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窩黃得中遺蹟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에 미균(米囷) 선생(先生)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휘(諱)는 유정(有定)이요 이조(李朝) 초(初)에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였다. 그의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고
뛰어나 우리들 조상(祖上)에 크게 나타난 한 분이시다.
그 덕(德)을 이어 받은지 14세(十四世)에 휘(諱) 득중(得中)
호(號) 경와(敬窩) 자(字) 택중(宅中)이라는 분이 있어,
그의 고조(高祖)는 휘(諱) 창술(昌述)이요, 증조(曾祖)는 휘(諱)
승원(勝元)이니 가선(嘉善)의
증작(贈爵)을 받았고, 조(祖)의 휘(諱)는 기세(起世)이니 가선(嘉善)을
제수(除授)받았으며, 고(考)의 휘(諱)는 옥(玉)이니 가선(嘉善)의
증첩(贈帖)을 받았다. 비(妣)는 정부인(貞夫人)이니 울진(蔚珍)
임씨(林氏) 헌정(憲貞)의 여(女)로, 영묘(英廟) 경술(庚戌) 9월(九月)
24일(二十四日)에 공(公)을 낳으니 어릴 때부터 형용(形容)이
미모(美貌)하고 성품(性品)이 온화(溫和)해 보이더니 점점(漸漸)
자라나매 재조(才操)가 과인(過人)하고 총명(聰明)이 특이(特異)하며
학업(學業)에 나아가니 15~5세(十五六歲)에 경전(經傳)에
통달(通達)하더라. 이에 서당(書堂) 선생(先生)이 득중(得中)에게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 하였다 한다.
이와같이 학문(學問)이 높아지고 덕(德)을 실천(實踐)으로
하나하나 옮겨 나아가니 인격(人格)이 점점(漸漸) 고상(高尙)해져
초선유후(紹先裕後)하는 도(道)가 그 언행(言行)에서
큰 빛을 나타내니 이 모두가 조선(祖先)의 방택(芳澤)이라 칭(稱)하였다.
시(詩)를 지어 그 뜻한 바를 기술(記述)하니
守分養眞老此生 (수분양진노차생)은
居狀泉石管幽情 (거상천석관유정)이다.
雲收遠壑忘塵累 (운수원학망진누)하고
夜靜寒窓아月明 (야정한창아월명)이라.
淡淡心身要按住 (담담심신요안주)하니
悠悠志業底修成 (유유지업저수성)이라.
好將基礎栽梧樹 (호장기초재오수)하여
留族來孫熾且榮 (유족내손치차영)이라.
이 시(詩) 한 수(首)로 부군의 포부(抱負)를 상상(想像)할 수 있다.
수직(壽職)으로 가선(嘉善) 호군(護軍)에 있었다. 여외(餘外)는 많은
기술(記述)이 있으나 찬술(選述)을 생략(省略)한다.
배(配) 정부인(貞夫人)은 예천(醴泉) 임씨(林氏) 봉상(鳳翔)의
여(女)니라. 4남4녀(四男四女)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시백(時伯)이니
증(贈) 통훈대부(通訓大夫)요, 차남(次男)은 시대(時大)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3남(三男)은 시한(時漢)이니 증(贈) 승지(承旨)요,
4남(四男)은 시채(時采)이니 참봉(參奉)이라. 여(女)는 김건수(金建壽)
나영호(羅永鎬) 김전(金銓) 박여(朴驪)에게 각각(各各) 출가(出嫁)하였다.
다음은 기록(記錄)을 생략(省略)한다.
부군(府君)이 법도(法度)있는 가훈(家訓)을
준수하였고 숭고(崇高)한 이상(理想)을 가졌으나 명리(名利)를
힘쓰지 않으시어 그 경륜(經綸)을 세상(世上)에 전(傳)치 못함은
후손(後孫)으로서 한(恨)스러운 일이라. 특(特)히 유적(遺蹟)이
산실(散失)되어 후세(後世)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였음은 후손(後孫)들의
부족(不足)한 탓으로 죄송(罪悚)하기 한(恨)없다.
현손(玄孫) 두진(斗鎭) 근찬(謹撰)