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선생행장(錦溪先生行狀)

錦溪先生行狀
 성주목사(星州牧使) 황공(黃公)의 휘(諱)는 준량(俊良)이요 자(字)는 중거(仲擧)며 평해인(平海人)이니, 고려(高麗) 때에 시중(侍中)을 지낸 휘(諱) 유중(裕中)이라는 분은 그의 먼 조상(祖上)이다. 휘(諱) 유중(裕中)의 손(孫)되는 휘(諱) 근(瑾)이라 하는 분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조정(朝廷)에서 좌헌납(左獻納)이 되어 정언(正言) 김속명(金續命)1)과 함께 상소(上疏)를 하여 지진(地震)에 관(關)한 변(變)에 극론(極論)을 펴다 왕(王)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옥천(沃川)으로 귀양 갔었고, 나중에 풀려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그리고 휘(諱) 유정(有定)을 낳으니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벼슬을 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으며, 생원(生員) 휘(諱) 정(鋋)을 낳았고 이가 곧 공(公)의 고조(高祖)가 되시는 분이시다. 전서(典書)로부터 현(現) 영주(榮州)에서 우거(寓居)하였더니, 생원(生員) 연(鋋)이 또다시 풍기(豊基)로 옮겨 드디어 풍기(豊基) 사람이 되었다.
 공(公)의 증조(曾祖)의 휘(諱) 말손(末孫)은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요, 조(祖)의 휘(諱)는 효동(孝童)이요, 고(考)의 휘(諱)는 치(觶)이니 모두 은덕(隱德)으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비(妣)는 창원황씨(昌原黃氏)니 교수(敎授) 한필(漢弼)의 여(女)다. 정덕(正德) 정축(丁丑) 7월(七月)에 공(公)을 낳으셨다. 공(公)이 어릴 때부터 탁이(卓異)한 재질(才質)로 일찍이 문자(文字)를 해득(解得)하고 말을 하면 곧 사람들을 놀라게 함으로 모두 기동(奇童)이라 칭(稱)하더니 나이 18세(十八歲)에 영남(嶺南)의 향시(鄕試)에 나아가니 고시관(考試官)이 공(公)의 책문(策文)(정치(政治)에 관(關)한 답안서(答案書))을 보고 구절(句節)마다 무릎을 치며 가상히 여겨 칭찬(稱讚)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공(公)의 문학(文學)은 벌써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다. 그 후(後)로 과거(科擧) 때 마다 항상(恒常) 앞줄에 있어 정유년(丁酉年)에 생원(生員)에 합격(合格)하고 기해년(己亥年) 정시(庭試)에서 회시(會試)에 달리어, 경자년(庚子年)에는 을과(乙科)에 제2인(第二人)으로 급제(及第)하여 권지(權知)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로 성주(星州) 훈도(訓導)에 선임(選任)되었다가, 임인년(壬寅年)에는 학유(學諭)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계묘년(癸卯年)에는 학록(學錄) 겸(兼) 양현고(養賢庫) 봉사(奉事)로 승격(昇格)되어 갑진년(甲辰年)에 다시 학정(學正)에 승진(昇進)되고, 을사년(乙巳年)에 승문원(承文院) 전고(殿考)로서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와 상주(尙州) 교관(敎官)이 되었다가 정미년(丁未年) 가을에 내직(內職)으로 도로 들어와서 박사(博士)가 되고 그해 겨울에 전적(典籍)으로 승격(昇格)되고, 이듬해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서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전적(典籍)으로부터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 춘추관(春秋官) 기사관(記事官)을 겸(兼)하여 중종(中宗) 인종(仁宗)의 양조(兩朝) 실록(實錄)을 닦는데 참여(參與)하더니, 겨울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轉職)되어 벽불소(闢佛疏)를 올렸으며, 신해년(辛亥年) 2월(二月)에 왕명(王命)으로 경상도(慶尙道) 감군어사(監軍御史)가 되었다가 다시 승문원(承文院) 검교(檢校)로 바꾸어 차질(差帙)되고, 6월(六月)에 추생어사(抽栍御史)가 되었다가 7월(七月)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더니 이에 나가지 않으매, 9월(九月)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내려 주었다. 그때 한(韓)성(姓)을 가진 사람이 사헌부(司憲府)에 있어 몹시 공(公)을 구(求)한 바 있었으나 공(公)이 응(應)하지 않으니, 그 부(府)에서 많은 논의(論議)를 하였어도 드디어 친걸(親乞) 즉 어버이 봉양(奉養)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굳이 사양하니, 외직(外職)으로 신녕(新寧) 현감(縣監)을 시키는지라 병진년(丙辰年) 겨울에 병(病)으로 인수(印綬)를 풀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이듬해 가을에 조정(朝廷)에서 단양군(丹陽郡)이 몹시 피폐함을 알고 특히 공(公)을 이를 치유(治諭)하는 임(任)에 뽑아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제수(除授)하거늘,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부임(赴任)하여 3년(三年)을 근무(勤務)하고 만기(滿期)가 되어 집에 돌아와 휴양(休養)하더니, 다시 병조(兵曹)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으로 제수(除授)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경신년(庚申年) 가을에 성주(星州) 목사(特使)를 내리니 4년이 지난 계해년(癸亥年) 봄에 신병(身病)을 얻어 사직(辭職)하고 돌아오는 도중, 병세(病勢) 더욱 심(甚)하여 3월 11일에 예천(醴泉) 지경(地境)에 다다르자 드디어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불과(不過) 47세더라.
 공(公)의 사람됨이 영수불범(潁秀不凡)하여 명민(明敏)한 풍표(風標)가 있으며, 미목(眉目)이 그림같이 수려(秀麗)하고, 재주가 뛰어나 한가지를 들으면 열가지를 이해(理解)하였다. 그러나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지 않고 고을살이2)에서 다스린 자취를 살펴보면 그 직무(職務) 수행(遂行)에 조금도 비겁하지 않고 장래(將來) 참고(參考)할 수 있고 또 모범(模範)된 역사(歷史)의 문안(文案)을 정비(整備)하는데 힘쓰며, 어떻게 하면 백성(百姓)이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마음 편히 살 수 있나 하는 민사(民事)에 마음을 다하였다. 그가 신녕(新寧)에 있을 때 흉년(凶年)을 만나 백성(百姓)이 굶주림을 보고, 스스로 굶주림을 당함과 같이 여겨 진휼(賑恤)로서 백성(百姓)이 되살게하여, 현민(縣民)들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또 전임자(前任者) 때에 백성(百姓)이 내지 못한 세금(稅金)은 공(公)이 실정(實情)을 조사(調査)하여 알맞도록 혹(或) 면제(免除)하고 혹(或) 줄이고 혹(或) 메워서, 수(數)를 충당(充當)하고 문권(文卷)을 폐기(廢棄)하는 등(等)의 적절(適切)한 처리(處理)를 하였다. 그리고 항상(恒常) 백성(百姓) 교육(敎育)에 뜻을 두어, 문묘(文廟)를 증축(增築) 또는 신축(新築)하는데 힘써 권도(勸導)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고현(古縣)에 학사(學舍) 1동(一棟)을 새로 세워 백학서원(白鶴書院)이라 현판(懸板)을 걸고 서적(書籍)을 비치(備置)하며 이를 유지토록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이름 높은 지방(地方)으로 흠모(欽慕)케 하려고 노력(努力)하였다. 또 지방(地方)을 순시(巡視)할 때 수레에서 내려 민정(民情)을 살피니, 과세(課稅)가 심하여 백성(百姓)이 살 수 없어 이산(移散)하고 남긴 집들은 폐허가 되어 있고, 잔류(殘留)한 백성(百姓)들은 식량(食糧)이 없어 굶주려 늘어져 누워있는 것을 직접(直接)보고,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나라는 백성(百姓)이 근본(根本)이 되는 것인데 관폐(官弊)로 백성(百姓)이 못 살아서야 될 말이냐 하며, 실정(實情)과 적폐(積弊)를 소상(昭詳)하고 눈물겹게 상소(上疏)하니 그 극언(極言)한 조목(條目)이 열 가지가 넘었더라.
 이 상소(上疏)에 대(對)한 임금의 내리신 판비(判批)의 추장(推奬)한 말씀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百姓)을 사랑치 않음이 없으니 내가 심(甚)히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특명(特命)으로 조세(租稅)를 면제(免除)함이 10년을 한정(限定)한 조목(條目)이 무려 20여 조(條)에 달(達)하였으니 공(公)의 유창한 문장(文章)과 정성(精誠)이 하느님을 감동(感動)시키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전일(前日)에 없는 바의 은전(恩典)이 내려졌을 것이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유리도망(流離逃亡)하였던 단양(丹陽) 백성(百姓)이 다시 돌아오고 재무족도(才舞足蹈)하는 환희(歡喜)를 가졌다 한다.
 또 향교(鄕校)가 산(山)개골 물가에 있어 왕왕(往往) 홍수(洪水)로 침몰(沈沒)될 우려(憂慮)가 있으므로 공(公)이 명(命)하여 군치(郡治)의 동(東)쪽에 옮겨 세우되 그 위치(位置)와 장엄(壯嚴)한 모습이 지방(地方)을 넉넉히 교화(敎化)시켜 풍화(風化)하는 전당(殿堂)으로 삼는데 충분(充分)케 하였다. 또 군(郡)이 낳은 유현(儒賢)과 우제주탁(禹祭酒卓)의 경학(經學) 충절(忠節)은 모두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함으로 문묘(文廟) 서(西)쪽에 별도(別途)로 한 간 집을 짓고 연년(年年) 제사(祭祀)를 올리게 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공(公)의 교화(敎化) 치민(治民)하는 도(道)는 대정치가(大政治家)도 미치지 못할 바 있다 하겠다.
 더욱이 성주(星州) 고을은 다스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공(公)은 오히려 이런 곳이 마음에 맞는다 하였다. 지난날 신녕(新寧) 단양(丹陽) 두 고을에 학업(學業)을 일구고 교화치민(敎化治民)하던 일만 보더라도 이 치정(治政)키 어렵다는 성주(星州)에서야 더욱 깊고 지극(至極)하게 노력(努力)을 기울였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일(前日)에 노(盧) 목사(牧使) 경린(慶麟)3)이 영봉서원(迎鳳書院)을 벽진(碧珍) 옛 터에 새로 세움이 있었더니, 공(公)이 이것을 규모(規模)를 넓히고 장엄(壯嚴)하고 아름답게 더 꾸몄으며 또 문묘(文廟)를 중수(重修)하여 교화(敎化)의 전당(殿堂)답게 규모(規模)를 개척(開拓)하였다. 이때 마침 오사문건(吳斯文建)4)5)이 성주(星州) 교관(敎官)으로 부임(赴任)할 새 서로 뜻이 같으므로 의논(議論)을 모아 제자(弟子) 몇 사람을 가려 4등급(四等級)으로 나누고 오(吳)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책임(責任)을 맡겨, 매월(毎月) 한 차례씩 모여 강(講)을 하되 검독(檢督)하고 시험(試驗)하며 이해(理解)키 곤란(困難)한 태문(台文)은 풀어주고 그 성적(成績)에 따라 상벌(賞罰)을 주니 성주(星州) 1군(一郡)의 교화(敎化)가 크게 진작(振作)됨을 넉넉히 느낄너라. 또 성주(星州) 동(東)쪽에 공곡(孔谷)이라는 곳이 있어 이곳 모든 유생(儒生)들이 서당(書堂)짖기를 원(願)함으로 곧 공(公)이 즐겨 이를 협력(協力)하며 세우고 공곡서당(孔谷書堂)이라 편액(扁額)하여 주었다. 또 팔궁현(八宮縣)(지금 칠곡군 기천면 창평동)에 녹봉정사(鹿峰精舍)를 세워 다방면(多方面)으로 훈적(訓迪)하되 그 자질(資質)에 따라 크게 성취(成就)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일찍이 공(公)의 고향(故鄕)인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취임(就任)한 상산(商山) 주후(周侯) 세붕(世鵬)6)과는 후진(後進)이 되지마는 신서(信書)로 왕복(往復)할제 그 뜻과 학문(學問)에 미급(未及)한 점(点)을 잘 알면서도 계속(繼續) 친교(親交)를 하는 중(中)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의 견식(見識)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전(前)에 조정(朝廷)에 있을 때 오직 문사(文辭)로만 세상(世上)에 이름이 높았는데, 공(公)과 점점(漸漸) 사우(師友)로 종유(從遊)하는 사이에 성리연원설(性理淵源說)을 듣고 비로소 학문(學問)이란 것은 알아 자랑삼고, 남에게 칭찬(稱讚)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繼續) 지행일치(知行一致)하는데 있음을 깨닫고 차학(此學)에 뜻을 두어 심경사록(心經思錄) 등(等)의 모든 성리서(性理書)를 얻어 읽어 이에 깊이 감발(感發)하였다 하더니, 성주(星州)에서 또 이와 같은 사람이 있어 학우(學友)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도움이 되었으니, 그 교화(敎化)로서 치민(治民)하는 뜻이 더욱 힘차고 그 공(功)이 더욱 깊었었다.
 매양(每樣)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오(吳) 교수(敎授)와 함께 책상(冊床)을 맞대고 강독(講讀)하는 동안에,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침식(寢食)을 잊고 열심(熱心)함으로 사람들이 과로(過勞)로 병(病)날 것을 근심하여 말리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항상(恒常) 이에 대답(對答)이 독서(讀書)는 학문(學問)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기운(氣運)을 기르는 것인데, 어찌 독서(讀書)로 인(因)하여 병(病)이 날 이치(理致)가 있겠는가?
 그 혹시 반대(反對)되는 것은 명(命)일 것이요 글의 허물은 아닐 것이라 하고 그가 거처(居處)하는 곳을 깨끗하고 조용하고 홀로 하였으며, 고요한 온 방안에 성현(聖賢)의 요훈(要訓)을 4벽(四壁)에 써 붙이고 스스로 보아 경계(警誡)하며 깨우치고 근엄(謹嚴)하고 공손(恭遜)한 생활(生活)로 지내왔으나, 그러나 매양 사환(仕宦)으로써 격무에 시달리고 관청(官廳) 일에 흔들리어 깊은 병(病)이 되었음을 깨닫고, 하루 아침에 벼슬을 가볍게 벗어 버리고 돌아와서 죽령(竹嶺) 아래 금계(錦溪) 위에 몸을 늙고져 하여, 이미 그곳에 묘지(墓地)를 점(占)하고 수간(數間)의 집을 짓고 명명(命名)하기를 금양정사(錦陽精舍)라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 장서(藏書)를 하고 경학(經學)을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대저(大抵) 독호(篤好)하는 뜻으로써 정양(靜養)하는 공(功)을 더하게 되었던들, 그 뜻한 바의 진취(進就)가 있어 그 얻음이 이에 끝나지 않고 더 큰 것이 있었을 것인데, 애석(哀惜)하게도 그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한 채 문득 병(病)을 얻어 승화(乘化)하였으니 진실(眞實)로 가석(可惜)하도다.
 비록 그러하나 공(公)의 이름이 홍문관(弘文館) 양재(養才)에 선발(選拔)되어 무오년(戊午年) 봄에 공(公)이 단양(丹陽)으로 부임(赴任)한 것을 보고, 조정(朝廷)의 신하(臣下)들이 의논(議論)하고 장계(狀啓)로 공(公)을 불러 문한(文翰)의 직위(職位)에 두려하여 주선(周旋)을 하였으나, 동진자(同進者)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 나아가는 것을 중지(中止)하였다. 그러므로 조정(朝廷) 제공(諸公)들이 공(公)의 가상한 식견(識見)을 잘 알게 되었다. 공(公)인즉 그 능(能)한 재조(才操)에도 뜻을 더하여 영진(榮進)의 명리(名利)를 급급(汲汲)히 취(取)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생각(生覺)을 달리하고 노력(努力)을 거듭하여 인생(人生) 일생(一生)에 구(求)하지 못한 바를 구(求)하며 범인(凡人)들이 맛보지 못한 바를 맛보아, 웃지 아니할 것을 하여 웃지 아니함을 알지 못하고 화복(禍福)이 화복(禍福)이 되는 것도 알지 못하는 무아상태(無我狀態)에 잠입(潛入)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일은 인생(人生)이 죽은 후(後)에는 그만이지마는 그가 택(擇)한 도(道)가 희망(希望)이 넘치는 새로운 인생(人生)을 개조(改造)하는 데는 바른 방법(方法)이요, 또 이 도(道)를 열심(熱心)히 향도(嚮導)함은 가상할 노릇이다.
 또 공(公)은 우애독실(友愛篤實)하여 좋은 물질(物質)은 먼저 자당(慈堂)을 받들고 다음에 자매제질(姉妹弟姪)에게 나누어주며 자기(自己)가 갖는 것은 적게 하였다. 향당고우(鄕黨故舊)에게는 궁(窮)한데 주휼(賙恤)하고 급(急)한데 구제(救濟)하되 혹(或) 미치지 못할 때는 항상(恒常) 마음에 섭섭함을 금(禁)치 못하였다.
 그리고 그 몸이 죽는 날에 이르러서는 홑이불도 갖추지 못하여 남에게 베를 꾸어 감을 하였으며 옷이 관(棺)을 채우지 못한 것을 보고서 남들이 또 그 청빈(淸貧)함과 교만(嬌慢)하고 외식(外飾)함이 없이 스스로 세상(世上)에 들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 또 아름다운 산수(山水)의 맑고 푸르름을 좋아해서 여행(旅行)할 때나 고을살이하는 곳에 명산적수(名山滴水)가 있으면, 반드시 친우(親友)들과 함께 놀며 시(詩)를 읊고 토론(討論)하며 혹(或) 몸을 빼처 홀로 배회소영(徘徊嘯詠)하고 즐겨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잊을 때가 적지 않았다.
 단양(丹陽)의 도담(島潭)과 구담(龜潭)을 말할 것 같으면 그 주인(主人)되는 이(李) 은사(隱士)의 번병(藩屛)7)으로 그가 방자한 뜻으로 놀고 구경(求景)하던 것을 자못 기이(奇異)하고 호남아(好男兒)의 일이라 하여 더욱 숭상(崇尙)하였으며, 또 태백산(太白山) 계곡(溪谷)에 많이 내린 눈 위와 북한강(北漢江) 상(上)에 백옥(白玉)같이 희고 굳게 결정(結晶)된 얼음 위에 영강설마(永江雪馬)의 놀음을 한껏 즐겨 때로는 이(李) 은사(隱士)의 집을 지나 고을 끝까지 달리는 것을 쾌적(快適)하게 여기고 그 큰 운치(韻致)는 비할 바 없어서 많은 유(類)를 거느리고 한 때를 즐겼다.
 그리고 어느날 공(公)의 병세(病勢) 오래도록 쾌(快)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와 함께 글로써 고결(告訣)하던 말 뜻이 맑고 새로워 평상시(平常時)와 다름이 없더니, 그 죽음에 임하였다는 것을 듣고 다시 서신(書信)을 살펴보니 바로 그 글이 죽기 전날에 쓴 것인데, 그 정신(情神)이 죽을 때까지 똑똑하고 흩어짐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노라.
 공(公)은 예안인(禮安人)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의 여(女)를 취(娶)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아우 수량(秀良)의 아들 영(瑛)으로써 사속(嗣續)을 삼고 이듬해 갑자년(甲子年) 정월(正月)에 군(郡) 동(東) 산내곡(山內谷) 감좌지원(坎坐之原) 선영(先塋) 왼편에 장사(葬事)하다.
 찰방(察訪)은 곧 농암(聾巖) 선생(先生)의 아들이다. 처음 공(公)을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알게 되어 서로 함께 종유(從遊)한지가 가장 오래이며 또한 밀접(密接)하였으나, 우루(愚陋)(퇴계(退溪) 선생(先生) 자신(自身)은 낮추어 말하는 것)는 들은 바가 없었더니 공(公)을 얻어 깨우친 것이 많았다. 공(公)이 선생(先生)의 문(門)을 물러가 돌아가서는 실(實)로 왕래(往來)가 많았고, 옛날의 언약(言約)을 닦으며 공(公)이 항상(恒常) 나를 늙고 병(病)들어 오랫동안 보전치 못할까 근심을 했던 것이, 어찌하여 늙고 병(病)든 사람은 세상(世上)에 살아있어 도리어 그대의 튼튼하고 꿋꿋한 나이에 울게 될 줄을 알았으리요. 공(公)의 언행(言行)을 가히 기록(記錄)할제 정중(鄭重)해서 감(敢)히 다 하지 못하고 다만 그 큰 것만을 잡았음이 위와 같으니, 바라건데 혹시 다음날에 붓대를 잡을 사람의 상고(詳考)함이 있게 된다면 졸눌(拙訥)한 글이 피여 밝힐 바 없으리라.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공(公)의 저술(著述)한 바의 문집(文集) 2권(二卷)과 시집(詩集) 2권은 집에 간수하여 두니라.
  명종(明宗) 18년(十八年) 계해(癸亥) 12월(十二月) 일(日) 진성(眞城) 이황(李滉) 근장(謹狀)

1)
김속명(金續命): 고려 시대의 문신(?~1386). 감찰집의, 삼사우사로 있으면서 권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데 힘써 주위의 미움을 받던 중, 반야(般若)의 사건에 실언하여 불경죄로 문의현(文義縣)에 귀양 가서 죽었다.
2)
고을살이: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지내는 생활.
3)
노경린(盧慶麟): 1516년(중종 11) ~ 1568년(선조 1).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 아버지는 사과(司果) 노적(盧積)이며, 어머니는 풍천임씨(豊川任氏)로 내금위(內禁衛) 임중(任重)의 딸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郞官)을 역임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에 올랐으나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나주목사·성주목사 등을 지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유학을 숭상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이이(李珥)를 사위로 맞았다. 만년에는 숙천부사(肅川府使)로 선정을 베풀어 1564년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 또는 벼슬아치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되었다.
4)
사문(斯文): 1. ‘이 학문(學問), 이 도(道)’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도의(道義)나 문화(文化)를 이르는 말.
2. ‘유학자(儒學者)’를 높여 이르는 말.
5)
오건(吳建):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오종은(吳從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식(吳軾)이고, 아버지는 오세기(吳世紀)이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훈도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
6)
주세붕(周世鵬): 조선(朝鮮) 중종(中宗)ㆍ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ㆍ학자(學者)(1495~1554). 자(字)는 경유(景游). 호(號)는 신재(愼齋)ㆍ손옹(巽翁)ㆍ남고(南皐). 풍기(豐基) 군수(郡守) 때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書院)인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세웠다. 저서(著書)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 <태평곡(太平曲)>, <도동곡(道東曲)> 따위와 <오륜가(五倫歌)>를 비롯한 시조(時調) 14수가 전(傳)한다.
7)
번병(藩屛): 1. 울타리나 대문(大門) 앞의 가림 담장(-牆).
2. 왕실(王室)이나 나라를 수호(守護)하는 먼 밖의 감영(監營)이나 병영(兵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