晩休堂黃貴成行狀
공(公)의 휘(諱)는 귀성(貴成)이요 초휘(初諱)는 귀영(貴榮)이라,
자(字)는 치장(致章)이요 호(號)는 만휴당(晩休堂)이라.
선세(先世)는 평해인(平海人)이니 학사(學士) 휘(諱) 낙(洛)의 후손(後孫)이며,
개국(開國) 창업(創業) 공신(功臣)으로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歷任)하신
휘(諱) 천계(天繼) 호(號) 잠제공(潛齊公)의 8세손(八世孫)이다.
공(公)이 나면서 바탕이 특이(特異)하여 기개(氣慨)가 높고 범상(凡常)치
않으며, 어릴 때부터 나의 선조(先祖)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학업(學業)을 닦아 진취(進就)한 바 있더니,
기축년(己丑年)에 선생(先生)이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름을 받고
공(公)을 수행(隨行)케 하니, 서울에 이르러 본 즉 왜사(倭使)
평의지(平義智) 현소(玄蘇) 등이 우리 나라 사람의 밀입국자(密入國者)
수인(數人)을 잡아 바치는 지라, 왕(王)이 가상히 여겨 불러보시고 환영연(歡迎宴)을
베풀어 주시는 지라. 공(公)이 서애(西厓) 선생(先生)에게 고(告)하되
왜사(倭使)가 온 것은 포망자(逋亡者)를 바치는데 본의(本意)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실상(實狀)은 우리 나라 형편(形便)을 탐정키
위(爲)한 것이라 하였다. 과연(果然) 그 후 7년(七年)이 지난
경인년(庚寅年)에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 명(明)나라로 진군(進軍)
위계(爲計)이니 통로(通路)를 빌리라는 통신(通信)을 하고,
또 임진(壬辰) 4월(四月)에 왜병(倭兵)이 대거(大擧) 침입(侵入)해오니
조정(朝廷)에서 명(明)나라에 원병(援兵)을 청(請)하고
서애(西厓) 선생(先生)이 명장(明將)을 접대(接對)하기 위하여
평양(平壤)에 유(留)하시더니, 이 날에 왜적(倭敵)이
벌써 평양(平壤)을 공격(攻擊)하는 지라.
이때 공(公)은 서애(西厓) 선생(先生)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라 있었더니 홍의적(紅衣賊)이 가만히 모래 언덕에 숨어
조총(鳥銃)을 쏘거늘 공(公)은 편전(片箭)을 연발(連發)해서
적을 많이 상(傷)하였다.
그 후 왕(王)의 행차(行次)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의천(宜川)으로 환행(還幸)할 새 서애(西厓) 선생(先生)으로 하여
정주(定州)를 수비(守備)케 하더니, 적장(敵將)이 군량(軍糧)을
약탈코저 양곡창고(糧穀倉庫)로 대도(大刀)를 차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방(四方)에서 대거(大擧) 몰려 오거늘,
공(公)이 말을 타고 활을 메고 크게 외치고 돌격(突擊)해 나아
가니 활시위 소리가 나는 곳에 적(賊)이 쓰러지는지라.
그 목을 베어 창고(倉庫) 길가에 달아두니 적(敵)의
무리가 간담이 떨어져 싸울 뜻을 갖지 못하고 도망하여
흩어지는지라. 이로 인(因)하여 정주읍(定州邑)
양곡창고(糧穀倉庫)는 보전(保全)되었다.
그 때 가뭄이 몹시 심(甚)하여 강(江) 물이 얕아지니
선생(先生)이 상류(上流)의 방비(防備)가 무너질까 염려(念慮)하고
변방(邊方) 수어(守禦)할 계책(計策)을 의논(議論)하며
공(公)으로 대정강(大定江)을 지키라 명(命)하다.
이를 지키는 중(中) 강변(江邊)에서 도망(逃亡) 온 군사(軍士)를
보고 혹(或) 평양(平壤)에 실수(失手)가 있지나 않나
의심(疑心)되어 공(公)이 이를 탐지(探知)한 즉 이미 평양(平壤)이
함락 되었는지라. 곧 이를 선생(先生)께 보고(報告)하니
선생(先生)이 대경(大驚)하여 즉시(即時) 공(公)을 보내 왕(王)의
임시(臨時) 행궁(行宮)에 상계(上啓)하였다.
그리고 장차
명(明)나라 구원병(救援兵)이 이르면 양곡(糧穀)과 사료(飼料)의
비축(備蓄)이 없으므로 선생(先生)이 근심하고 들으니
구성(龜城)에 양곡이 많이 있다 하니, 공(公)과 종록(宗祿)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가서 곡식과 사료(飼料)를 준비(準備)하라
명(命)하는지라.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이르러 도망(逃亡)간
백성(百姓)들을 모아 국가(國家)의 위급(危急)함과 애국정신(愛國精神)을
고취(鼓吹)하여, 불일지간(不日之間)에 많은 양곡(糧穀)과
사료(飼料)를 비축(備蓄)하고 원병(援兵)을 고대(苦待)하였다.
그해 12월(十二月)에 원군(援軍) 도원수(都元帥) 이여송(李如松)이
안주(安州)에 당도하니 선생(先生)이 이(李)원수(元帥)를 보러
가려하거늘 공(公)이 선생(先生)에게 아뢰기를 처음 만날 때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 흐뭇하도록 할 계책(計策)을
강구(講究)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니 충분(充分)한 지략(智略)을
짜라 하였다. 선생(先生) 또한 같은 생각(生覺)을 가져 두 분이
충분(充分)한 의견(意見)을 교환(交換)하였다. 그리고 선생(先生)이
이(李) 제독(提督)을 만나 소매 속에 평양(平壤) 지도(地圖)를
내보이니 이여송(李如松)이 주선(朱線)을
쳐 가며 자세(仔細)히 살피고 말하되, 왜적(倭敵)의 포로가
눈 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였다.
명장(明將) 조승훈(祖承訓)1)이 안주(安州)에서 패전(敗戰)하고
돌아갈 제, 공(公)이 선생(先生)의 명(命)을 받들어
술과 음식(飮食)으로 크게 위로연(慰勞宴)을 베풀어 주고
자진퇴병(自進退兵)하기를 권(勸)하니 승훈(承訓)이 스스로
패전(敗戰)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生覺)하여 요동(遼東)으로
돌아갔다.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진격(進擊)하여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공(公)이 급(急)히 낙(駱) 오(吳) 두 장군(將軍)께
권(勸)하여 일시(一時)에 좌우(左右)로 협공(挾攻)케 함에,
적(敵)이 견디지 못하고
성내(城內)로 몰려 들어가거늘 다시 공(公)이 고(告)하되
적(敵)이 성내(城內)로 들어감은 마치 호랑이가 함정에
빠짐 같은 격(格)인데, 적(敵)이 궁한 즉 험악(險惡)한
반동(反動)이 추측(推測)되는 것이니 적(敵)이 빠져 나갈 길을
열어주고 뒤로서 소탕해버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李) 제독(提督)이 공(公)의 말을 좇아 용병(用兵)했다.
또 서애(西厓) 선생(先生)이 공(公)에게 명(命)하여
강변(江邊) 여울목 지키는 군졸(軍卒)을 감시(監視)하라
하니 강(江) 기슭을 지나며 절구(絶句) 1수(一首)를 읊으니 시왈(詩曰)
投筆操弓手亦高 (투필조궁수역고) 붓을 던지고 활을 잡으니 솜씨도 높다.
大同江水正滔滔 (대동강수정도도) 대동강 물은 옛과 다름없이 도도(滔滔)히 흐르네.
他時露布王城下 (타시로포왕성하) 타일(他日)에 승전기(勝戰旗) 날리고 왕성(王城) 하(下)에 돌아가면
欲挽銀河洗此刀 (욕만은하세차도) 은하수(銀河水)(한강수(漢江水))를 길러다 피 묻은 칼을 씻으리라.
하니 서애(西厓) 선생(先生)이 웃으시며 장사(壯士)
시인(詩人)이 있다 하더니 오늘날에 그대를 보겠다 하더라.
정월(正月)에 원병(援兵)이 경성(京城)으로 향(向)할 새
해빙(解氷)되어 강(江)을 건널 수 없으매 제독(提督)이
부교(浮橋)를 놓을 것을 명(命)하는지라, 이에 선생(先生)이
공(公)을 불러 우봉군수(牛峰郡守) 이희원(李希愿)과
한 가지로 부교(浮橋)를 놓는데 필요(必要)한 칡넝굴을
끊어오라 하거늘, 공(公)이 이(李) 군수(郡守)와
의논(議論)하기를 지금 민력(民力)이 퇴폐해 있는데
강제(强制)로 부역(夫役)을 시키느니 보다는 먼저 우리
두 사람이 직접(直接) 산(山)에 올라 칡을 끊는 것이,
오히려 민심(民心)을 달래고 감동(感動)시키는 결과(結果)가
될 것이라 하고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더니, 원근(遠近)에
사는 백성(百姓)들이 다투어 칡을 모은 고(故)로
불일내(不日內)에 부교(浮橋)를 이루었다.
4월(四月)에 원군(援軍)이 경성(京城)에 들어와 다시
도성(都城)을 회복하고 왕(王)의 거가(車駕)도 회복할 새,
공(公)이 호성(扈聖) 즉 왕가(王駕)를 호위한 공로(功勞)로
정략장군(定略將軍)의 관직(官職)을 하사(下賜)받았다.
무술(戊戌) 10월(十月)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남해(南海)에서 전사(戰死)하니 선생(先生)이
듣고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공(公)으로 하여
대신(代身) 조문(弔問)케 하니 공(公)도 일찍부터
이공(李公)과 더불어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상합(相合)하여
막역지간(莫逆之間)이였는지라 더욱 애석(哀惜)히 여기고
몹시 아파하였으며
이공(李公)의 질(姪) 완(莞) 분(芬) 등과 치상지절(治喪之節)을
협의(協議)하여 정중(鄭重)히 장사(葬事)를 치루었다.
공(公)은 이 해에 직책(職責)을 사임(辭任)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퇴폐해진 구대(舊臺)를 헐고 수간(數間)의 초당(草堂)을
새로 짓고 그 당(堂)에 만휴(晩休)라 현액(縣額)하였다.
후인(後人)들이 공(公)에게 세제향사(歲祭享祀)를 모책(謀策)하고
익양서당(益陽書堂)을 건립(建立)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교리(校理)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官) 기주관(記注官) 풍산(豊山) 유광목(柳光睦)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