 고하는 역사적인 회맹에 공은 환후가 깊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드니, 그 후 태조(太祖) 3년 갑술(甲戌) 8월 무진삭(戊辰朔)
초3일 경오(庚午)에 생을 마치시니, 태조(太祖)께서 심히 슬퍼하사 모든 정사를 철조하시고
친히 임하사 조의하고, 의안대군에게 하명하사 제전을 행하시고 은혜로서 상을 내리시되
다른 모든 공신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하여 조정의 주선으로 그 초상을 마친 다음
개성부 옥연방 부감원 자(子)좌로 장례를 모셨다.
태종(太宗)이 공을 위하여 장자 상(象)에게 신숙(信淑)옹주로써 이강 즉 임금의 딸이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인데 이는 요(堯)임금의 딸이 리(釐)를 필부 순(舜)에게
강가케 한 고사에서 인용된 말이다.
선조(宣祖)조에 와서 교서에 이르기를 황희석(黃希碩)의 허다한 자손은
백세(百世)토록 사역 즉 군역 이역 천역에 침범하지 말 것이라 하였으며,
이(李)정승 원익(元翼)의 장계에 이르기를 황희석(黃希碩)의 적손인 즉
백세(百世)토록 물침하고 서손인 즉 비록 낙강이라 할지라도 군역에 침범치 아니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함이 어떠하겠나이까 한즉, 윤허하시기를 지난날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셨으니, 역대 조정의 승봉지전의 대략을 기술하노라.
배위는 신혜택주(愼惠宅主) 삼척 박씨(朴氏)니 부정 원우(源祐)의 여(女)요,
계배는 정경부인 연안 이씨(李氏)니 형조전서 기형(琪亨)의 여(女)라.
4남을 두셨으니 장남은 상(象)이니 부마로서 재취니 파위(罷尉)되어
선원보에 실려 있지 않으며 뒤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고, 다음은 인(麟)이니
예조판서에 이르고, 그 다음은 난(鸞)이니 병조정랑에 이르고,
또 그다음은 곡(鵠)이니 동래부사에 이르렀으며, 자손이 번창하여 그 빛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은 공이 덕을 쌓은 연고이라 하겠다.
오호라! 공의 훈업과 사적이 맹부 즉 충훈부에 기재되어있고 그 사실인 즉
옛 한나라의 명신 소하(蕭何)나 조참(曹參)이오, 당나라의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에 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조정에서 이름으로
예조에서 결의하여 시호를 양무(襄武)로 정하고 이조에서 기록된 사실인 만큼
조정에서 이러한 공신들의 행록을 찬술한 것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여러차례의 병화로 집에 있는 문헌에 증거가 없으니 어찌 통탄함을 금할 수 있으리오.
가만히 생각한 즉 세대가 더 멀어져 뒷 날에 오늘을 보는 것이
도리어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 이만 같지 못할까 두려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대략을 기록하여 다음날의 고증을 삼게 하노라.
종예손 병(昞)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