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교관 황연 행장략
공의 휘는 연(衍)이오 자는 중행(重行)이며 호는 애모재라. 황씨는 본래 중국 강하인으로
동한 건무 년간에 학사 휘 낙(洛)이라 하는
분이 부해로 해동에 오셔서 기성에 처음 거주하시니, 즉 지금의 평해라.
자손이 곧 지명을 따라 본관으로 적을 정하였더니, 수수세세를 내려와
휘 온인(溫仁)이라는 분이 있어 고려 조에 관직이 금오장군이오,
또 유휘 용(𤨭)하니 삼중대광보국 시는 충경(忠敬)이오,
아조에 들어와 휘 천상(天祥)이요 관직이 문하찬성사이니 즉 개국공신
양무(襄武)공의 숙부요, 유휘 중수(仲壽)니 관직이 예민시 주부라,
이 분이 공의 고조요, 증조의 휘는 백령(百齡)이요, 조의 휘는 유경(有慶)이요,
고위의 휘는 응문(應文)이니, 대대로 문학과 행의가 있었고,
비위는 정선 전씨(全氏) 재형(在亨)의 여(女)요
채미(採薇)선생 오륜(五倫)1)의 후손이러라.
만력(萬曆) 을미(乙未)(1595) 12월 30일에 공을 생하니, 어려서부터
영민함이 남보다 뛰어나, 7세에 효경을 배우고 8세에 소학을 통달하니 심중후덕하여 성인과 같으며 향당의 장노들이 일견
기이하게 여기더라. 겨우 10세에 모부인이 유행괘질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더니,
공이 칼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모부인 입에 흘려 넣고,
밤이 새도록 울며 부르니 새벽이 되어 호흡을 통하여 마침내 회소 하는지라.
이 소문을 들은 원근향리
사람들이 다 흠탄하여 진실로 하늘이 낸 효자라 하더라. 부모를 위하여 단지하는 일이 세상에 혹 있다고는 하나, 공과 같이 불과 열살의 소년으로, 또 애통절박한 처지에서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감히 어른도 본보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후 십년이 지난 을묘(乙卯)년 여름에 또한 병으로 자리에 누워,
8~9삭이 됨에 사경에 이르러 약석의 효를 보지 못하더니, 우연히
한 노승이 와서 말하기를 이 병은 노루고기를 복용하면 낳을 수 있다 함으로,
공이 이를 구하기 위하여 돌고개산에
들어가 호천통곡하며 하느님께 노루고기를 얻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
그때 깊은 밤이라 월색은 밝고 사방은 고요한데
홀연히 일진광풍이 일더니, 큰 범 한 마리가 나타나 공의 상투를 물어
등에 업고 순식간에 준령을 넘어 골짜기에 이르러,
바위 밑 큰 나무 옆에 버리거늘 정신을 차려 가만히 사방을 살펴보니
큰 독수리 한마리가 내려와 무엇을 채 가려 하거늘,
그 범이 큰소리로 독수리를 쫓아 버리는지라. 공이 나무로 올라가 자세히 아래를
살펴보니 큰 노루 다리 하나가 구렁에
떨어져 있는데 매우 살찌고 아직 생생해 보이는지라, 심중에 기쁘게 놀라와
꿈만 같은 생각을 느끼며 곧 내려가 노루다리를 가지고 황망히
근처 절로 들어가니 그 절은 영양의 검마사(劍磨寺)라, 집에서 거리가 100여리라.
노루 다리를 집으로 가져와 모부인에게 복용시키니 신기하게도
병환이 쾌유하는지라 노승의 말이 과연 적중하였으니, 이는 천지신명이
감동하여 산신령이 노승이 되고 대호가 되어 험난한 곳에 들어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기적일 것이다.
그후 양친의 상을 당함에 초종 장례범절을 극진히 예제를 따랐으며,
6년간의 여묘살이와 매일 3차레의 애곡 행사를 하루같이 겪어가니,
그 효성이 지극함이 진실로 감탄하겠더라.
경술(庚戌) 7월 19일에 졸하니 향년이 76이었다. 묘는 월연산 자(子)좌라.
향중 사람들이 감사에게 진청하고 도신이 조정에 장계 하였더니,
숙종(肅宗) 계유(癸酉)(1693)에 정려를 특명하고 비답 즉 왕이 유사에게 가로되,
지극하도다. 10세에 단지하니 효성이 천지를 동하고 크도다. 100리를 범을 타고
갔으니 그 정성이 신명이 감동했다고 했었다.
이 사실은 평해군지에도 실린 바 있다.
배위는 회원대성
황충옥(黃忠玉)의 여(女)라. 생육이 없어 아우 간(侃)의 아들 염(淡)으로써
후사를 삼고,
장손은 영화(永華)요, 차손은 도평(道平) 계평(繼平)이요.
증손은 장 왈 시천(是川)이요, 차 왈 택중(宅中) 위중(位中)이니,
모두가 법을 잘 지켜 지금껏 효우충신하는
풍습이 있다.
오호라 이(李)조에 와서 치제훈화치적이 오르고 공훈이 화려한 충효절의
지인이 사기에 많이 있으며, 특히 중엽 시대에 와서는 선행미사를
포창하는 전례가 잘 이루어지는 때라, 정려로 포상하고 증직으로 영예롭게 하였으니, 유명이 다 감은하야 아무 여한이 없었으리로다.
이것이 출천지효와 격천지성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이러하였으리요.
모름지기 그 자손들은 선조의 유적을 계승하여 변함이 없을지어라.
통사랑 전 참봉 덕은 송술헌(宋述憲)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