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子譜序
내가 초여름부터 선묘(先墓)에 치석(治石) 역사(役事)가 있어서 문산(文山) 병사(丙舍)에 머무른지가
이미 월여(月餘)가 넘은 어느날, 황군(黃君) 종흠(鍾欽)이 전위(專委)해서 여중(旅中)에 내방(來訪)하여
대충 양가(兩家)에 세의(世誼)가 있었다는 말을 하고, 1책자(一冊子)와 족인(族人) 발(墢)과 옥(玉) 양씨(兩氏)의
서찰(書札)을 보이면서, 오가(吾家)의 신편(新編) 세보(世譜)인 바
권수(卷首)에 서문(序文)이 없을 수 없다 하여,
나에게 일언(一言)을 요청(要請)하는데 그 촉탁이 매우 간결하고도 또 원로(遠路)에
찾아온 성의(誠意)가 사람을 감동(感動)케 하나, 돌아보건데 나의 학문(學文)이 적고
정신(精神)이 혼미(昏迷)한데 이런 처지로 글을 써 과연 높은 안목(眼目)에 합용(合用)될 것인지
염려스러워, 차라리 굳게 사양하고 말리라 생각했으나, 세의(世誼)가 있는 처지요
또 나의 무졸(蕪拙)한 말로는 그 청탁을 방색(防塞)할 수 없었다.
삼가 보첩(譜牒)을
상고해보니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시조(始祖)이신 휘(諱) 낙(洛)이라는 어른이 처음 동(東)쪽 나라에
오셔서 인거(因居) 평해(平海)하시고, 후(後)에 그의 아들 형제(兄弟) 3인(三人)이
각각(各各) 관향(貫鄕)을 봉(封)한 바 평해(平海)가 제일 위라.
그 후(後) 잠조(簪組) 상승(相承) 관작(官爵)이 계속
이어졌는데, 충경공(忠敬公) 같은 분은 벼슬이 숭질(崇秩) 즉 일인지하(一人之下)에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최고(最高) 관직에 이르렀으며, 또 수세(數世)를 지나서 양무공(襄武公)이
이태조(李太祖) 건국일(建國日)에 추충협찬(推忠協贊)의 공업(功業)의 뛰어나 작록(爵祿)을 증수(贈受)하고
봉군(封君)의 영총(榮寵)이 있었으니, 아! 융성(隆盛)하도다. 또 감사공(監司公)은 경학(經學)에 밝고
행의(行義)가 높았으며, 양한당(養閒公)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충의(忠義)를 다함과, 충렬공(忠烈公)의 순국대절(殉國大節)이며, 팔경공(八警公)은 아(我) 선조(先祖)
우암(尤庵) 문하(門下)에서 학업(學業)을 닦아 성리서(性理書)를 힘써 배움으로써 사우(士友) 간(間)에
중망(重望)이 있었음은 더욱 가상(可賞)할 것이다. 생각컨데 이같은 명문벌족(名門閥族)이
오늘 동방(東方)의 대족(大族)으로서 수보(修譜)하는 거사(擧事)가 어찌
중대(重大)치 않겠는가?
대저 씨족(氏族)의 친소(親疏) 원근(遠近)을 논(論)할 것 없이 본관(本貫)이 동관(同貫)일 때는 동보(同譜)로
귀일(歸一)하는 것이 인가(人家)의 떳떳한 규칙(規則)이기는 하나 세대(世代)가 멀어질수록
자성(子姓) 즉 후손(後孫)이 더욱 많아져서 1보(一譜)에 합동(合同)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세(事勢)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직 여기 황씨(黃氏)가 종회(宗會)한지 1년(一年)만에 한 파(派)의 보계(譜系)를 고증(考證)하고
정정(訂正)하여 충경공(忠敬公)의 선대(先代) 세계(世系) 및 자손(子孫)을 상심(詳審)하여 유루(遺漏)함이
없고 자람(孜覽)하기 편리하도록 편집하기를 수십번(數十番)하여 장차 인판(印版)에
붙이게 되었으니, 가히 성력(誠力)있는 바요 또 보족(保族)의 성사(盛事)임을
알만하다. 참으로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충경공(忠敬公)의 하계(下系)가
이미 려대(麗代)에 이르러 파분지렬(派分枝列)이 각처(各處)에 산거(散居)하니
왕왕(往往) 명자(名字)나 안면을 모르고 행인(行人)과 같이 지낸다면
이것이 어찌 조상(祖上)의 뜻이겠는가? 이제 보책(譜冊)이 편집 완료되었으니
종족(宗族)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고 또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자연히
그 가운데 흐를 것이다. 충경공(忠敬公)의 후예(後裔)되는 자 각각 힘쓰기
바란다. 충경공(忠敬公) 백중(伯仲) 양파(兩派)도 각위(各爲) 수보(修譜)한다는 말이 있다.
소양(昭陽) 대연헌(大淵獻)(=계해(癸亥)) 복지(復之) 상한(上澣) 덕은(德隱) 송술헌(宋述憲) 근서(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