童蒙敎官黃衍行狀
공(公)의 휘(諱)는 연(衍)이요 자(字)는 중행(重行)이며
호(號)는 애모재(愛慕齋)라. 황씨(黃氏)는 본래(本來)
중국(中國) 강하인(江夏人)으로 동한(東漢) 건무(建武)
연간(年間)에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이라는 분이
부해(桴海)로 해동(海東)에 오셔서 기성(箕城)에 처음
거주(居住)하시니 즉 지금 평해(平海)라, 자손(子孫)이 곧
지명(地名)을 따라 본관(本貫)으로 적(籍)을 정(定)하였더니,
기세(幾世)를 내려와 휘(諱) 온인(溫仁)이라는 분이 있어
려조(麗朝)에 관직(官職)이 금오장군(金吾將軍)이요.
또 유휘(有諱) 용(𤨭)하니 대광보국(大匡輔國)
시(諡) 충경(忠敬)이요, 입(入) 아조(我朝)하여 유휘(有諱)
천상(天祥)이요 관직(官職)이 문하찬성(門下贊成)이니
즉(卽) 개국공신(開國功臣) 시(諡) 양무(襄武) 휘(諱)
희석(希碩)의 숙부(叔父)요 유휘(有諱) 중수(仲壽)하니
관직(官職)이 예빈(禮賓) 주부(主簿)라 이가 공(公)의
고조(高祖)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백령(百齡)이요,
조(祖)의 휘(諱)는 유경(有慶)이요, 고(考)의 휘(諱)는
응문(應文)이니, 대대(代代)로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있었고, 비(妣)는 정선(旌善) 전씨(全氏) 재형(在亨)의 여(女)요,
채미(採薇) 선생(先生) 오륜(五倫)의 후손(後孫)이러라.
만력(萬歷) 을미(乙未) 12월(十二月) 20일(二十日)에
공(公)을 생(生)하니 어려서 영민(穎敏)함이 남보다
뛰어나, 7세(七歲)에 효경(孝經)을 배우고 8세(八歲)에
소학(小學)을 통달(通達)하니 침중후덕(沈重厚德)하여
성인(成人)과 같으며 향당장로(鄕黨長老)들이 일견(一見)
기이(奇異)하게 여기더라. 겨우 10세(十歲)에 모부인(母夫人)이
유행(流行) 괴질(怪疾)에 걸려 사경(死境)에 이르럿더니,
공(公)이 칼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모부인(母夫人)
입에 흘려 넣고 밤이 새도록 울며 부르니 새벽이 되어
호흡(呼吸)을 통(通)하고 마침내
회소(回甦)하는지라, 이 소문(所聞)을 들은 원근(遠近) 향리(鄕里)
사람들이 다 흠탄(欽歎)하여 진실(眞實)로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 하더라.
부모(父母)를 위(爲)하여 단지(斷指)하는 일이 세상(世上)에
혹(或) 있다고는 하나 공(公)과 같이 불과(不過) 열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少年)으로 또 애통절박(哀痛切迫)한
처지(處地)에서 이러한 장(壯)한 일을 한다는 것은 감(敢)히
어른도 본보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 후(後) 10년(十年)이
지난 을묘년(乙卯年) 하월(夏月)에 또한 병(病)으로
자리에 누워 8~9삭(八九朔)이 되매 사경(死境)에 이르러
약석(藥石)의 효(效)를 보지 못하더니, 우연(偶然)히 한
노승(老僧)이 와서 말하기를 이 병(病)은 노루고기를 복용(服用)하면
낳을 수 있다 하므로, 공(公)이 이를 구(求)하기 위하여
돌고개(乭古介) 산(山)에 들어가 호천통곡(呼天病哭)하며 하느님께
노루고기를 얻게 해달라고 축원(祝願)하였다. 그때 깊은 밤이라
월색(月色)은 밝고 사방(四方)은 고요한데 홀연(忽然)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더니 큰 범 한마리가 나타나 공(公)의
상투를 물어 등에 업고 순식간(瞬息間)에 주령(珠嶺)을 넘어
골짜기에 이르러 바위 밑 큰 나무 옆에 버리거늘, 정신(精神)을
차려 가만히 사방(四方)을 살펴보니
큰 독수리 한마리가 내려와 무엇을 채 가려 하거늘, 그 범이
큰소리로 독수리를 쫓아버리는지라 공(公)이 나무로 올라가 자세(仔細)히
아래를 살펴보니, 큰 노루 다리 하나가 구렁에 떨어져 있는데
매우 살찌고 아직 생생(生生)해 보이는지라. 심중(心中)에 기쁘고
놀라워 꿈만 같은 생각(生覺)을 느끼며 곧 내려가 노루다리를
가지고 황망히 근처(近處) 절로 들어가니 그 절은 영양(英陽)
검마사(劍磨寺)라. 집에서 거리(距離)가 백여리(百餘里)가 되더라.
노루다리를 집으로 가져와 모부인(母夫人)에게 복용(服用)시키니
신기(神奇)하게도 병환(病患)이 쾌유(快癒)하는지라,
노승(老僧)의 말이 과연(果然) 적중(適中)하였으니,
이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감동(感動)하여 산신령(山神靈)이
노승(老僧)이 되고 대호(大虎)가 되어 험난(險難)한 곳에
들어가 불가능(不可能)한 일을 가능(可能)케 한 기적(奇蹟)일 것이리라.
그후(後) 양친(兩親)의 상사(喪事)를 당(當)함에 초종(初終)
장례범절(葬禮凡節)을 극진히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6년간(六年間)의 여묘(蘆墓)살이와 매일(每日) 세차례의
애곡행사(哀哭行事)를 하루같이 겪어가니 그 효성(孝誠)의
지극(至極)함이 진실(眞實)로 감탄(感歎)하겠더라.
경술(庚戌) 7월(七月) 19일(十九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76세(七十六歲)였다. 묘(墓)는 월영산(月迎山) 자좌(子坐)라.
향중(鄕中) 사림(士林)들이 감사(監司)에게 진정(陳情)하고
도신(道臣)이 조정(朝廷)에 상계(上啓)하더니 숙묘(肅廟)
계유(癸酉)에 정려(旌閭)를 특명(特命)하고, 비답(批答) 즉
왕(王)의 유시(諭示)에 가로대, 지극(至極)하도다 10세(十歲)에
단지(斷指)하니 효성(孝誠)이 천지(天地)를 동(動)하고,
크도다 백리(百里)를 범을 타고 갔으니 그 정성(精誠)이
신명(神明)에 합(合)했던 탓이라고 했었다. 이 사실(事實)은
평해군지(平海郡誌)에도 실린 바 있다.
배(配)는 회원대성(檜原大姓) 충옥(忠玉)의 여(女)라.
생육(生育)이 없어 아우 간(侃)의 아들 담(淡)으로써
후사(後嗣)를 삼고 장손(長孫)은 영화(永華)요, 차손(次孫)은
도평(道平) 계평(繼平)이요, 증손(曾孫)은
장(長) 왈(曰) 시천(是川)이요,
차(次) 왈(曰) 택중(宅中) 위중(位中)이니 모두 가법(家法)을
잘 지켜 지금껏 효우충신(孝友忠信)하는 풍습(風習)이 있다.
오호(嗚呼)라! 이조(李朝)에 와서 치적훈공(治績勛華) 즉
치적이 오르고 공훈(功勳)이 화려(華麗)한 충효절의지인(忠孝節義之人)이
사기(史記)에 많이 있으며, 특(特)히 중엽(中葉) 시대(時代)에
와서는 선행미사(善行美事)를 포창(褒彰)하는 전례(典禮)가
잘 이루어지는 때라, 정려(旌閭)로 포상(褒賞)하고
증직(贈職)으로 영예(榮譽)롭게 하였으니 유명(幽明)이 다
감은(感恩)하여 아무
여한(餘恨)이 없었으리로다. 이것이 출천지효(出天之孝)와
격천지성(格天之誠)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能)히 이러하였으리요.
모름지기 그 자손(子孫)들은 선조(先祖)의 유적(遺蹟)을
계승(繼承)하여 변함이 없을 지어라.
덕은(德殷) 송술헌(宋述憲)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